〈 329화 〉 #49. 흰색 쥐 (5)
* * *
‘역시 예상한대로구나.’
비앙카의 표정을 보면 소름이 쫙 돋아난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장난감이 제 발로 데구르르 굴러 들어왔는데.
극성팬이 준비한 보상 내역은 확실히 본인이 저지른 피해에 비해 굉장히 호화로운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마련 된 보상이 내 마음엔 들지 않았다는 거다.
보상을 말하기 전에 진중하게 고개 숙여 사과부터 했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차갑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극성팬은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제대로 사과해본 적이 없으니 방법도 모르는 거야.’
때때로 사과 글이 사람들의 화를 풀게 하는 게 아니라 더 화가 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제대로 된 뉘우침이 보이지 않는 글,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책임을 돌리며 남탓을 하는 글, 억지로 사과하는 게 티가 나는 글, 이번 일로 본인이 어떤 책임을 질 생각인지 책임에 대한 부분을 확실하게 적어놓지 않은 글 등이 그에 해당 된다.
이런 안일한 사과글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보다 더 큰 후폭풍을 만들어 내고,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프레젠테이션을 하듯이 사과를 끝낸 칸나가 우리 둘의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과는 그게 끝인가요?
비앙카의 물음에 칸나가 눈동자를 떨었다.
네?
그게 최선이었어요?
…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어요.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어떻게 하실 거에요? 마음에 안 드시잖아요.”
비앙카의 미묘한 태도에 불길함을 읽었는지 극성팬이 상황파악을 하려 애쓰고 있었다.
저런다고 해서 그녀가 한 사과의 결과가 긍정적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축하해, 네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 같네. 하나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은 사과였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네요. 주변에 조언을 좀 받지 그랬어요? 이게 뭐에요? 기껏 기회를 줬는데 다 망쳤네.
비앙카가 내 말을 잽싸게 통역했다.
극성팬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마냥 울상이 됐다.
그럴 리 없어요. 이만한 보상이면 넘칠 정도로 준비한 거에요!
억울해 해도 바뀌는 건 없답니다. 사과의 본질부터가 틀려먹었는데 보상으로 뭘 준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럼 차라리 나한테 바라는 게 뭔지 직접 말해줘요!!
재미없는 소릴 하네요. 사과 받으러 온 사람한테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시큰 둥한 태도를 보이는 비앙카에 극성팬은 엄청난 절망을 하고 있었다.
‘비앙카가 사업 쪽으로 괴롭히고 있다더니, 많이 심각한가보네. 저렇게 슬퍼할 줄은 몰랐는데.’
내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기 전까지 압박을 넣었던 걸 되돌릴 생각이 없다고 했던 걸로 안다.
사과를 받으려고 부르기는 했으나 만족스럽지 않으면 쉽게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극성팬의 앞날은 껌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극성팬의 사과를 받게 된 현재.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실망감이 찾아올 만큼 형편없는 사과에 내 마음은 굳게 잠겨진 상태였다.
재벌 딸의 형편없고, 무례한 사과는 도저히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쏘리라는 간단한 단어조차도 뱉은 적이 없잖아.’
본인이 무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쁘다.
“재벌들은 원래 저런 거야? 제대로 된 사과 방법을 모르는 사람 같아. 다른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닌데 상식이 이렇게까지 차이 나는 게 정상인가?”
“사는 세상이 다른 거에요. 사실 저런 사람들 입장에서 사과는 저게 맞긴 하거든요.”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물질적인 부분으로 잘못을 메꾸려고 한다.
그러한 사과가 깔끔하고 문제의 소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쪽 사람들의 상식에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거다.
“저쪽 상식이 이런 거라고 해도 나는 아니야. 내가 저 사람 사정까지 봐주면서 용서를 해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사과를 받을 사람이 가해자의 사정을 봐주면서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비앙카도 내 말이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럼요. 머리가 좀 있었으면 사과의 방식을 자기한테 맞추는 게 아니라 주…아니, 해솔씨한테 맞췄겠죠.”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음을 직감한 극성팬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한테 바라는 게 있다고 하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어요.
아뇨, 바라는 게 있을 리가요. 그보단 지금 화내고 있는 걸요. 칸나씨가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어서요.
무례요?! 제가요? 제대로 통역해주신 거 맞으세요?
비앙카가 싱긋 웃는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망치고 싶어서 안달이 나긴 했을 거다.
하지만 굳이 그녀가 나설 필요도 없이 본인이 알아서 이 자리를 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나머지는 너한테 다 맡길게. 이제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앙카는 드디어 공식적으로 주인님의 허락을 받은 장난감을 갖게 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도 재벌 가문 출신이라던데….’
나로서는 쳐다보는 것도 힘든 여자를 장난감으로 만들어서 갖고 놀 생각을 하는 비앙카의 엄청난 배포를 따라갈 수 없었다.
털썩!
자리를 피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털썩 주저앉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극성팬이 나를 향해 외쳤다.
“사려즈세여!”
외국인의 어설픈 한국어.
하지만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아 뒤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모태씀니다! 미아내요!”
“!!”
용서해주세요!! 오늘 해결하지 않고 돌아가면 쫓겨날지도 몰라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극성팬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비로소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 그보다 더 격한 모습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부터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극성팬 소녀는 누가봐도 뉘우치고 있다는 게 보였으니 말이다.
“어머. 저게 무릎까지 꿇네?”
비앙카의 얼굴에 악의가 가득 찬다.
아마 자기가 직접 저 소녀를 무릎 꿇려서 펑펑 울리고 싶은 거겠지.
나는 비로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았기에 잠깐의 시간을 더 할애해주기로 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입니까? 결국 끝까지 제대로 된 반성이 없군요.
그게 처음으로 내가 극성팬 소녀에게 영어로 말을 건 순간이었다.
? ? ?
칸나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진해솔의 목소리를 듣고 더욱 더 크게 설움을 토해냈다.
눈물이 뚝뚝 흐르고, 설움에 숨이 격해져 끅끅거리는 형편없는 소리까지 났다.
진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끄흑! 끄흐흑! 으우…흐응…!
그리고 원래 울고 있는데 달래주는 사람이 생기면 더 서러워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칸나는 그동안 했던 마음고생과 타국에서 혼자 남아 압박감을 견뎌야 했던 외로움이 함께 터지면서 곡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괜히 비서를 해고하는 바람에 모든 준비를 혼자 해야 했던 칸나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지난 날이다.
이보다 더한 것은 해줄 능력이 없을 정도로 꽉꽉 보상안을 준비했다.
나름 자신도 있었다.
‘내가 이만큼이나 준비했는데 이걸 거절 할 리 없어.’ 라는.
그런데 정작 보상안을 모두 말하고 나니 차가운 냉대가 쏟아졌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화초처럼 곱게 자란 칸나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차갑고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펑펑 우는 가운데, 또 다시 알지 못할 외국어가 쏟아진다.
“신경 쓰지 말고 가시죠. 동정심 자극하는 거에요. 저렇게 울면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요.”
“운다고 사과 받아 줄 생각은 없어. 그래도 일단 제대로 된 사과는 받았으니까 기회를 주려는 거야.”
자신은 알아듣지 못할 말.
사과도 제대로 못해서 냉대를 받던 자신이 형편없이 울기까지 했으니 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칸나가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진정이 좀 됐습니까?
참 다행인 것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진해솔과 비앙카가 기다려주었다는 거다.
냉정하게 가버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
네에…진정 했어요. 자꾸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드리네요. 면목 없어요.
칸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진해솔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뿐인가?
사과를 했던 게 먹혔는지 지금까지 자신을 대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목소리가 평온하고 다정했다.
‘내가 바란 게 이런 거였는데….’
이 작은 다정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었다.
‘정말 내가 잘못한 거였어. 시작 단추를 잘못 꿰어버리는 바람에 좋았을 수도 있는 관계가 엉망이 된 거였다고.’
비로소 칸나는 자신의 잘못으로 어떤 것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진해솔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팬으로서 잃어버려선 안 되는 걸 본인의 실수로 잃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이 수습이 된다 해도 더 이상 진해솔에게 팬으로서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좋아하고 있어.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것도 전부 좋아하니까 한 거였고…. 그치만 그게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어.’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인인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꿇고 있던 무릎을 피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나서야 칸나는 진심을 담아 입을 떼었다.
그날 촬영장에서 무례한 짓을 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좋아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못된 짓을 했습니다. 피해 입은 걸 보상해드리겠다고 한 건 제가 할 수 있는 사과가 그런 것들밖에 없어서였어요.
…….
저에게 보상 외에 더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뭐든 해보겠습니다.
이제 정말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봤다.
이대로 용서 받지 못한다 해도 속은 시원할 것 같았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안 받아준다는 것은 애초에 자신의 사과를 받아 줄 생각이 없는 거다.
‘날 그냥 가지고 놀고 싶었던 거야.’
감당하지 못할 짓을 해서 이런 일을 만들었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순 없었다.
‘언니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내 말을 믿어주기나 할까?’
사과도 못해서 이 꼴을 만드냐며 화를 내면서 그녀를 짓밟을 거다.
‘그래도 언니한테 할 말은 생겼잖아. 무릎 꿇고 울기까지 했다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언니도 슬슬 화가 날 것이다.
우리 가문을 어떻게 봤으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받아주냐면서 말이다.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건 어느 정도 ‘의도’가 들어갔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는가?
‘결국 언니랑 싸우게 될 거야. 나는 조용히 있다가 빠지면 되고.’
칸나가 숨을 구멍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가운데.
진심이 들어가 있는 사과를 받은 진해솔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정도면 뉘우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받아주실 거에요?”
비앙카는 인형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빼앗겨서 잔뜩 심통이 난 여자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무릎 꿇고 울면서 사과하는 게 저쪽 식 사과는 아니잖아.”
“저런 얼굴을 해서 속으시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게 아닐 거에요. 자기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하는 짓이겠죠. 아마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증거가 필요했을 거에요.”
“무릎을 꿇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비앙카가 비릿하게 비웃음을 보인다.
“무릎이 비싼 건 일반인들이죠. 저희 같은 사람은 의외로 무릎이 싸답니다. 가진 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꿇을 수 있거든요. 빚은 마음 속에 남겨뒀다가 나중에 갚으면 되고요.”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기에 하루아침에 적이었던 이가 아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감정으로 호소하는 것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는 게 저쪽 사람들이란다.
“여태까지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다가 일이 이렇게 복잡해진 거잖아.”
“방금 저 아가씨는 인정하게 된 거에요. 해솔씨가 을이 아니라 갑이라 걸요. 인정을 한 순간부터 저 아가씨가 무릎 꿇는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에요. 자기보다 센 사람에게 동정심을 호소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그건 자존심이 꺾인 게 아니라 머리를 잘 쓴 게 되니까요.”
“참 별의 별 걸로 복잡하게 사는 구나, 너희는.”
사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비앙카는 칸나의 사과가 절대 진심이 아닐 것이라며 섣불리 용서하는 것을 막아세웠다.
저쪽 세계를 잘 아는 비앙카가 하는 말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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