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 #49. 흰색 쥐 (6)
* * *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을 비는 소녀.
그런 소녀의 사과를 가증스러운 변명이라고 속닥이는 여자.
두 사람 모두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떨어놓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일단 너는 나가있자.”
“저를 왜요? 주인님, 설마…!”
비앙카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울음을 터트린 게 불쌍하다는 이유로 봐주려 할지 모른다는 걱정일 거다.
내가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앙카만큼 나쁜 인성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저 여자랑 진지하게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어서 그래. 네가 있으면 방해 돼.”
“얌전히 있을게요!”
냉큼 안 그러겠다고 하는 비앙카.
눈까지 깜빡이면서 순수한 척 해본다.
물론 어림도 없는 짓이다.
“쓰읍! 안 돼. 어서 나가있어.”
“쳇!”
내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비앙카는 불만을 가득 담은 채로 자리를 피했다.
비앙카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극성팬 소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에요?
나가 있으래서요. 둘이서 대화를 좀 나누고 싶나 봐요. 축하해요.
에?
비앙카가 알 수 없는 축하 인사만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극성팬 소녀가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긴장 할 필요 없어요.
그으…저랑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거 맞나요?
네. 비앙카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잠깐 비켜달라고 했어요. 왜요, 다시 불러왔으면 좋겠어요?
아, 아뇨! 아닙니다.
극성팬 소녀가 다시 불러오냐는 말에 두 손을 황급히 저으며 만류했다.
나도 비앙카가 무서운데 저 작은 소녀가 비앙카를 좋아 할 리 없는 것이다.
일단 일어나서 제대로 얘기 좀 해봅시다. 언제까지 꿇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내 말을 들은 극성팬 소녀, 칸나가 믿기지 않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아직 화가 덜 풀리셨다면 계속 이러고 있을게요.
그런 상태로 대화를 나누기엔 제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요. 용서 안 해주면 내가 개새끼가 되잖아요. 용서 강요하지 말죠?
힉! 그, 그런 뜻이 아닌데….
어쨌든 그래서 일어날 거죠?
네, 일어났어요!
칸나가 내 말을 듣고 잽싸게 일어났다.
그세 쥐라도 났는지 비틀거렸으나 친절하게 잡아주지는 않았다.
다리가 저린 것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겸, 주방으로 가서 음료를 가져왔다.
“누구 좋으라고 차까지 직접 만들어서 주시는 거에요? 너무 과분한데.”
“어차피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은 건 맞다.
하지만 칸나씨의 외형이 미성년자 같이 왜소하고 어리다는 점이 나를 팍팍하게 굴지 못하게 만든다.
‘확실히 여자가 우는 건 강력하단 말이지.’
선즙필승이라는 말이 있다.
그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서 서럽게 우는 걸 보니 ‘말이라도 좀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비앙카가 어떻게 압박을 했기에 저렇게 서럽게 울면서 내게 용서를 받으려 하는 건지, 그 사정도 알고 싶었고 말이다.
차를 만들어서 나가니 칸나씨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울어서 눈 밑이 발갛게 부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좀 마셔요.
감사합니다.
후후 뜨거운 김을 불어내며 호로록 차를 마시니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머리도 한층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럼 이제 얘기 나눠볼까요?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으니 칸나씨가 엉덩이를 움직여서 허리를 꼿꼿하게 피더니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용서해주실 건지 궁금합니다.
용서해줄 건지 궁금하다고?
새삼스럽게 그런 걸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칸나씨가 어떻게 사과를 하느냐에 따라 다를 겁니다.
…비앙카씨는 아니었어요. 제가 어떻게 하든 절 용서 할 생각이 없어보였거든요.
칸나의 말에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실제로 비앙카는 칸나를 갖고 놀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칸나는 내가 여기서 용서를 한다고 해도 바뀌는 게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비앙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제가 용서한 일로 두 말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녀와 내 일에 비앙카가 도움을 주기 위해 끼어든 상황이다.
나와 그녀 사이의 감정이 해결 된다면 비앙카가 나설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군요….
내 말을 썩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만,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는지 마지못해 수긍해온다.
우리 사이에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까?
…네.
전부 하세요. 지금이 아니면 이후로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그녀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칸나도 내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했다.
제가 무릎을 꿇고 울었던 걸로 마음이 좀 풀리신 건가요? 저랑 대화를 나눌 생각을 하신 걸 보면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
지금 포인트를 완전 잘못 잡고 있네요. 제가 당신을 동정해줄 만큼 사이가 좋습니까? 그리고 방금 운 것도 진심으로 뉘우쳐서 운 게 아니라 본인이 곤란하게 돼서 그게 겁나니까 울어버린 거잖아요.
!!
칸나는 정곡을 찔른 듯 움찔 몸을 떨었다.
비앙카가 협박을 해서 이 자리에 온 여자다.
반성을 해봤자 얼마나 했겠는가?
칸나씨가 무릎을 꿇었다고 대단히 감동해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오해를 한 모양인데, 그런 짓을 내가 왜 합니까? 사과를 그딴 식으로 해놓고 참 당당하네요. 지금도 난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기회나 한 번 더 주자 생각한 겁니다.
칸나의 표정을 보니 절망이 가득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재촉했다.
그래서 더 할 말 없는 겁니까?
…어떤 말을 해야 용서를 받을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게 뭔가를 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나 봐요.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억울함이 가득하다.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계속 얘기나 해볼 것이지, 칸나는 자기가 가져 온 서류만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제대로 사과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미 퇴짜를 맞은 보상안을 마지막 희망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어리숙함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숨을 깊게 쉬고 말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으니 직접 말해줄 수밖에 없겠네요. 팬한테 좋지 못한 말을 하는 건 저한테도 마음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칸나씨가 했던 행동은 팬이 할 법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범죄일 뿐이죠.
의욕없이 무능하게 앉아만 있던 칸나가 펄쩍 뛰었다.
버, 범죄라뇨!?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한테 한 행동이 있는데 아니라고 하는 겁니까?
물론 제가 잘못한 건 알지만, 그런 의도로 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냥 해솔씨한테 맛있는 걸 먹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같이 밥을 먹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긴 했지만, 그거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에요!
왜 연예인들이 사생팬들을 대놓고 싫어하고 경멸하는가.
그건 건전한 팬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았다면 안 했을 거라고? 그게 아니라 비앙카한테 협박을 받을 줄 알았으면 안했을 거라는 말이겠지.’
그들은 좋아한다는 것을 핑계로 연예인을 따라다니며 사생활을 파헤치고 함부로 프라이버시를 침범한다.
자기들에게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놓고 참다못해 신고를 하면 나쁜 의도는 없었다, 너무 좋아해서 한 일이다라고 변명하지. 그런다고 잘못이 사라지는 게 아닌데.’
좋아해서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거면 다 봐줘야 하는 건가?
더 질이 나쁜 경우에는 일부러 악의적인 행동을 하는 팬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불쾌한 행동을 한 후 자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연예인을 보며 ‘관심을 받았다.’라고 행복해 하는 뒤틀린 집착.
‘자기가 한 짓이 범죄라는 걸 자각도 못한다지.’
싫어서 한 게 아니라 좋아서 한 건데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쪽 업계에서 선배님들이 직접 경험하는 일들을 듣다보면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을 정도로 황당한 일이 많았다.
모두들 그렇게 변명하곤 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범죄인 줄 몰랐다.
한 번도 자신을 그런 범죄자들과 동일선상에 놓아본 적 없었는지 충격 받은 채로 굳어버렸다.
이게 내가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본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것인지 자각하고 진심으로 뉘우칠 준비를 하는 것.
여태까지 그녀가 했던 모든 사과가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사과 받아봐야 뭐하겠어.’
심하게 충격 받은 칸나를 위해 적당한 당근을 말해보자.
이대로 그냥 뒀다간 의욕이 전부 꺾여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진짜 저를 위하는 팬이었다면 좀 더 정상적으로 더 좋은 방법을 통해서 저를 만났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칸나씨와 저는 웃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죠.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니 남들보다 훨씬 부담도 없었을 겁니다.
근절시키려고 해도 암표는 언제나 생기는 법.
돈이 많은 칸나라면 얼마든지 그런 방법으로 내 팬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방법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 행동 자체가 큰 민폐이고 실례인 겁니다.
…….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이 없다.
이제 사과는 됐습니다. 받은 걸로 치죠. 돌아가세요. 비앙카한테 잘 말해두겠습니다.
충격 받은 칸나를 위로해줄 생각은 없고, 이만 돌려보내기로 했다.
비앙카가 투정을 부리겠지만, 그건 침대 위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남을 괴롭히면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과 섹스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비슷했기에 대체가 가능했던 것이다.
항상 자주 못하는 잠자리를 아쉬워하던 비앙카이니 한동안은 자주 침대에 불러서 녹여주면 불만을 표할 수도 없을 것이다.
눈치 빠른 그녀라면 내가 주는 보상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 ? ?
[이제 돌아와. 돌아와서 얌전히 처박혀 있어.]
“언니, 나…!”
[하, 맞다. 너 비서 없지? 비서는 왜 해고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니? 비행기 표 모바일로 보낼 테니까 그거 타고 와.]
뚝!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말하던 언니가 매정하게 통화를 끊어버린다.
칸나는 울적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한숨을 깊게 쉬었다.
“비행기 좌석 얘기하려던 게 아닌데….”
칸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거하게 사고를 친 탓에 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큰일 날 수 있었으나 이미 한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람한테 다시 한 번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그것을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자신이 해고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오라고 할까.’
빈자리가 아쉬워지니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게 되는 칸나였다.
지금 그녀는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 게 없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단 말이야.”
진해솔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비앙카에게 잘 말해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깔끔하게 압박을 푼 것이다.
비앙카가 자신에게 했던 걸 떠올려보면 결코 쉽게 자신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해솔이 하지 말라고 하니 단숨에 압박을 풀어줬다.
칸나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진해솔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난 동정심으로 자비를 얻은 거야. 그 사람이 너무 착해서.’
한 때는 일을 복잡하게 만든 진해솔을 원망했던 적이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진해솔은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역시 자신이 첫 눈에 반한 남자다운 면모였다.
‘내가 보는 눈이 있긴 해.’
문제는 진해솔이라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져놓고 미숙한 접근으로 인연을 망쳐버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입덕부정기일 줄이야!이제 인정했으니까 다시 시작해야 돼. 우리 인연이 이것밖에 안 될 리 없어. 그 사람도 나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봐준 거잖아.’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니라고!
칸나는 어느새 비앙카보다 일찍 만났다면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제대로 사과하자.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비앙카라는 존재 때문에 첫 번째는 될 수 없겠지만, 두 번째 자리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만남에 실수를 저질렀으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력 어필이 될 것이다.
‘이번에 사고 친 걸로 언니가 슬슬 내 결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으니까 마침 잘 됐어.’
찐따 특.
별 생각 없이 웃어준 것으로, 자기한테 마음이 있는 줄 앎.
칸나도 어김없이 찐따 특성을 피해갈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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