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 #51. 훈훈한 미담 (1)
* * *
연기가 끝나고 나서 매니저 누나와 스태프들이 나를 둘러싸고 한껏 걱정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예민한 장면인데다가 바닥을 뒹구는 씬이다 보니 그랬다.
“그냥 덜덜 떠는 것밖에 한 게 없는데 뭐.”
말은 덜덜 떠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사실 이번 씬은 정말 각 잡고 집중해서 찍기는 했다.
항상 생글생글 웃는 게 희성이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희성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예쁜 병풍 데려다 놨다고 악플이 단 놈들한테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달까.’
악플이라서 화가 난 게 아니다.
그들이 희성을 두고 조롱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연기를 잘못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 믿지만, 세 명이 거짓말을 하면 믿게 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오늘 연기로 더 이상 악플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생각하기 뭐하지만, 내가 봐도 오늘은 연기 잘 했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희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적 있겠는가?
드라마 초반에 발랄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숨겨진 아픔이 나오는 지금의 씬이 더 강렬하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찍은 씬에서 염두 해두었던 부분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감독님도 스태프도 모두 박수를 쳐줄 정도로 말이다.
“잘해줬어! 아주 완벽했어. 진짜 보는 내내 애잔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드라마에서 희성은 여자들이 상상하는 왕자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물론 눈치가 좀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아름답고, 다정하며 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자.
덕분에 요즘 희성이라는 역할의 버프를 받아 내 인기가 부쩍 올라간 상태였다.
회사에선 CF 출연 계약이 밀려들어와 행복한 비명을 질렀고, 나 또한 환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완벽한 남자를 연기하는 게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감정 연기 잘 하는 사람을 데리고 헤실헤실 웃기만 시켰던 거야? 내가 몹쓸 짓 했어. 반성한다. 반성해.”
“희성이가 원래 그런 아이잖아요. 아픔은 속으로 삼키는. 단순히 웃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역시 배우는 배우야.”
저 아이돌입니다만…?
흐뭇함에 흐뭇해하는 걸 초칠 수는 없었기에 웃음으로 넘겼다.
내가 아무 문제없는 것 같아 보이자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도 서서히 관심을 덜어냈다.
다음 촬영을 위해 피 분장을 받고 있는데, 내 옆에도 마찬가지로 분장을 하고 있는 배우가 있었다.
나와 함께 촬영하며 소름끼치는 범인 역할을 연기한 무명 배우였다.
‘연기 참 잘하던데….’
만약 상대역인 그녀가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나도 그렇게까지 좋은 연기를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님.”
“…….”
“선배님?”
“네, 네? 저, 저요?”
내가 자신을 부를 줄 상상도 못했다는 듯,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말까지 더듬었다.
“아…놀라셨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저는 왜…부르셨는지…?”
“그렇게까지 긴장하실 건 없는데, 그냥 남은 촬영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싶어서요. 방금 촬영에서 다치신 곳은 없는지 걱정 되고요.”
“다, 다친 곳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격렬하게 거부감을 보였다.
다만 자신에게 관심이 몰리는 것이 너무 싫은 모양이다.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좁혔다.
“얼굴 숙이시면 안 돼요.”
다만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지는 못했다.
분장을 담당하는 스태프가 지적을 했기 때문이다.
“크흠, 죄송합니다.”
“연기를 너무 잘 해주셔서 연기하는 게 정말 편했어요. 집중도 잘 됐고요.”
“…네에.”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티를 너무 팍팍 내는 바람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귀가 빨개진 것을 보면 싫어서 거부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과 낯가림 때문에 그런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어진 추격씬 촬영이 꽤 오랫동안 진행 됐다.
어두운 밤, 산길을 긴박하게 달리는 촬영은 체력을 쑥쑥 닳게 만들었다.
“허억, 허억…어휴! 장난 아니네요.”
“발목 괜찮아?”
“네! 괜찮아요.”
나뭇잎으로 푹신하게 깔아놓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었지만 다들 내 몸을 걱정하느라 바빴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백강이씨 불러와.”
“옙!”
백강이.
아침부터 내 상대역이 되어 주었던 범인 역할의 배우였다.
도망치는데 성공한 내 뒤를 따라 가다가 내가 넘어졌던 부분에서 똑같이 넘어지는 장면이었다.
간단하게 리허설을 끝내고, 백강이씨가 촬영에 들어갔다.
“으악!”
그녀는 매우 리얼하게 나뭇잎이 쌓여져 있는 곳에 넘어졌다.
‘어우. 진짜 넘어진 거 아니야?’
걱정하는 것도 잠시.
오뚝이처럼 백강이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씩씩하게 일어난 그녀의 모습에 감독님은 다시 한 번 촬영을 요구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리얼하게 넘어지는 촬영을 성공해냈다.
넘어지는 씬 이후에는 산속에서 범인을 피하기 위해 달리다가 바위틈에 숨는 장면을 촬영했다.
늦은 밤 산길을 달려야 하는 위험한 씬이다 보니 촬영이 종료 되었을 땐 새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고생했어!”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매니저 누나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 고생 많았지?”
“힘들긴 한데, 제일 힘든 촬영이 끝나서 속이 후련해. 가자, 누나.”
“차 조심히 몰 테니까, 잠 좀 자.”
“으응~”
솔직히 내가 어디 가서 촬영이 너무 피곤하다고 징징 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속사의 케어를 받고, 배우이기에 촬영만 끝나면 바로 촬영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남아서 촬영 장비를 다 챙기고서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지구의 한 배우가 자기는 스태프가 차린 멋진 밥상을 맛있게 먹기만 했다라는 소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땐 참 멋진 배우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내가 직접 현장을 경험하고 보니 왜 그런 소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스태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은 좀 더 보상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잠깐만, 누나. 차 좀 멈춰 봐.”
“왜?”
나는 눈을 감으려다가 창밖에 보이는 사람을 확인하고 매니저 누나에게 차를 멈추게 했다.
낯익은 뒷모습을 가진 사람이 절뚝이면서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저분 지금 혼자 걸어가고 있으신 거 맞지?”
내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준 매니저 누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어? 으응. 그렇게 보이긴 하네. 근데 왜? 아는 사람이야?”
“오늘 나랑 같이 촬영했던 범인 역할 배우야.”
“그럼 단역이잖아. 설마 태워주려고?”
“다치신 것 같은데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아?”
“에이, 너무 오지랖 부리는 거 같은데.”
“새벽이라 버스도 끊겼을 거 아냐.”
매니저 누나는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었는지 빵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빵!
나는 창을 내려서 클락션 소리에 걸음을 멈춘 백강이 선배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태워드릴게요.”
“아,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다리 쩔뚝이시던데, 무리하시면 안 되잖아요.”
아직 촬영이 끝난 게 아니다.
그런데 배우 몸이 다쳤다면?
촬영에 큰 지장이 갈 수 있었다.
다친 백강이씨를 위한다는 명목도 있지만, 촬영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도 있는 것이다.
결국 내 설득에 넘어간 백강이씨가 조심스럽게 차에 올라탔다.
“…감사합니다.”
다행이 그녀가 말한 도착지가 우리가 가야 할 경로와 크게 갈리지 않았다.
반대편이었으면 매니저 누나한테 크게 미안했을 텐데 말이다.
“촬영 때문에 다치신 거죠? 눈치 못 챘어요. 파스 좀 바르실래요?”
“괘, 괜찮아요. 조금 삐끗한 거라서….”
“내일도 촬영이 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해야죠.”
매니저 누나가 오늘 추격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꼼꼼하게 챙겨 온 뿌리는 파스였다.
험상궂게 생긴 얼굴과 달리 엄청난 수줍음을 보이며 파스를 받아든 그녀가 어색한 몸짓으로 발목에다가 파스를 뿌렸다.
치익 치익
…누가 봐도 소심하게 말이다.
“그냥 시원하게 뿌리셔도 돼요. 차 안에 이미 파스 냄새가 배여 있거든요.”
골병들기 쉬운 직업이 아이돌이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차 안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파스를 뿌려대곤 했다.
배려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강이 선배님은 끝까지 주변에 퍼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목에 파스를 뿌렸다.
원채 성격 자체가 수줍음이 많은 듯 했다.
여기서 더 참견하면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줄 것 같아 말을 줄이기로 했다.
“…….”
“…….”
어쩌다가 스태프들 버스를 타거나 개인 자가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이 좋지 못할 게 뻔한 무명 배우에게 실례 될 게 뻔한 질문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늘 그녀가 보여주었던 연기력에 대한 칭찬 뿐이었다.
“선배님, 혹시 어떤 작품에 출연했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예에? 왜…요?”
“면목 없지만, 선배님 연기하는 걸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런데 정말 포스가 대단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선배님 연기를 보고 배우고 싶었어요.”
사실 인터넷에 백강이 배우를 쳐봤다.
그런데 소속 된 회사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 무명 생활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단한 곳에 나오지 못해서요. 참고할 만한 게 없을 거에요.”
그래도 자기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한 주제로 말을 걸어서 그런지 수줍어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은 해주고 계셨다.
“아! 거기에 나오셨어요?”
“네에…그…식칼 살인마로….”
“오.”
배역 이름조차도 예사롭지 않았다.
사실 백강이 선배님을 신경 쓰는 이유는 민영 누나 때문이었다.
민영 누나가 무명 배우 생활로 무척이나 힘들어 하지 않았나?
지금은 대세 여배우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때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서 연기를 하는데 큰 고초를 겪었었다.
‘그래도 백강이 선배님은 민영 누나보단 사정이 나은가? 험악하게 생긴 외모를 장점으로 살려서 연기를 하시니까.’
제작진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배우가 잘 생기고 예쁘기를 바라지 않는다.
주연 배우들을 빛나게 해줄 단역과 조연 배우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백강이씨는 양아치, 조폭, 살인마 같은 험악한 삶을 사는 쪽의 배역을 맡아 활동했다고 한다.
다만 정말 단역 그 자체라서 지금처럼 대사가 많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
민영 누나가 자꾸 떠올라서 그런지 백강이 선배님을 자꾸만 신경 쓰게 된다.
그렇다고 그녀를 민영 누나처럼 얼굴을 바꿔준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때 사소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싶다.
“연기는 어디서 배우셨어요?”
“…극단에서?”
“아, 정말요? 민영 누나도 예전에 극단 생활 했었다고 하던데 혹시 아세요?”
“나야 알지만, 그 친구는 날 모르지 않을까요…?”
“그래도 공통점이 있으니 대화가 잘 통하겠어요. 내일 민영 누나랑 촬영 있으시잖아요.”
“그…렇죠?”
희성이 겨우 도망치는데 성공한 가운데, 클리셰처럼 민영 누나와 주아 누나가 뒤늦게 납치 당한 장소에 도착한다.
평소 집착이 심한 그녀들이 희성에게 GPS를 심어두어 납치 된 곳을 쉽게 알아낸 것이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복 받을 거에요.”
“하하, 푹 주무시고 내일 촬영장에서 뵐게요. 선배님!”
숨 막히는 침묵이 맴돌 때도 있었지만, 멀기만 하던 거리감이 조금은 줄어든 시간을 보내고.
백강이 선배님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사실 대화를 나누다가 선배님이 먼저 말을 해줬는데, 타고 온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렉카를 부르기엔 촬영 때문에 쌓인 피로가 너무 커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고 했단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 된 곳이 워낙 외진 곳이다 보니 택시를 찾으러 직접 걸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를 불러 호의를 베푼 것이고 말이다.
‘스태프 버스는 생각을 못했다는 걸 보면 엄청 힘들긴 하셨나봐.’
선배님을 내려주고 숙소를 향해 차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솔직히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좀 무서웠거든.”
매니저 누나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명품 주연이라는 말이 있잖아. 나는 선배님이 나중에 명품 주연으로 활약할 수 있을 거라고 봐.”
“연기를 그렇게 잘해?”
“응. 선배님 덕분에 연기가 잘 됐을 정도야. 이번 출연으로 관계자들한테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네가 그 정도로 칭찬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연기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사람이야. 누나도 촬영장에서 봤으면 내 말에 동의했을 걸?”
이렇게 하나하나 인맥을 넓혀가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주머니 속 송곳이라고, 저런 사람은 순리에 따라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게 될 거다.
그리고 이러한 내 짐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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