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51. 훈훈한 미담 (3)
* * *
방심했다.
“!!!”
“아….”
“…….”
“…….”
처음 백강이 선배님과 눈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다.
“그, 그, 그게…미, 미, 미안!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미안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접적으로 일 치르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차라리 그녀가 조금 일찍 이 자리를 지나갔다면 거사를 치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아이템을 쓰고 있었으니까.
정사가 끝나고 촬영장에 돌아가기 위해 옷을 추스른 후 아이템 효과를 해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흩어지지 않은 열기에 키스를 나눴다.
그게 문제가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변명을 할 수도 없게 정확하게 키스하는 모습을 들켰기에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설득이었다.
“음,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게…그냥…촬영이 곧 시작 되는데…안 보여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건 백강아 선배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주연 배우들끼리 키스하는 걸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뒤에 물러나 있던 주아 누나가 말했다.
“되도 않는 변명은 하지 않을게요. 지금 본 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 물론이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해요, 선배님. 저희 관계는 매니저도 모르거든요.”
주아 누나의 말에서 숨겨진 뜻은 ‘우리 관계가 밝혀진다면 범인은 너밖에 없다’는 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강이 선배님은 속의 뜻을 눈치 채지 못하고 순순히 협조를 해주겠다고 말해왔다.
“나만 믿어! 절대절대 말하지 않을게!”
흥분했는지 콧구멍까지 벌름거린다.
두 주먹을 움켜쥐며 대답한 선배님은 우리에게 정리하고 오라면서 후다닥 자리를 피해줬다.
“…믿어도 될까?”
“해솔이가 잘해줬다며. 은혜를 원수로 갚진 않겠지.”
“근데 좀 뜬금없지 않아? 해솔이를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는 게 좀….”
“흐응~ 진해솔씨? 말씀 좀 해보시죠?”
“…….”
아무 마음이 없는데 여기까지 찾아온다?
여태까지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더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크흠! 선배님 마음을 함부로 추측하지 마.”
“차라리 잘 됐어. 우리 사이를 알았으니까 더 이상 엉뚱한 생각은 안 하겠지.”
“그래도 걱정 되는데….”
세 사람 모두 스캔들이 치명적인 입장이다.
“내가 잘 말해볼게. 정 안 될 것 같으면 그 방법을 써도 되고.”
누나들 중 ‘그 방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으응. 그래도 다행이다. 스태프한테 걸렸으면 100% 바로 기사 났을 거야.”
“그랬으면 아이템을 써야지.”
“흠, 문제 생길 것 같으면 말해. 나도 도울 테니까.”
아이템까지 쓸 수 있다는 말을 하니 다들 큰 걱정을 덜었다는 듯 안도한다.
“그나저나 오늘 이후로는 이런 위험한 짓 그만하자.”
“윽!”
“아앗!”
“진작 그만했어야 했는데, 점점 대담해졌잖아. 엉덩이 까고 있을 때 들켰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로 촬영장에선 다시 처음처럼 자제하자.”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
계속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가다 보니 어느새 입에다 싸는 것이 본격적으로 섹스까지 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위험을 멈출 수 있는 건 지금 뿐이었다.
“동의하지?”
“…쩝,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만하자고 하려고 했어.”
“히잉.”
“민영 누나는 아닌가 본데?”
“요즘 촬영 때 우리랑 같이 시간 보낸다고 로즈 언니네 가서 잤잖아. 촬영장에서 안 하면 우린 언제 해? 물론 예정일이 얼마 안 남아서 당분간은 계속 그 언니네 있어야 한다고 했던 건 알아. 근데 촬영장에서 안 하면 아예 기회가 없어지는 거잖아.”
다른 여자들 모두 복순 누나의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알고 배려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다.
밤에 꼭 복순 누나의 곁에 있어줘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용인이 있다지만, 그래도 결국 남이잖아.’
복순 누나는 현재 학원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잠시 맡기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철저하게 몸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는데, 시골에 계신 어머님이 올라오는 걸 누나가 너무 싫어해서 복순 누나를 생활을 위해 3명의 도움을 주시는 분들을 고용해놓은 상태였다.
밥을 전담으로 맡아주시는 사람 한 명, 임신한 누나의 몸 관리를 위한 트레이너 한 명 그리고 생활의 불편함을 도와주시는 분까지 말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란 말이지.’
주아 누나는 그래도 친어머니인 정화씨가 곁에서 관리를 해줬기에 믿고 맡길 수가 있었다.
정화씨를 믿어서도 그렇지만, 주아 누나는 엄마인 정화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복순 누나는 성향이 다르다.
자기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냐며 뭐든 혼자서 뚝딱뚝딱 해내려는 성향이 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돈 주고 고용했다고 해도 믿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복순 누나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그걸 알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밤은 복순 누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언니, 그 부분은 욕심이야. 역지사지로 언니 임신했을 때를 생각해야지."
"내, 내가 임신을...?"
"어머, 그럼 안 하려고 했어?"
"해야지! 할 거야! 해솔이 아기 가질래!"
다행히 질투심을 보이는 민영 누나를 주아 누나가 능숙하게 달래주었다.
주아 누나에게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민영 누나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숙소 생활만 아니어도 시간이 좀 날 텐데.’
새삼 아쉬워지는 건 숙소 생활이다.
지금도 복순 누나에게 가기 위해 도플갱어 인형을 사용한다.
만약 그런 장애물이 없었다면 복순 누나에게 가기 전 다른 곳에도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이 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는 일일 거다.
현재 우리는 소속사가 가장 경계하는 '사고 치기 딱 좋은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산으로 돈도 두둑해졌겠다, 개인 활동으로 다른 짓 하기에 딱 좋은 시기거든.'
왜 아이돌 멤버들을 숙소 생활하도록 하는가.
그건 소속사 입장에서 그렇게 관리하는 게 압도적으로 편하기 때문이다.
돈을 쏟아부어서 기껏 스타로 키워 놨는데, 머리 좀 컸다고 각종 사고를 쳐대는 연예인이 얼마나 많았나?
그걸 알기에 소속사가 숙소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해는 이해인 거고, 내가 불편한데 어쩌겠어. 정규 활동을 할 때는 잠깐 숙소 생활하고, 개인 활동을 할 땐 개인 생활하는 쪽으로 제안해볼까?’
아마 당장 들어주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꾸준히 강력히 요청하면 이번 유닛 활동처럼 들어줄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제 3년차를 넘어 4년차로 아이돌이다.
적어도 5년차가 될 때 쯤에는 바라는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약을 쳐놓을 필요가 있었다.
일단 오늘 친 사고부터 해결하고 말이다.
? ? ?
‘숭한 거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선배님.’
‘아, 아,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미안하죠. 그리고 진짜진짜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말 안 할게요.’
‘걱정 안 해요. 선배님 믿으니까요. 다만 놀라셨을 것 같아서요. 괜찮으신가 걱정됐어요.’
‘제 걱정을…요?’
‘보세요. 지금도 또 반말 안 하고 존댓말 하시잖아요. 더군다나 저랑 눈 마주치시고 많이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해지셨었어요.’
‘겨, 경황이 없다보니…. 안 그럴게!’
백강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새삼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그만 떠올리고 싶은데, 되지가 않는다.
그녀는 베개에 묻고 한참 동안 이불을 차며 발버둥치다가 힘이 빠지면 한숨을 푹푹 쉬면서 잠에 들지 못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퍽!
백강이가 돌연 침대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멍청이. 거기서 그 말을 왜 해? 바보바보바보바보! 에휴~”
한 마리의 오징어가 되어 격렬하게 꿈틀대던 백강이가 다시 축 늘어진다.
격렬하게 힘을 빼다 보니 붕~ 떠서 날뛰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것이다.
마음이 붕 뜨기 시작한 건 꿈에서도 감히 넘볼 수 없었던 멋진 남자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을 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을 갖고 놀려고 그러는 건가 의심을 했고, 뜻밖의 호의를 받았을 땐 오랜만에 주책없이 설렜으며, 뜬금없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때서야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계속 좋은 일만 생기다 보니 어느새 되도 않는 기대까지 하게 되더라.
“하우…미친 년…넌 미친 년이야…그게 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일찍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그런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더 쪽팔린 일을 저지르고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츄웁, 쭙! 쪼옥, 쪽!
“핫!?”
백강이가 베개에서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렇게 야한 모습으로 혀를 섞는 걸 처음 봤다.
TV, 영화에서나 봤던 키스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 것을 말이다.
남이 하는 모습이었지만, 첫 키스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그녀에겐 너무 큰 자극이었다.
당시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고 질척한 소리까지 환청처럼 들려올 정도로 말이다.
욱신! 욱신!
처녀의 아랫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대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마침 배란기인 그녀는 주책맞은 몸의 변화에 짜증이 나 다시 한 번 이불을 발로 찼다.
“바보같이!! 되겠냐고!!”
학창시절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남자.
그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자신.
서투르고 섣불렀던 고백과 거절, 그리고 친구들의 놀림까지.
뻔하다면 뻔한 사건이었고 백강이에겐 평생을 걸쳐도 잊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적어도 같은 실수는 하지 말자고 다짐, 또 다짐했던 자신인데 이번에 뜻밖의 행운이 연달아 찾아오면서 과거의 교훈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찌르르
백강이는 한참동안 침대 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진해솔에 대한 미련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다.
애초에 그녀는 자기 주제를 잘 아는 편이었다.
아마 평소라면 진해솔이 아무리 잘해줬어도 허튼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다.
미련없이 깨끗하게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하나다.
‘섹스는 키스보다 더 야하겠지?’
달아오른 몸을 달랠 수가 없어서 괴로움에 몸부림 친 것이다.
결국 백강이는 야릇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서른이 될 때까지 처녀를 떼지 못할 그녀에게 혀가 오가는 야릇한 키스 장면은 너무 큰 자극이었다.
다음 날.
“드라마에서 엄청난 포스로 악역을 소화하셨어요. 요즘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백강이는 급하게 잡힌 인터뷰를 성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어…인기랄 것까진 없지만,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긴 해요.”
“놀라운 경험이요?”
“네, 편의점에 가고 있었는데 어떤 분께서 절 알아보시더라고요. 드라마에 나왔던 그분 아니냐고요. 그때 정말 많이 놀랐어요.”
“어떤 의미의 놀람이었나요?”
“제가 연기한 캐릭터로 저를 알아봐주신 게 처음이었어요. 놀라웠고, 감독적이었고, 무섭기도 했죠. 하루아침 사이에 세상이 바뀐 기분이었어요. 사람들이 제 연기를 칭찬해주고 저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했어요.”
“정말 기쁘셨겠어요.”
“당일에는 기쁘기보단 무서웠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죠.”
인터뷰하는 내내 백강이는 솔직한 심정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마무리 될 무렵, 인터뷰어가 백강이가 특별히 요청했던 질문을 물어봐주었다.
“촬영장에서 특히 고마우신 분이 있다고 하던데요.”
“네!”
“어떤 분인가요?”
“제가 참여하고 있는 아가씨들의 남자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해주시고 있는 진해솔씨에요.”
“아~ 진해솔씨요?”
인터뷰어는 고마움의 대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진해솔이라는 말에 화색을 띄웠다.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처음 만났는데도 정말 따듯하게 대해주셨어요. 아무래도 내용상 액션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는데, 혹시 다치진 않았을지 걱정해주시더라고요.”
“세상에~ 해솔씨가요?”
“사실 제가 연기에 대한 회의감을 갖고 있었어요. 이제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어쩌면 이번 작품을 끝으로 연기를 포기하게 됐을 수도 있었죠. 그런데 해솔씨가 그런 저한테 용기를 줬어요. 물론 그분은 제 구체적인 사정을 모르고 평범하게 친절을 베푼 것뿐이지만요.”
본의 아니게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상황이 됐지만, 백강이는 해솔에 대한 원망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순수하게 자신을 도와주고, 다정하게 대해준 해솔에 대한 고마움이 굉장히 컸다.
본의 아니게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됐음에도 자신을 믿어주기까지 한 그가 아닌가?
그가 상담을 해주면서 당황스러운 인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쳐나가야 할지 알게 됐다.
특히 소속사와 관련 된 부분에서 도움을 받은 게 가장 컸다.
‘덕분에 좋은 소속사랑 계약을 맺었으니까.’
때문에 백강이는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 세 사람의 관계를 자신이 폭로할까 걱정하고 있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기까지 했다.
증명을 해낸다면 그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친하게 지내는 건 괜찮잖아.’
어림도 없을 희망은 이미 접어뒀다.
처음 다가 온 건 진해솔이었지만, 이젠 백강이가 더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백강이는 은혜 갚은 까치가 되기 위해 한참을 궁리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해솔에 대한 미담을 인터뷰에 밝혀서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리는 것.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인터뷰가 ‘진해솔 미담’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