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화 〉 #52. 또? (3)
* * *
연주 누님은 내 고집을 굳이 꺾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게 내 고집을 들어주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는 낳을 거다. 하지만 이번 일로 너한테 무거운 책임을 줄 생각은 없다. 공식적으로 이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로 키울 거다.”
“제가 아빠인데요. 설마 헤어지자는 소리 하려는 건 아니죠?”
“네가 바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저 설마 먹버 당하는 거에요? 싫은데요. 저는 연주 누님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볼 거고, 어떻게 자라는지도 다 볼 겁니다.”
“아이가 부담되지 않는 거니?”
내가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누님과의 관계는 최대한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는 게 맞으니까.
“부담을 느껴야 하나요? 제가 뭐가 부족해서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관계가 스캔들로 터져도 상관없어요.”
물론 상관이야 아주 많긴 할 거다.
나는 이미 아빠이고, 곧 둘째도 생길 예정이니까.
아니, 이제 셋째까지 갖게 된 아빠인가?
“막말로 연예계에서 퇴출당한다 해도 아쉽지 않거든요.”
“그건 내가 곤란한데.”
“앗.”
“그런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는 거야?”
연주 누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팍 찌푸린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주물 안마해주며 살갑게 목소리를 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저도 우리 멤버들 전부 소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만 그보다 더 연주 누님을 사랑하고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이제 가족이 된 거잖아요.”
이 세계 남자들도 아이가 생기면 최대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한 때 결혼하고 싶은 여자들이 구멍 뚫린 콘돔을 몰래 쓰거나 쓰레기통에 버린 콘돔에 든 정액을 훔친다던지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단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진행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아이를 임신했다는 연주 누님과 일 때문에 헤어지는 건 동의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일을 그만두는 게 낫다.
“가족?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그럼 아니라고 하실 셈이에요?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다면서요.”
내가 서슴없이 다가가 누님의 배에 손을 올리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발칙하기는. 아니,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제가 발칙하지 않았으면 연주 누님을 잡을 수 있었겠어요?”
“아니.”
“거봐요. 그나저나 이쪽에 앉아 봐요.”
탁탁!
내 무릎을 두드리며 연주 누님에게 말했다.
누님은 잠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순순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얹으니 향긋한 체향이 코로 흘러 들어왔다.
“많이 놀랐겠어요.”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는데, 이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잠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누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었다.
그녀는 연애를 시작하기 전 ‘너보다 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서운해 한다 해도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예고 없이 찾아 온 임신이 과연 좋기만 했을까?
“그래도 싫은 건 아니죠?”
“…싫지 않아. 놀랍게도.”
“정말요?”
싫지 않다는 연주 누님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가 임신을 기꺼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니 절로 마음이 웅장해졌다.
“아직 못한 말이 더 있다.”
“뭔데요?”
“집에서도 임신 사실을 알아서 말이다.”
“아! 인사드리러 갈까요? 언제든 가능해요.”
장모님께 인사드리는 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임신은 일 잘 하고 있는 딸의 커리어를 망치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장모님을 찾아뵙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게 맞았다.
“비슷하지만 달라.”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겁을 줘요?”
“최대한 너와 관계 되지 않게 노력하겠지만, 그 사람이 워낙 자기 멋대로 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미리 말해주는 게 낫다고 본 거고.”
그 사람?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녀도 고백할 일이 있지만, 나도 꽤나 놀라운 걸 고백해야 하는 입장이다.
뭐가 됐든 내가 고백하는 것보다는 덜 놀라울 일이기에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내가 괜찮다고 달래니 그제야 내키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어머니가 하시는 일이 평범하지 않다. 나는 가업을 잇고 싶지 않아 권리를 포기하고 독립했고 어머니의 뒤는 동생이 잇기로 했지.”
“그런데요?”
“문제는 내 동생이 엄청난 망나니라는 거다.”
설마 연주 누님도 재벌 가문 딸이었던 건가?
그런 거라면 정말 아무 문제도 없다.
연주 누님의 자신의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미 엇나갈 대로 엇나간 녀석을 데려다가 정신머리를 고쳐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셨고, 그러던 중 독립했던 내가 임신을 하게 된 거지.”
누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연스레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됐다.
“장모님이 우리 아이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맞아.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좀 더 쉬운 너한테 접근해서 아이에 대한 권리를 얻으려고 하실 거다. 어머니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시다.”
“수단과 방법이요?”
“처음에는 좋게 접근하겠지. 그러다가 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협박을 할 거다.”
협박을 한다고?
“그 사람은 누군가를 협박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그 협박을 실천할 능력도 돼.”
“…….”
그리고 마침내 연주 누님이 밝힌 가업.
무려 뒷 세계를 주름 잡는 폭력단체 그러니까 연주 누님의 어머니이자 곧 내 장모님이 될 사람은 ‘조폭 두목’이었던 것이다.
‘내 인생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 이젠 조폭까지 나오는 거야?’
아이돌에 재벌에 조폭까지.
일부러 이런 여자를 만나려고 한 게 아닌데 여러 장르의 여자들이 모이고 있다.
‘…조폭이라. 내 인생에 액션은 드라마 촬영이 끝이어야 하는데.’
재벌을 메이드로 부리고 있는데 조폭 마누라 정도는 특별할 게 없지 않냐고 속으로 놀란 가슴을 다독여본다.
그래도 완전히 동요를 감출 수는 없었는지 연주 누님이 한숨을 쉬었다.
“최대한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다. 그래도 미리 경고는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어. 알지 못하면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음, 알겠어요. 근데 그 일로 누님한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나요?”
조폭 두목인 어머니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딸이라 해도 쉽게 봐주는 일은 없다는 것 아닌가?
만약 누님이 나를 지키겠다고 무리했다가 큰일이라도 당한다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럴 수도 있겠지. 뭐든 상상 이상의 짓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미리 대비해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 거야. 그리고 자신도 있어. 난 더 이상 어린 10대 소녀가 아니잖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면 돼. 그 사람이 잘해준다고 해서 그대로 믿어선 안 돼. 절대 그 사람한테 아이를 온전히 맡기지 마. 협박을 당한다 해도 견뎌줬으면 좋겠어. 네가 어디에 있든 구하러 갈 테니까.”
마치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구하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건가 싶다가도 내 여자라는 게 흐뭇해진다.
그녀를 다시 한 번 꽈악 끌어안았다.
“많이 무섭나?”
내가 누님을 꽉 안은 게 무서움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내 등을 토닥인다.
“아뇨. 사실 무섭지도 않고 걱정도 안 돼요.”
“…조폭 출신이라고 했는데도?”
“실감이 안 나는 점도 있고, 조폭이 와도 딱히 무서울 것 같지 않아서요. 누님이 지켜주신다면서요.”
“…그래.”
연주 누님이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드시 지켜주마. 너도, 우리 아이도.”
“아, 그리고 저도 고백할 게 있어요.”
그 고백은 연주 누님이 조폭 집안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비밀이었다.
시기를 보고 천천히 말하려고 했는데, 기왕 이런 자리가 마련 됐으니 오늘 밝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누님의 성품으로 보아 조폭 집안이었다는 비밀 이외에 다른 비밀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캥기는 게 많은 나에게 가장 알맞은 순간은 지금이었다.
? ? ?
정화씨와 주아 누나가 나에게 신신당부한 말이 있다.
자신 모르게 여자를 늘려도 괜찮다, 오히려 나에게 들키지 않아주는 게 더 심적으로 편하다.
‘하지만, 임신 문제는 달라. 그땐 꼭 나한테 말해줘야 해. 이건 네 조강지처로서 요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나는 누나의 부탁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주아 누나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정화씨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은 후였기 때문이다.
직접 결혼 생활을 해온 정화씨의 조언인지라 모두들 귀담아 듣는 편이었고, 그 덕분인지 여자들끼리 큰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일 없이 무난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 정화씨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주아 누나의 영역이니 존중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강지처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가족 관계가 전부 흐트러진다고 했어.’
나는 화목한 가정을 갖고 싶은 것이지, 서로 미워하고 견제하고 각종 암투가 벌어지는 가정을 갖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 일을 방지 하기 위해서는 내가 잘 해야 한다고 했기에 정화씨의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좀…. 로즈 언니 출산도 아직 안 했거든?”
“죄송합니다!”
무릎부터 꿇고 상황 설명을 시작했고, 모든 사실을 말했을 땐 고개를 바닥에 박듯이 숙였다.
숙인 고개 사이로 주아 누나가 두 손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하, 화 안 났으니까 쫄지 마. 고개 들어. 화내는 거 아니야. 그냥 당황해서 그런 거야.”
“그렇다기엔 얼굴이 너무 무서우신데요?”
“화 안 났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는 뜻은 아니거든? 나대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넵.”
주아 누나의 옆에 앉아 있던 정화씨가 누나의 손을 잡았다.
“엄마가 뭐라고 했지?”
“…이런 걸로 화내면 안 된다.”
“그래, 새 가족이 생기는 일이야. 축하는 못해줘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해. 네가 여기서 화내면 해솔이는 주눅 들어서 나중에 같은 일이 생기면 숨기려고 할 수 있어. 그럼 어떻게 될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으드득 그건 절대 안 되지.”
주아 누나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데려와.”
한참 씩씩대던 주아 누나가 말했다.
“어…근데 알아야 할 게 있어.”
“뭘 더 알아야 돼? 네가 회사 이사님이랑 짝짜꿍해서 임신을 했다는데 그거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어?”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지 말투가 뾰족해지는 주아 누나였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킨 뒤 말했다.
“연주 누님 집안이 좀 특별한 일을 하는 분이시래.”
“특별한 일?”
“응, 근데 가업을 잇고 싶지 않아서 독립을 하셨대.”
“뭐 재벌 가문이라도 돼?”
주아 누나의 말이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혹시 흑곰파라고 알아?”
“흑곰파? 그건 또 뭐야.”
“그쪽 업계에선 굉장히 유명한 폭력단체래. 조폭말이야. 거기 보스가 연주 누님 어머님이시라네.”
딱딱하게 굳은 주아 누나와 정화씨의 표정을 본 나는 집안이 조폭일 뿐이지, 누님이 조폭인 건 아니라고 황급히 이어서 설명했다.
연주 누님은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 살아왔고, 그건 주아 누나도 업계 소문을 들어 알지 않냐고 하니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너 큰일 나는 거 아니야? 거기서 뭐래? 너 납치해서 가둬두겠다거나 그런 말 안 해? 경호원부터 고용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머어머!”
다만 그 이후로 화제가 내 안위에 관련 된 것으로 넘어가버렸다.
주아 누나는 그 짧은 사이에 드라마 시나리오 한 편을 썼는지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정화씨도 그런 주아 누나의 시나리오에 흠뻑 빠져서 찰진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누님이 지켜주신다고 해서 아직은 괜찮아. 아직 못 만나봐서 얘기를 나눠봐야 하고.”
“너는 좀! 위험하게 하필이면 그런 여자를!”
“미안미안.”
“거기다가 회사 이사님이라며. 들키면 진짜 큰일 나는 거잖아. 네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나쁜 오해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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