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49화 (349/849)

〈 349화 〉 #53. 도움 요청 (2)

* * *

“이번 앨범 느낌 좋다. 이게 수록곡이야? 타이틀 수준인데.”

“제키가 힘을 많이 썼어. 요즘 미쳤다니까?”

작곡의 신이라도 강신해서 제키에게 씌인 것인지, 요즘 제키가 뽑아내는 곡이 장난 아니었다.

개인 활동이 끝나긴 했어도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스케줄이 있었기에 모두가 앨범에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는데, 멤버들이 새로 곡이 나왔다는 말에 들으러 올 때마다 곡의 퀄리티가 날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이게 엑몬 작곡가가 다 가르쳐준 거야?”

“가르침을 받았다기보다는 교류하면서 서로 실력이 늘은 거지.”

제키의 말에 남은규가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게 아니지! 분명 연애해서 그런 거라니까? 원래 작곡을 잘 하려면 자극이 있어야 한댔어! 자극 중에 제일 화끈한 자극이 뭐겠냐? 사랑이잖아!”

“오오오오~!”

기우연이 남은규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화제를 받았다.

“정말 사귀는 거 아니에여?”

“또 그 얘기야? 아니라고 했잖아.”

“에이~ 우리한테 숨길 게 뭐가 있냐? 형제잖아. 형제!”

“진짜 없었어. 그만 물어봐.”

제키의 부정이 제법 단호하다.

저게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왜 그랬어? 로잘린이 너한테 아예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던데. 같이 있었던 시간도 많았잖아.”

“…같이 작업하려고 있었던 거지, 여자 만나려고 간 게 아니잖아. 난 내 본분을 지켰을 뿐이야.”

고자 새끼도 아니고, 거기서 본분을 지켰다고 말 한다고?

‘전형적인 주인공 성격이네. 고자 주인공.’

여자가 호감을 대놓고 표현해도 죽어도 모르는 눈치 빵점인 주인공들 있지 않은가?

순간 제키가 그런 스타일인가 의심이 됐다.

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그건 아니란 결론이 났다.

‘멜리사가 마음에 든다면서 대놓고 들이대던 녀석이잖아.’

물론 그 고백은 거하게 차였지만,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그 이후 몇 달 못 잊고 마음고생 하는 듯 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멜리사가 나와 얽혀서 고생하는 사이 제키도 마음을 접은 것으로 안다.

‘설마 멜리사를 아직도 못 잊었나?’

그렇다기엔 그날 다 함께 모였을 때, 로잘린에게 보여주던 제키의 태도가 마음에 남았다.

‘호감 있는 눈치였어.’

본의 아니지만 멜리사를 내가 거두게 되면서 제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나다.

그가 로잘린과 잘 됐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속으로 열심히 응원까지 했더랬다.

‘그 오랜 시간동안 둘이서 작업을 했다면서 성과가 하나도 없다니….’

정말 마음이 없는데 내가 잘못 봤던 걸까?

내가 의심하는 시선을 계속 보내서 인지 몰라도 제키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관심 있어도 내가 관심이 없었어. 작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고. 그리고 작업할 때 매번 걔 동생이 옆에 있었어.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잘해보긴 뭘 잘해봐. 어림도 없지.”

“!!”

이제 알겠다.

제키가 앞 부분에 말했던 ‘관심 없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제키가 로잘린과 진도를 나가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다.

“와~ 걔가 계속 둘이 작업하는데 끼어있었어?”

로잘린과 함께 만났을 때, 자기 누나한테 집착이 좀 있다 싶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걔도 작곡 지망생이니까 들락날락 하더라고.”

듣는 귀가 좋아서 작업하는데 마냥 방해 되는 것도 아니었단다.

그렇게 말을 하는 제키의 목소리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역시 마음에 있었던 거잖아. 동생이 방해했어도 그냥 밀고 나가지….’

동생이 방해해봤자 뭐 얼마나 방해 되겠나.

‘아니면 이것도 핑계고, 이미 고백해서 차이기라도 한 거라면?’

소속사에서 불러도 계속 여기서 작업하고 싶다는 말을 하던 제키가 돌연 국내로 들어 온 게 다 설명이 된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어쩐지 내 직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동생 핑계가 그럴 듯 하면서도 말이 안 되잖아.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저러고 다니는 거야. 불쌍하게.’

그때 봤던 로잘린이라면 동생이 방해한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남자와 진도를 안 뺄 리가 없었다.

결국 제키는 이번에도 차이고 온 게 틀림없다.

‘뭐 어떻게 행동했길래….’

제키는 여자에게 어필할 것들이 매우 많았다.

작곡가로서 많은 돈을 얻고 있고, 아이돌로서 활동하면서 명성까지 갖췄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이돌 할 만큼 얼굴도 잘 생긴 놈이었다.

지금도 그의 여자 친구가 되고 싶다는 사람이 줄이 서 있을 터다.

‘쟤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건가?’

왜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마다 정작 본인을 관심없어 하는 여자란 말인가?

‘확실히 말이 되는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착한 여자는 매력 없어 하고, 관심 없어 하는 여자에겐 매력을 느끼는 것.

‘시발, 남자새끼 취향 알게 뭐야.’

나는 잠시 현타가 와서 생각을 멈췄다.

마른 세수를 하며 멘탈을 회복하는 시간을 번 나는 제키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좋은 여자 만날 거야.”

“…고마워.”

네가 좋은 여자를 만나도 좋아할진 모르겠다만,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니 그들 중 잘 골라보길 바란다.

“아무튼 로잘린이랑은 친구로 남기로 했으니까 더 이상 엮지 말아줘.”

“으음, 알았어.”

“장난쳐서 미안해, 형!”

로잘린 얘기가 나오면 제키의 기분이 다운 된다는 걸 확인한 멤버들이 다 함께 합의해서 앞으로 로잘린 얘기를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아무래도 쟤는 100% 마음 있었던 듯.’

경태 형이 눈짓으로 말을 했고, 우리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차인 게 분명해.’

‘쉿쉿! 얘기 꺼내지 말자. 뭐 좋은 일이라고.’

제키는 시무룩해진 기분을 작곡으로 풀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집중한 제키를 작업실에 홀로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너희는 스케줄 있지?”

“넵!”

“형은 스케줄 없어?”

“응. 난 쉰다! 으하하!”

“CF 찍느라 숙소에 잘 들어오지도 못하더니.”

“소속사에서 다음 앨범 준비하라고 슬슬 스케줄 정리해주고 있어. 그동안 드라마 빨로 CF를 많이 찍기도 했고. 다음 CF는 너희들이랑 같이 찍을 생각이야.”

“오오~ 그거 좋지.”

드라마 빨로 CF를 잔뜩 찍어서 돈을 한탕 뽑아낸 상태.

아마 이번 정산은 한층 더 주머니가 두득해질 것이다.

간혹 어떤 배우는 작품을 안 하고 CF만 주구장창 찍곤 하던데, CF만 찍어도 먹고 살만 하니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돌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배우들의 CF 세계.

‘정말 어마무시한 곳이야.’

멤버들이 스케줄을 하러 가는 길을 배웅하고, 다시 제키의 작곡실로 되돌아왔다.

소속사에서 앨범 준비 하라고 만들어준 시간이어서 다른 데를 갈 순 없었다.

하지만 제키 혼자서 해도 타이틀 곡 수준의 곡이 나오고 있는지라 내가 끼어들기 뭐했다.

‘여기서 손 조금 보탠 걸로 작곡에 내 이름이 올라 갈 텐데, 그건 민폐지.’

다 된 밥에 숟가락 얹기도 아니고.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꿰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다가 몰래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제키가 내 도움이 필요했다면 몰라도 혼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기에 자리를 피해주는 게 더 나았던 것이다.

회사를 아예 나갈 순 없었기에 내가 향할 곳은 한 군데였다.

“그래서 당당하게 땡땡이를 쳤다는 거구나. 내가 이 회사 이사라는 건 알고 있겠지?”

“에이~ 왜 그래요. 살벌하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요?”

“너만 좋은 거 아니고?”

“누님도 호강하고 계시잖아요. 미남이 일하는 도중에 짠하고 나타나서 어깨를 주물러 주는 일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여기서 내가 어깨를 주무른다고 연주 누님의 몸이 건강해지는 일은 없다.

오히려 내가 준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게 훨씬 낫겠지.

하지만 한 번 집중하면 몸이 축 나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는 연주 누님에겐 가끔 방문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내가 오는 시간에는 적어도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능글맞기는…. 오래 있으면 안 되는 건 알고 있겠지?”

“저 안경 쓰고 왔어요. 여기 있는 줄 아무도 모를 걸요? 사람 오면 저기에 숨으면 되고요.”

연주 누님의 방에는 작은 다용도실이 있다.

보통 누님은 그곳에서 직접 차나 커피를 타는데, 여기에 숨으면 누님을 보러 들어 온 직원에게 절대 들킬 위험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누군가가 전화로 나를 찾기 전까지 연주 누님의 사무실 안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왜 이렇게 잘하지?”

더불어 연주 누님이 시키는 간단한 사무를 도왔는데, 누님에게 잘 한다며 칭찬을 받았다.

이래봬도 전생에서 회사원이었는데, 짬밥이 어디 가겠는가?

척하면 척인 것이다.

“쉬운 것만 시켜주셔서 그래요.”

“너무 잘해서 아쉬운 걸. 널 내 후계자로 키웠어도 잘 했을 것 같아.”

사실 내 몸뚱아리는 뭐를 해도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내가 사무일을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뛰어나진 신체, 정신 능력이 더해지니 연주 누님이 바라오던 인재가 된 것이다.

“너무 칭찬해주시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빈말로 하는 게 아니야. 정말 잘했어. 엑셀은 언제 배운 거니?”

“잠깐 기회가 돼서 배웠어요. 대단한 건 못해요.”

머리가 잘 돌아가고, 기억력이 좋다 보니 예전에 배웠던 게 금방 떠올랐다.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뭐 좋은 기억이라고….

그래도 이렇게 써먹을 곳이 생겼으니 마냥 쓸모없다 매도하진 않기로 했다.

누님을 도와주며 꽁냥꽁냥 대길 1시간쯤 흘렀을 때.

드디어 핸드폰이 울리고, 나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앗,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가볼게요, 누님.”

“조심히 가렴.”

“네네~ 오늘 야근이에요, 정시 퇴근이에요?”

“…오래 야근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

“저랑 약속한 거에요?”

“그래.”

연주 누님 방에 나선 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은 제키였다.

­형, 어디야? 밥 먹게 빨리 와. 애들 다 왔어.

“어~ 갈게!”

멤버들이 다 모였다는 말에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 ? ?

“하아….”

쌔앵­ 쌔앵­ 쌔앵­

빠아아앙­!

무심히 달리는 차들 사이로, 한 소녀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방을 앞에 매고 한 없이 한숨만 뱉고 있던 소녀의 얼굴에는 우울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무작정 오긴 했는데, 이제 어떡하지?”

우울해 하는 소녀의 이름은 칸나.

집안, 정확히 말하면 언니로부터 결혼 압박감을 받아 무작정 돈만 싸들고 해외로 도망쳐 온 상태였다.

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들어오느라 돈을 많이 썼다.

앞으로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해쳐 나가야 하는데 돈을 아껴 쓸 필요가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그 할아버지랑 결혼해야 되잖아!’

아무리 남자에 굶주린 세상이라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꼴에 재벌가문 출신이라고 어찌나 거만하던지.

더 싫었던 건 그의 얼굴이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도 얼굴은 30대를 바라볼 정도로 젊었는데, 타고 난 성향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돈을 퍼부어서 각종 수술과 시술들로 만들어진 얼굴이라는 게 티가 났다.

‘괴물이잖아. 괴물!’

정도껏이라는 게 있는 거다.

누가 봐도 그 남자는 성형 중독이었다.

애석한 것은 남자의 최악은 얼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여자.

바로 그의 첩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남자는 이미 자신과 결혼하는 게 기정사실인 것 마냥 행동했다.

그뿐인가?

자신과 처음 만나는 장소에 첩을 데려오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녀가 정실로 들어오는 거라지만, 첩들이 오랜 시간 자신과 살아왔으니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줬으면 한다는 황당한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첩은 비어있던 정실을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가 들어온다고 하니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줘도 안 가져! 샹년아!’

자기 앞에서 천박한 가슴을 드러내며 남자를 유혹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배알이 뒤틀려서 살 수가 없더라.

애초에 처음 만나는 장소에 다른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부터 그 남자와는 절대 얽혀선 안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잘 한 거야.”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도망쳤다.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겠지. 잡히면 언니 화풀이로 죽기 직전까지 맞고 얼굴도 모르는 놈팡이랑 결혼해야 할 테니까.’

이번 일의 뒷감당은 언니라 해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최악으로는 언니가 자신이 했어야 할 결혼을 대신 하게 될 수도 있다.

신부가 도망을 쳤으니 그쪽에서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상한 자존심의 대가를 어떻게든 받아내려 할 것이다.

까드득­

‘아니면 정말 날 죽여버릴 지도 몰라.’

일이 잘 수습 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절대 돌아가면 안 되는 거다.

‘그치만 날 먼저 똥통에 밀어 넣은 건 언니잖아.나는 잘못한 거 없어! 그러기에 누가 그런 병신 같은 놈이랑 결혼을 시키려고 하래?’

아무리 사업이 중요해도 그렇지!!

칸나는 더 이상 언니를 가족이라 여기지 않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아마 수완이 좋은 언니라면 불쾌해 할 상대를 잘 달래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소 큰 손해를 보긴 하겠지만 말이다.

'살짝 쌤통일지도.'

언니에 대한 증오를 피워 올리던 칸나는 분노를 삼켜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언니를 피해 도착한 낯선 이국의 땅.

한 번 와본 적 있으나 여전히 칸나에겐 너무 멀고 낯선 나라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칸나는 다시 한 번 '내 님'을 만날 꿈을 꾸고 있었다.

그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갖고서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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