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 #53. 도움 요청 (3)
* * *
칸나가 진해솔과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은 ‘비앙카’였다.
그녀가 진해솔을 보호 하고 있는 이상, 칸나는 결코 진해솔과 만날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나에게는 비앙카에게 연락을 할 수단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만나서 뭘 대가로 지불 받아야 진해솔과 만남을 허락해주겠냐는 거다.
‘내가 가진 게 뭐가 있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돈이다.
그녀가 남들보다 우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단연코 가진 부가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를 설득하기엔 돈이라는 대가는 유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이잖아.’
칸나가 비앙카보다 못한 걸 적어보라고 하면 A4용지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칸나가 비앙카보다 나은 것이 있는지 적으라고 하면 A4용지에는 빈공간이 가득할 것이다.
몇 줄 적다 보면 적을 게 떨어질 테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나?’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던 건 잘못 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해볼 생각보단 갖고 있는 것을 누릴 생각만 하던 칸나다.
‘중요한 건 끝까지 움켜쥐고 있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진짜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 언니와 협상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아니라.
섣부르게 포기했던 것들이 새삼 아쉽고 또 아쉬웠다.
“으으으, 어떡하지.”
칸나는 며칠 전과 동일하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호텔에서 머물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칸나의 머리로는 비앙카를 설득시킬 만한 게 없었다.
“나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같은 상황을 겪다 보니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왜 다른 자매들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언니와 반목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울분이 치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문을 버린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실감이 나고 있는 것이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누구한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그녀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앙카 그 여자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할까?’
잠깐 스치듯 떠오른 생각.
칸나는 곧장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용서를 빌었을 때, 그 여자는 용서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칸나가 어렴풋하게 엿봤던 비앙카의 악의는 다시 떠올려 봐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다.
그럼 남은 사람은 누가 있나 생각해봤다.
“뭐야, 또 처음으로 돌아왔잖아. 이럴 거면 그냥 확 해버려?”
지금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던 일이 수두룩했다.
소심한 성격 탓이다.
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고, 얼마나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도 성격을 고치질 못했다.
“아아아~ 못 하겠어!”
진해솔의 핸드폰 번호를 띄워놓고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칸나가 결국 발을 동동 굴렀다.
끝까지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던 것이다.
촬영장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던 칸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강약 약강의 성격이 뚜렷했다.
‘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아직 시간 있어.’
지금 이 시간에도 언니는 칸나를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칸나는 쉽게 용기내지 못했다.
“준비가 다 끝나면…그땐 꼭 해솔이한테 연락하자.”
비앙카, 그 여자에게 연락을 하는 건 선택지에서 빼내버렸다.
그 여자를 다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치솟아서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나마 만만한 게 진해솔이었고, 만나고 싶은 것도 진해솔이었다.
‘날 용서해준 만큼 착한 사람이잖아.’
다시 찾아가 도움을 바라는 게 얼마나 뻔뻔한 일인지 알기에 기왕 자비를 구걸해야 한다면 그에게 하고 싶었다.
“찾아가면 기분 나빠하겠지? 어떻게 만나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나.”
이미 그에 대해 조사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칸나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만남이 아니라 그의 반응이었다.
칸나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호텔에 틀어박혀 공부를 시작했다.
“가아…나아…다라….”
그에게 노력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제 겨우 가나다라마바사를 외우고 있는 상태인지라 노력의 증거를 보여주는 여정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분명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엎드려서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통역사를 구해버릴까.’
짝!
‘안 돼! 또 편하게 가려고 꼼수를!’
칸나는 금방 나약해지는 마음을 눈치 채고 스스로의 뺨을 아프게 때려버렸다.
“고작 이 정도도 못하면 어떻게 도움을 받겠어? 나약해지지 마!”
의욕을 곳추 세우기 위해 칸나는 잠시 상상에 빠졌다.
예쁘게 옷을 차려 입은 그녀의 앞에 진해솔이 나타나는 거다.
그는 칸나를 보며 깜짝 놀란다.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영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칸나와의 재회에 진해솔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그때, 칸나가 수줍은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거다.
‘안녕하세요, 해솔씨.’
‘!!’
‘보고 싶었어요.’
진해솔은 영어가 아닌 그가 쓰는 나라의 말로 인사말을 건네는 그녀를 보며 깜짝 놀란다.
‘어떻게 우리나라 말을 하는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못했잖습니까.’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배웠어요. 다시 만날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감동 받은 진해솔이 칸나와 포옹을 나눈다.
“흐! 헤헷…이히히…!”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 칸나가 해벌쭉 해진다.
기대한 대로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이 치솟았다.
“카암사하뉘다…카아암싸하암뉘이다아…싸뢍애요우~”
…그렇다고 배움의 진도가 갑자기 빨라진 건 아니지만 말이다.
? ? ?
“여보세요?”
살려주세요!
“예?”
뭔 소리야.
내가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예? 도와달라고요? 절 아세요?”
도와줄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요.
알 수 없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아 잘 떠지지 않은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야심한 시간이었다.
‘번호 저장도 안 되어 있네.’
보통 저장 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인데, 자고 있다가 전화가 와서 얼떨결에 받은 상태였다.
즉, 결론은 누군지 모를 사람으로부터의 도움 요청이라는 건데….
‘사생팬인가?’
사생팬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가장 의심이 되는 건 사생팬이었다.
다만 통화하는 사람이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목소리에도 간절함이 가득해서 매정하게 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영어로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절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저 기억 안 나세요? 칸나에요! 칸나!
칸나?
칸나…칸나….
사생팬은 아닌 건가?
들어 본 이름인 건 맞는지 낯이 익다.
하지만 기억이 희미한 걸 보면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사이는 아니라는 건데.
잠깐, 사생팬?
“아!”
사생팬이라는 단어와 외국인이라는 점, 거기에 낯익은 이름까지 더해지니 뇌가 자극을 받았는지 금방 기억을 떠올렸다.
새벽에 전화를 건 사람은 촬영장에서 날 곤란하게 만들었던 사생팬 아가씨였던 것이다.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연락을 해온 것도 황당한데, 도움 요청을 하고 있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날 용서를 받고 무사히 돌아간 사람이 아닌가?
‘비앙카가 나 몰래 건드렸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린 명령이 있는데, 비앙카가 독단적으로 움직였을 리가 없다.
정말 죄송해요. 여기에 아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여기요? 설마 또 온 겁니까?”
제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흡!
빠아아앙!!
“여보세요, 여보세요? 괜찮아요?”
통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적어도 핑계를 대고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하악! 하악!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급해 보이는 건 확실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죠?”
네, 네네! 저 좀 도와주세요!
“쫓기고 있는 겁니까?”
나와 통화를 하면서도 뛰고 있는 게 느껴진다.
편하게 전화 통화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도와달라고 했으니 도망치고 있는 건가?’
재벌이 누군가에게 쫓겨서 뛰고 있다?
쉽사리 믿기 힘든 소리다.
네에! 마, 맞아요. 쪼, 쫓기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죠? 어디 가고 있는 거에요?”
하악, 하악! 지, 지금 숨었어요. 혼자 있는데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서 너무 무서워요.
“경찰서로 가세요. 그들이 지켜줄 겁니다.”
위험을 느끼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건 경찰이다.
하지만 칸나가 내 말을 듣자마자 거부감을 보였다.
거긴 절대 안 돼요!! 가면 잡힐 거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붙잡히면 큰일 나요.
울고 있는지 숨소리가 거칠기까지 하다.
‘이걸 믿어야 돼?’
경찰서는 안 된다는 게 나를 보려고 하는 핑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이 됐다.
제발, 제발요. 도와주세요. 아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요. 부탁해요. 너무 무서워요.
격앙 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도저히 거짓말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한 번 속아주자, 시발. 아니면 비앙카한테 단단히 혼내라고 하면 되겠지.’
호구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여자가 울면서 도와달라는데 매정하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못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다.
“어디에요? 지금 있는 곳.”
이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그러니까 인도적인 차원에서 하는 배려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칸나씨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장소를 설명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겨우겨우 주변에 있는 건물 이름을 검색해서 주소를 알아내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바쁜 와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안경과 마스크 그리고 모자다.
차로 약 40분 정도 걸려서 칸나씨가 있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건물 간판은 보이는데, 정작 당사자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야 하나 고민하면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이 근처일 텐데.”
어둑한 새벽에도 거리의 불빛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불빛 사이에도 어둑한 골목이 존재했고, 그 구석에서 작은 인영이 쪼그려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찾았다.”
가뜩이나 몸집이 작은 여자가 저러고 있으니 못 찾지.
내가 눈이 좋아서 알아챈 거다.
나는 차에 있던 담요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왔다.
“뭐해요, 이 구석에서.”
“핫!!”
내 목소리를 들은 칸나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해, 해솔씨이…?”
“괜찮습니까?”
퉁퉁 부은 눈과 제대로 외투도 입지 않은 얇은 원피스 차림.
거기에 한 쪽 밖에 없는 슬리퍼가 얼마나 다급하게 쫓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줬다.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덜덜 떨고 있던 그녀의 몸이 온기를 환영한다.
“고, 고마워요.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지만, 꽤 심각해 보이는데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는데요.”
“아, 안 돼요. 겨, 경찰이 얽히면 절대 안 돼요.”
담요를 덮었음에도 칸나의 목소리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일단 추위에 떠는 사람을 따듯한 차에 태우기로 했다.
“일단 차에 타죠.”
“가, 가, 감사합니다.”
쩔뚝거리면서 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쓰여서 안 되겠다.
“잠시 실례할 게요.”
“꺅!”
칸나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작은 체구라서 가벼울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녀를 차에 태우고 히터를 세게 틀었다.
“하으으….”
“다리는 다친 것 같은데한 번 봐요.”
"앗! 괘, 괜찮아요."
"피나잖아요."
유혈이 낭자하는 사건이 될 줄은 몰라서 챙겨 온 게 없었다.
“이 정도면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맨 발바닥으로 거리를 뛰어다녔으니 당연히 이곳저곳에 상흔이 있었다.
칸나는 새까만 발바닥을 보여주게 되어 부끄러운지 자꾸 괜찮다며 발을 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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