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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51화 (351/849)

〈 351화 〉 #53. 도움 요청 (4)

* * *

“병원도 가면 안 되는 겁니까?”

“가면 신분을 알려야 하잖아요. 절대 안 돼요. 무조건 들킬 거에요.”

병원에 보내고 경찰서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닌가 보다.

커다란 담요를 몸에 두르고 덜덜 떨고 있는 칸나씨의 모습은 가련한 사슴과 같았다.

육식동물을 만나 잡아먹힐 뻔했다가 겨우 탈출한 초식동물 말이다.

많이 놀란 것으로 보이는 그녀를 다독이길 한참.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겠어요?”

놀란 그녀의 입장은 알겠다만, 난데없이 이곳에 불려 와야 했던 나도 이제 알 건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앗!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염치없고 뻔뻔한 부탁이었는데도 도와주러 오셨잖아요. 솔직히 안 오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칸나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맺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아는 사람이 없어 당황스러웠는데, 내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들어 눈물이 자꾸 나왔단다.

“여긴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일단 도와주기로 했으니 할 건 하자고 마음을 먹은 상태다.

어두운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던 꼬질꼬질한 칸나씨의 모습이 동정심을 유발하기도 했고 말이다.

“음, 묶고 있던 호텔로 가는 건 안 되겠죠?”

“아, 안 돼요! 거긴 이미 그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을 거에요. 지, 짐도 다 놓고 와서….”

핸드폰과 현금을 넣어 둔 작은 가방만 겨우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핸드폰을 챙기지 못했다면 나한테 연락할 수 없었을 테니 꼼짝없이 잡혔을 거라며 칸나씨가 몸을 덜덜 떨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칸나씨는 재벌 딸이다.

그녀의 가문은 뭐하고 있기에 낯선 땅에서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걸 보호해주지 않고 있단 말인가?

“가문에 연락은 해봤어요?”

“…아니요. 절 쫓는 사람이 가문 사람들이라 연락할 수 없었어요.”

“예?”

쫓는 사람이 가문 사람들이라고?

“아니, 어쩌다가요?”

나에게 쳤던 사고가 가문에서 버림 받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나?

분명 ‘용서’를 해주었으니 이후로 곤욕을 치르는 일은 없었을 거다.

‘아마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진 걸 보고 있으려니 괜히 양심이 찔려왔다.

“가출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도망을 쳤다고요?가문에서 무슨 짓을 했는데요.”

“...결혼을 강요했어요."

결혼?

결혼이 싫어서 도망쳤다고?

나는 순간 드는 실망감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그쪽 세계에서 정략결혼이 얼마나 빈번한 일인지는 그 세계 사람이 아닌 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보통 결혼은 가문에서 정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었나요? 설마 저 때문에 도망쳤다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런 거면 저도 협조해줄 수 없습니다.”

목소리에 냉기가 돌았다.

칸나씨도 그걸 눈치 챘는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또르륵 흘리며 억울함을 담아 변명했다.

“저, 저도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어요. 예전부터 가문에서 상대를 정해주면 결혼할 생각이었다고요. 근데 대상이 너무 쓰레기였어요. 무려 오십이 넘은 늙은 남자였다고요! 거기다가 자식들 나이가 저보다 많아요. 그런 사람이랑 결혼은 너무하잖아요!”

“…!!”

칸나씨에게 느꼈던 실망이 쏙 들어갈 만큼 충격적인 얘기였다.

오십이 넘은 사람이랑 결혼을 하라고 했다고?

그건 좀 선 넘지.

나라도 도망쳤을 거다.

아니면 그런 걸 강요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던가.

“아무리 큰 실수를 했다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요. 아무리 내가 싫었어도 너무했다고요.”

“…그러네요. 도망친 게 이해가 갑니다.”

“저, 정말요? 하아, 다행이다. 아무튼 그 사람, 성격도 뻔뻔하고 안하무인에 저랑 처음으로 얼굴 보는 자리에 첩을 데려왔어요.”

오우야.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그래 놓고 자기 자식들 낳은 사람이니 첩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꼴을 보고 제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어요.”

다시 눈물이 터졌는지 칸나씨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

“언니…훌쩍!...한테 사정도 해봤어요. 그런데 안 들어준 대요. 앓던 사랑니 뽑는 기분이었겠죠. 사고를 쳤으니 제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자기 이득을 챙긴 거에요.”

오십이 넘은 남자한테 자기 여동생을 붙여주는 일이니 꽤 큰 이득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보통 재벌 가문에선 남자가 그렇게 쓰인다고 알고 있는데, 그 남자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칸나씨랑 결혼하겠다는 건,취향이그쪽이라서인가?’

합법 로리 그 자체인 칸나씨의 외형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현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여자다.

그런 칸나씨를 자기 여자로 만들려고 했다는 건 그녀의 외형이 취향에 맞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웩­ 뭐가 됐든 역겹네.’

이젠 적어도 그녀가 처한 상황이 진짜임을 믿어줘야 할 것 같다.

자작극을 하기에 너무 큰 스케일이었다.

“그 남자가 꼴에 출신은 엄청 좋거든요. 가진 것도 많아요. 외동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가문 재산을 전부 쥐고 있으니까요.”

이어진 칸나씨의 설명을 차근차근 들어보았다.

‘솔직히 좀 부럽긴 하네.’

칸나씨의 언니가 왜 그 남자에게 칸나를 보내려고 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사고로 죽은 아내의 재산 대부분이 남자의 손아귀에 쥐어졌고, 가뜩이나 많은 걸 가진 남자의 정실 자리를 노리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한다.

아마 칸나씨의 언니도 남자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그 남자가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을 결혼이긴 했어요. 문제는 제가 그 남자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거에요. 거만한 돼지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그 남자 정실 자리가 탐났으면 언니가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건 언니도 싫었던 거죠.”

남자의 재산이 탐나기는 한데, 그 남자와 결혼하는 걸 싫었던 언니가 마침 가문에 손해를 만들어낸 칸나를 남자의 정실 자리에 밀어 넣었다.

마침 남자가 칸나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이보다 완벽할 순 없다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도망쳤군요.”

“네, 언니는 절 꼭 붙잡고 싶을 거에요. 그 남자는 이미 저랑 결혼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 남자 성격도 만만치 않으니 달래려면 고생 좀 할 거에요.”

고생한 만큼 그녀의 언니가 칸나에게 갖는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다.

“확실히 절대 잡히면 안 되겠네요. 그럼 적어도 상황이 수습 될 때까진 숨어 지낼 곳이 필요하다는 건데….”

“!!”

긴장을 했는지 칸나씨가 침을 삼킨다.

여기서 내가 돕지 않겠다고 한다면 칸나씨는 언니에게 붙잡혀서 크게 곤욕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도와주겠다고 하면 언니에게 붙잡혀서 끌려가진 않을 터.

‘비앙카한테 말해서 지켜 달라고 하면 아예 가문 사람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문제는 내가 칸나씨를 도와줄 이유가 있냐는 거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주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 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해도 칸나씨는 나를 원망할 수 없을 거다.

‘칸나씨한테 바랄만한 게 있을까?’

이제 솔직한 마음을 알아 볼 시간이 왔다.

‘합법 로리.’

쉽게 만나 볼 수 없는 컨셉의 여자인 것은 확실하다.

성격은 안하무인에 철이 없어 보이기는 하다만, 비앙카의 하위 호환이니 오히려 대하기 편했다.

‘여자로서의 매력?’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기에 가능충을 모은다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게 나까지 포함이 되느냐인데….

‘가능…할…지도?’

여러 여자들과 각종 변태 같은 섹스를 즐기게 되면서, 내 성적 판타지가 굉장히 넓어진 상태였다.

예전이라면 페도 새끼라고 경멸을 보낼 상황도 당사자가 내가 되다 보면 로맨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로남불이 나쁜가?’

나빠도 뭐 어쩌겠나.

내가 좋다는데.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거다.

‘저쪽에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미 나한테 빠졌는데.’

지금도 홀린 표정과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으니 대가로 본인을 달라고 하면 당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속으로 그래주길 바라고 있을 지도.’

이 여자.

내가 가질까?

칸나와 이렇고 저런 짓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포돌이 짤이 생각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합법’ 로리인 점에서 점점 내 마음이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하는 거다.

‘합법…합법인 건 중요한 문제지.’

나는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들을 상대해왔다.

칸나는 그런 점에서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록 첫 만남이 좋게 얽힌 건 아니지만, 그 부분은 ‘용서’를 했으니 지금 상황에서 고려할 바는 되지 못한다.

아직 소녀라는 느낌만 드는 칸나는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줄 남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손만 뻗는다면 기꺼이 자신을 바칠 것이다.

한참동안 말이 없는 나.

그런 나의 눈치를 보던 칸나씨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절 도와주신다면, 대가로…!”

대가로?

칸나씨가 질끈 두 눈을 감으며 외쳤다.

“저, 저를 드릴게요! 거둬만 주신다면!! 가진 게 돈밖에 없어서 쓸모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요. 뭐든 시켜 주세요! 절대 민폐 끼치지 않을 게요!!”

뭐든 열심히 한다라….

가진 게 돈밖에 없다는 여자.

예전이었다면 감지덕지 해야 할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거둬 달라는 건 역시 여자로 받아 달라는 뜻이겠죠?”

“아? 아?! 네, 네?!”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니 눈이 붕어처럼 커진 칸나씨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네! 되, 된다면 저를 받아주셨으면 조, 좋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수줍음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여자로 받아주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급발진한 것 같았기에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로 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장소 제공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계속 숨어 살 필요도 없잖습니까.”

지금이야 사람을 잔뜩 풀어서 찾아도, 몸을 숨기고 있으면 결국 포기할 때가 올 거다.

그때는 칸나씨도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거다.

굳이 나에게 자신을 바칠 필요 없는 것이다.

“언니는 끈질긴 성격이에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을 망친 저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칸나씨가 하는 말에서 언니에 대한 두려움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두려움과 동시에 얼핏 분노도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피를 나눈 자매라고 믿기 힘들어 보였다.

‘비앙카랑 멜리사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었던 건 비앙카가 이미 후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고, 멜리사는 독립해서 투자 회사를 운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멜리사가 깔끔하게 독립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도 칸나와 그녀의 언니처럼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가 됐겠지.

“일단 숨을 거처는 제공해드리죠. 다만 우리 관계를 어떻게 할지는 시간이 필요해보이네요.”

“아! 감사합니다. 그 정도도 저한테는 과분한 은혜에요.”

대충 상황파악이 끝났으니 발을 다친 칸나씨를 치료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칸나씨를 데리고 숙소에 갈 순 없으니 갈 곳은 한 군데였다.

“나와요.”

“여기가…아…!”

“맞다. 발 다쳤었죠?”

차 밖으로 나오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본 나는 황급히 칸나씨를 들어 올렸다.

“읏차!”

“힉! 무, 무거우실 텐데….”

빨개진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촬영장에서 보여줬던 모습은 온대 간대 없다.

개인적으로 지금 그녀의 모습이 더 좋았다.

억지를 쓰고, 권력을 휘두르며, 갑질을 하는 칸나씨의 모습에선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여기에 앉아있어요. 구급상자 가져올 테니까.”

멜리사와 비앙카가 없어서 그런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서늘한 냉기가 우리를 반겼다.

사람이 매일매일 머무르지 않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두 사람은 내가 집에 머무르지 않을 때 굳이 이 집에 들어와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비앙카는 항상 집을 지킬 메이드가 필요하다고 한 거고.’

하지만 나는 이 집의 서늘한 냉기조차도 사랑한다.

이 공간이 미래에는 내 가족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실히 사람이 없으니까 휑하네.’

여태까지 내가 이 집에 올 땐 항상 멜리사 혹은 비앙카가 먼저 집에 와서 준비를 해놨었다.

때문에 사람이 없는 집을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집을 확인하고 나니 이 집을 제대로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나씨를 확 메이드로 만들어버려?’

어차피 숨어 지내야 하는 사람이고, 내 옆자리를 노리는 여자이니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게 나쁜 생각 같아 보이진 않았다.

“다행이 유리가 박혀 있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독은 꼬박꼬박 해요.”

“감사합니다아….”

칸나씨가 얌전하게 대답을 한다.

목소리에 나른함이 섞여 있어서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팔팔 돌아가는 보일러가 바닥과 공기를 따듯하게 덥혀주면서 피로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꾸벅꾸벅 졸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그 위에 담요를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잘 자요.”

앞으로에 대한 대화는 내일 일어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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