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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53화 (353/849)

〈 353화 〉 #53. 도움 요청 (6)

* * *

“내 말에 틀린 게 있어 보이니?”

“…….”

칸나씨가 아무리 아는 게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얘기를 들었는데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이번 결혼을 무리해서 진행한 이유가…?”

“널 치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자기 자리가 위태로우니까 어떻게든 아군을 얻어 보려고 발버둥친 거야. 물론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너 같이 아무것도 아닌 애를 갖고 이 난리를 만든 거고.”

“!!”

칸나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고생들이 사실 언니의 이기적인 사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뜩이나 뚝뚝 억눌러왔던 원망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자기 무능의 책임을 너한테 떠넘겼잖아. 그래도 역시 무서워서 못하겠어?”

움찔!

겁을 잔뜩 먹고 꼬리 말고 도망친 흰색 쥐와 쥐가 도망치는 것도 잡지 못해서 이 난리를 만든 언니.

비앙카의 말을 들으니 둘 다 답 없는 사람들인 게 맞는 것 같다.

‘역시 저쪽 세계는 피도 눈물도 없네. 살벌하구나.’

자길 위해서 핏줄을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세계의 존재들.

그런 점에서 비앙카와 멜리사는 사이가 굉장히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일찍부터 모든 경쟁 상대를 정리하고 후계자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킨 비앙카가의 결단력 덕분일 것이다.

“대답이 없네?”

“거, 겁나는 거 아니에요.”

오기가 가득 찬 칸나씨가 비앙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비앙카이다 보니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원래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 아니겠나?

“거짓말 안 해도 돼. 네 언니보다 네가 더 무능력하고 겁쟁이인 거 알아. 능력이 없는데 덜컥 받아도 될지도 고민 될 거야.”

“으읏!”

항상 주눅 들어 있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비앙카가 치명타를 날린다.

“그런데 너 이거 안 받으면 뭐할 거야? 주인님께서 친절하셔서 돌려서 말해줬지만, 결국 네가 하겠다는 일은 메이드 같은 거야. 네가 여태까지 버러지로 생각하던 존재가 되는 거지.”

“!!!!”

칸나씨의 눈이 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크게 떠졌다.

그녀의 눈동자엔 충격이 가득 차 있었다.

? ? ?

칸나는 가문에 쫓기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상식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비서 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남들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건 언니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다.

충격을 받은 칸나에게 비앙카의 속닥이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박혀온다.

“상상만 해도 싫지? 근데 넌 가진 게 없잖아.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위치인 거야. 이제 가문에서 돈을 타 먹지도 못할 테니 가진 돈으로만 살아야 할 거고, 네 언니가 널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어디 마음 편하게 다니지도 못하잖아.”

“시, 싫어요. 그런 거!”

씀씀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갖고 있는 돈이 많다 해도 평생 그 돈만으로 살라고 하면 불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언니가 내 재산 목록을 전부 알고 있잖아. 분명 내 자금줄을 막으려고 할 거야.’

재산을 다 정리하고 오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언니라면 자신을 잡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자금줄을 막는 것을 선택할 거다.

‘애초에 나한텐 선택지가 없었네.’

정말 언니를 이기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칸나가 선뜻 하겠다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앙카 때문이었다.

도와준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뭘 보고 믿으란 말인가?

비앙카의 순수한 악의를 본 적 있는 칸나는 언니보다 비앙카가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자신을 압박해오는 비앙카 때문에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니 말이다.

‘저 여자는 절대 못 믿어! 하지만….’

칸나는 고개를 돌려 진해솔을 바라봤다.

여전히 참 멋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 사람이라면 칸나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제안을 해솔이 해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칸나가 여기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진해솔 뿐이다.

칸나가 한 눈을 팔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비앙카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턱을 손으로 잡아 쥐었다.

흠칫!

“대화에 집중해야지? 주인님한테 넋 놓고 있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니?”

“죄, 죄송해요.”

“그래, 당황스럽긴 할 거야. 생각 할 시간이 더 필요할까?”

생각 할 시간?

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서 받지 않으면 분명 저 무서운 여자는 칸나에게 준 기회를 매정하게 내다버릴 것이다.

아쉬운 건 자신이었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거슬렸던 ‘주인님’이라는 단어.

이번에는 정확히 들었다.

‘상황이 안 돼서 계속 물어보진 못했지만, 방금 해솔이를 또 주인님이라고 불렀어.’

사실 해솔이 그녀를 용서해주었을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가 용서해줬다고 해도 비앙카가 보복을 가한들 칸나로서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앙카는 깔끔하게 자신에게 손을 뗐다.

당시에는 두 사람이 정말 깊게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아파했지만….

‘이 사람들, 관계가 내가 예상한 그런 관계가 아닐지도 몰라.’

칸나는 두 사람 관계가 의심 됐다.

당연히 비앙카가 이들 관계에서 가장 ‘갑’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주인님’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고, 심지어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주인님이라니….’

평범한 사람들이 쓰지 않는 단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비앙카라는 거다.

저 무섭고도 대단한 여자한테 주인님이라고 불리다니!

‘두 사람 사이에서 우위가 해솔이한테 있다면?’

비앙카를 믿는 게 아니라 해솔을 믿으라고 한다면 칸나는 당장 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은혜를 내려준 게 몇 번인가!

칸나는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음을 직감하고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에요?”

“흐응~ 정말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아니, 뭐든 다 할 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벼랑 끝에서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붙잡은 기회잖아.”

주인님이 널 거두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기회야.

비앙카가 작은 목소리로 칸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또 주인님이라고 했어!’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런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여자한테 살아남으려면 해솔이를 꼭 내 남자로 만들어야 돼.’

뭐든 다 하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펼쳐질 앞날이 너무 무서웠다.

비앙카가 언니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걱정 됐고, 자신을 어디로 질질 끌고 갈지도 걱정 된 것이다.

“영광으로 알아. 평생 은혜 잊지 말고 감사하란 말이야.”

“네에…그럴게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그제야 비앙카가 칸나의 턱을 풀어주었다.

누군가가 목을 쥐고 압박하는 것도 아닌데 숨이 막혀서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끝난 거지?”

“후후후, 네~”

무사히 비앙카에게 풀려나 진해솔을 바라보려니 울컥 눈물이 났다.

진이 다 빠진 게 얼굴로 보였던 걸까?

진해솔이 따듯하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요?”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칸나는 고개만 저었다.

“이제 좀 쉬어요.”

끄덕끄덕­

대단한 위로를 받은 건 아니지만, 몇 마디 말로도 상처 받은 마음이 회복 되는 기분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않아요?”

진해솔, 비앙카와 함께 따라 온 여자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밝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칸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다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것질을 많이 해서 배고프진 않지만,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뭐 먹을까요? 치즈 찜닭 어떠세요?”

“칸나 씨가 매워하지 않을까?”

“안 매운 맛으로 시키고, 치즈도 추가할게요.”

“뭔지 모르겠지만, 먹을 수 있어요! 저 음식 안 가려요! 매운 것도 잘 먹어요!”

사실 은근히 가리는 음식이 있었지만, 못 먹는 음식을 말할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진수성찬이 순식간에 배달되고, 칸나는 의외로 치즈 찜닭에 홀딱 빠졌다.

“후아, 후아! 마시써요!”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다람쥐처럼 먹네.”

칸나는 배가 빵빵해져 오고서야 세 사람이 자길 구경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움….”

눈을 도르륵 도르륵 굴리다가 이내 진해솔을 바라보니 그가 멋있게 웃으며 말했다.

“귀여워서 본 거에요.”

“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오며 수시로 듣곤 했던 말이 바로 ‘귀엽다’는 칭찬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 체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귀엽다’라는 칭찬은 더 이상 그녀에게 칭찬이 되지 못했다.

분명 그랬는데….

‘왜, 왜 기분이 좋은 거지?’

해솔이 그녀에게 웃으며 귀엽다고 해주는 말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화끈거리고, 기분이 붕~ 떴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분위기가 많이 풀려서 그런 걸까?

“그, 그으….”

“꼴 사납게 별 거 아닌 걸로 부끄러워 하기는.”

“비앙카, 질투하는 거 추해.”

“너 요즘 점점 언니라고 안 부른다?”

칸나는 문득 아직도 정체를 모르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사실 그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쉬운 것부터 쳐내자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무슨 관계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비앙카와 저 여자가 친 자매 사이라 해도 될 정도로 느낌이 은근하게 닮은 구석이 있어서 더 그랬다.

“나랑 친자매야.”

“역시 그렇군요. 닮아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요.”

“멜리사 케이에요.”

칸나는 저 여자도 비앙카처럼 무서운 여자일 수 있단 생각에 경계심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텐데, 잘 부탁해요.”

“…해솔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사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

해솔의 집이라는 이 공간을 멜리사는 너무 익숙하게 돌아다녔다.

더군다나 자매의 남자친구를 대한다기엔 은근히 묻어 나오는 친근한 분위기가 결코 평범한 관계가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이 궁금증을 계속 안고 가야 할 것 같았기에 기회가 온 지금을 놓치지 않고 용기내서 물었다.

칸나가 질문을 하자마자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비앙카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좀 늦게 알았어요.”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진해솔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 단어’를 말하는 건가?

사실 그게 가장 궁금했던 거였는데,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제가 보기엔 일부러 그런 거에요.”

멜리사가 진해솔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내가 뭘? 입에 붙어서 실수한 거야.”

“또 거짓말 하네.”

“거짓말 아니거든?”

“처음은 실수로 내뱉었겠지. 그 이후로는 전부 의도적이었고.”

“…….”

“어머어머, 주인님!! 얘 말 못하는 거 보세요.”

“!!”

칸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멜리사도 해솔에게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설마했던 의심이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칸나의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발그레해진 두 볼에는 살짝 기대감도 섞인다.

‘서, 설마나도 주...인님이라고 불러야…할까?’

평생 ‘주인님’이라는 단어와 가까이 지내본 적 없었기에, 칸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앙카와 멜리사는 너무 자연스럽게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노예도 아니고 주인님이라니...기분 나쁘지 않는 걸까?

절로 드는 호기심에 칸나가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주인님…?”

"?!"

"!!"

"!!"

"힉!"

다만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던 건 명백한 실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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