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화 〉 #54. 2년 (2)
* * *
“좀 어때요? 괜찮아요?”
사람들 시선을 피해 잠깐 연주 누님과 단 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 왔다.
다들 마음이 들떠 있어서 우리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나와서 너무 좋아.”
“그래 보여요. 표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거든요.”
“…내가 그 정도였다고?”
“나한테만 보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죠. 누님은 표정 관리 잘 하시잖아요.”
“현오 낳고 많이 바뀌었어. 비서가 그걸 알아보더라.”
안경이 없었기에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연주 누님을 품에 안았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어서 꽉 안을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서로 한 몸처럼 지냈기에 떨어져 있는 것보단 붙어 있는 게 더 안정감이 있었다.
“안경 안 꼈잖아.”
“이 시간에 누가 여길 오겠어요. 그냥 좀 있읍시다. 저 콘서트 치르느라 힘들었단 말이에요.”
“…콘서트 치르고 와서 밤새 날 안았으면서 힘들다고 투정을 부린단 말이야?”
첫 콘을 치르고 나서 곧 복귀하는 누님에게 한껏 정욕을 풀었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여자가 누님이 아닌가?
현오를 사랑하는 걸 알지만, 다시 일을 하다 보면 언제 관심을 그쪽에 빼앗길지 모를 일이었다.
“미리 단속한 거에요. 누님도 인정하셨잖아요. 이젠 일보다 가족이 더 중요해졌다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짓 안 해도 된다는 뜻이야. 너는 내가 섹스 때문에 너 만난 줄 아니?”
“그럼 아니에요?”
“…….”
연주 누님이 갑자기 말이 없다.
아무래도 찔리는 모양이다.
“흐흐, 누님도 이런 부분에선 은근히 거짓말을 못하신다니깐요.”
“됐고, 이따가 현오 보러 갈 거지?”
“당연하죠.”
“같이 가. 나도 볼래. 하루는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 일하면서도 자꾸 애 얼굴이 아른 거리더라.”
“누님, 진짜 변하긴 변하셨네요. 감격스러워요.”
“흥, 싱겁기는.”
“회식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슬쩍 나올게요. 전화 수시로 확인해요.”
“난 미리 나올 거야. 회식 자리에 사장이 오래 있으면 다른 직원들 눈치 보여서 제대로 못 놀아. 그러니까 너나 회식 하다가 까먹고 연락 잊지 마.”
누님과 내가 말한 현오, 내 아들은 현재 다른 사람에게 맡겨져 돌봐지고 있다.
미리미리 엄마와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하긴 했지만, 얼마든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연락은 안 왔죠?”
“어. 오히려 내가 애 타서 연락을 먼저 했어. 밥 잘 먹었고, 똥오줌 잘 쌌고, 건강하게 잘 놀았대. 시현이가 어려서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오랑 잘 노나 봐.”
시현이는 복순 누나가 낳은 딸이다.
참 의외였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을 인연으로 친분을 쌓았다.
그 전에 이미 회사에서 알고 지낸 사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무튼 덕분에 현오와 시현이는 남매 사이로 절친하게 지내고 있는 중이다.
“칸나씨가 정말 야무지게 일을 잘 하더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고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비앙카가 난감해졌고요.”
아직 1살 이제 2살이 될까 말까 하고 있는 몇 개월짜리 아기.
거기다가 연주 누님은 남자 아이를 낳아서 아무한테나 아기를 맡길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신뢰가 있어도 꺼려질 만큼 남자아이는 귀하디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시도 때도 없이 우는데다가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연약함까지 갖추고 있는 존재가 바로 아기이다.
누구에게도 선뜻 맡길 수 없는 소중한 존재.
나는 이 아기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칸나를 선택했다.
사실 딱히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은 그녀만큼 완벽한 적임자가 없었다.
아예 스케줄이 없는 건 아니라서 가끔 비앙카와 함께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날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멜리사가 커버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데려다 놔서 그런 거야. 그런 자리에 올라봤자 금방 질려할 걸?”
차라리 칸나가 아니라 연주 누님이 그쪽 가문 사람이었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점점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비앙카가 예정한 것보다 빠르게 일을 진행 시키는 중이에요.”
“우리한테는 썩 좋지 않은 얘기네. 칸나씨가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 않은 걸.”
나도 그렇다.
더군다나 현오만 맡기고 있는 게 아니라 시현이도 함께 맡겨놓은 상황이다.
시현이를 칸나에게 맡기고 잠깐씩 나는 시간에 학원 관리에 들어간 복순 누나다.
두 사람이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싶더니 일 욕심도 똑같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확실히 말을 들어봐야겠어. 만약 회사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원래 칸나도 언니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중이었다.
초반만 해도 비앙카를 무서워하면서도 시키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던 그녀였지 않은가?
다만 ‘아기’라는 존재가 칸나의 인생에서 너무나도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뿐이다.
? ? ?
“아빠 왔다~!!”
“아우웅.”
“우리 시현이, 현오 잘 놀고 있었어요?”
“현오야~ 엄마 왔어.”
“끼아!”
“어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회식이 시작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다.
아마 사람들이 내 부재를 금방 눈치 챌 테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었던 지라 대충 변명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회식 중간에 튀어버렸어. 우리 애기들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잘 하셨어요. 오늘 아가씨랑 도련님 모두 잘 먹고 잘 싸고 잘 노셨는데, 좀 자주 칭얼대긴 하셨거든요.”
“세상에, 우리 현오 엄마 보고 싶었구나?”
“고생 많았어. 칸나.”
“고생은요. 확실히 전 이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아기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같이 지내면서 항상 행복하고요.”
“적성에 잘 맞는다고 하니 다행이네.”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요즘같이 하루하루가 행복할 때는 처음인 것 같아요.”
실제로 칸나의 얼굴이 요즘만큼 행복해보일 수가 없다.
그녀가 얼마나 의욕적인지는 행동 자체에서도 충분히 보였다.
내게서 아기를 맡아 줄 수 있냐는 물음에 기겁을 했던 칸나는 처음으로 지현과 현오를 소개 받으면서 생각을 아예 바꿔버렸다.
‘애들 보는 눈에 꿀이 뚝뚝 흘렀으니까.’
이렇게 애기가 예쁠 줄 몰랐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 이후, 고3 시험 공부 하듯이 육아에 관련 된 각종 도서를 구매해서 공부를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능숙하게 아기를 다룰 줄 알게 됐다.
이론 뿐만 아니라 실전을 배우기 위해 전문가를 고용했던 것이다.
‘돈칠을 해서 전문가한테 배웠으니 당연한 거긴 한데, 그래도 배움이 빠르긴 했어.’
손재주가 있는지 하는 것 모두 야무졌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꼼꼼하게 제대로 배웠는지, 깐깐하게 따져대는 스타일인 연주 누님과 복순 누나 모두 칸나의 돌봄에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을 정도다.
“여기 오늘자 돌봄 알림이에요.”
칸나가 연주 누님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이 수첩만 있다면 시현이와 현오가 오늘 하루 뭘 하고 있었는지를 전부 알 수 있었다.
“힘들었을 텐데 고마워요, 칸나씨.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줄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어요.”
“애기들이 너무 예뻐서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랑스러운 아가들이랑 같이 있게 해주셔서 감사한 걸요.”
“와~이런 것까지 적은 거야?”
연주 누님이 확인하는 수첩을 슬쩍 훔쳐보니 별의 별 것들이 다 적혀져 있었다.
똥오줌은 몇 번 쌌는지부터 시작해서 팔 다리 쭉쭉 마사지를 몇 분간 몇 회 했는지, 노래는 뭘 틀어줬는지, 낮잠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잤는지…등등.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적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의 정보들이 수첩에 적혀 있는 것이다.
“이래야 안심이 되잖아요.”
“우리가 널 못 믿을 리 없잖아. 이런 거 안 해도 안심하고 믿고 맡기고 있는 중이야.”
“그래도 전 이렇게 꼼꼼하게 적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리고 아기는 뜬금없이 열이 나거나 몸에 탈이 날 수도 있대요. 평소랑 다른 부분을 미리 적어두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 있어요.”
연주 누님이 칸나의 믿음직한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노파심에 다시 한 번 주의를 줬다.
“들어서 알겠지만, 현오를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네. 저택에 경호원이 있지만, 그걸로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진 않아요.”
“고마워요.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연락하고요. 저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받을 겁니다.”
“네!”
여기서 말하는 현오를 노리는 사람은 바로 연주 누님의 어머님이시다.
누님이 조폭 출신이라는 뜻밖의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여태까지 따로 접근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누님이 출산을 하고 난 이후까지도 얼굴 한 번을 안 보여주셨는데….
‘너무 조용하니까 괜히 더 찜찜하다고.’
누님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자신이 아는 어머님이라면 최고의 타이밍이 올 때까지 인내할 거라고 말이다.
사전 작업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고, 정작 시작하면 무조건 밀어 붙인다는 모양이다.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는 칸나는 걱정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현오가 남자아이니까 포기한 게 아닐까요? 남자 아이한테 그런 일을 물려주는 건 무리잖아요.”
여자들이 득실득실거리는 곳의 후계를 남자인 현오로 삼는다?
지구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음 당할 일이었다.
“만약 해솔이가 조폭 두목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
칸나가 그런 생각은 못해봤다는 듯 눈이 커진다.
듣고 있던 나는 연주 누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내가 조폭 두목이면 뭐 어떻다는 거야?”
“의, 의외로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어릴 때부터 잘 교육하면 남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요즘 남자아이가 너무 귀해서 품에 안고 키워서 그렇지, 체력적으로 교육하면 여자보다 근육이 잘 붙어요. 더군다나 현오는 해솔이를 닮아서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그 바닥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겠죠.”
현오의 여자가 되기 위해 온갖 쓰레기들이 그의 발 아래에 엎드릴 것이 자명하다는 게 연주 누님의 주장이었다.
‘우리 현오가 조폭 두목이 된다고?’
겨우 내 손바닥보다 커지게 된 현오다.
그런 작고 연약한 아이가 험한 일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니….
‘좀 별론데.’
부모의 마음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자식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번듯한 직업을 갖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어머님에겐 죄송스럽지만, 아이에게 그런 교육을 받게 하는 건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들은 무조건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킬 생각이었는데, 현오는 좀 생각해봐야겠다.’
내 아들을 이곳 남자아이처럼 순둥순둥하게 키울 생각은 없다.
적어도 여자에게 몹쓸 짓을 당하지 않을 만큼의 힘은 키워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오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괜히 운동시켰다가 조폭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아이의 미래는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번듯한 직업을 가지도록 유도를 하는 것 정도는 부모로서 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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