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61화 (361/849)

〈 361화 〉 #54. 2년 (5)

* * *

‘망한 아이돌 그룹이 몇 개냐고.’

1년에도 몇 백 개의 그룹이 데뷔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 음주 운전으로 순식간에 인기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도 여전히 생긴다.

인기는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반드시 식기 마련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 아닌가?

란나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그거다.

지금은 반응이 굉장히 좋지만 계속해서 반응이 좋을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

“잘 되고 있는데 굳이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요. 일이 계속 잘 된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렇다고 실패만 생각하고 있기엔 앞으로 란나씨가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잖아요.”

이미 카페는 레드오션 중의 레드오션인 직종.

뒤늦게 출발한 후발 주자가 얼마나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면 지금의 성공은 솔직히 제대로 된 성공이라 치기 어려운 성과이다.

목표로 해야 하는 기준이 완전히 달라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제 입장을 말할게요. 란나씨가 투자금을 전부 날려먹어도 상관이 없어요. 돈은 다시 벌면 되니까요.”

“네에?!”

“제 돈은 다양한 곳에 투자 되고 있어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도 제 돈을 받고 회사를 키우는데, 란나씨는 왜 그걸 부담스러워 해요? 리스크를 감당하는 건 투자자가 가져야 하는 당연한 선택인 겁니다.”

“…정말 다 날려도 상관없는 거에요?”

“네. 앞으로 익숙해지세요. 사업이 점점 더 커지면 제 돈으로만 회사가 돌아가진 않을 거에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배우면 되죠.”

사업은 은행 돈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내가 투자해준 돈으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점점 덩치가 커지면 자연스레 대출을 끼고 사업을 할 수밖에 없어질 거다.

대출이라는 게 마냥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러니 란나씨는 남의 돈을 쓰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고, 지금은 어색하고 걱정이 많이 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에요. 카페 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만큼이나 키워냈잖아요. 할 수 있어요. 겁내지 말아요.”

솔직히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녀가 지금까지 성과를 낸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재능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 설득이 먹혔는지 란나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감사해요. 아무리 우리가 연인 사이라고 해도 돈 문제는 다른 거잖아요. 다 날려도 상관없다고 하셨지만, 꼭 성공시켜 보일게요!”

사실 그녀의 말이 맞다.

아무리 연인 사이이라지만 ‘투자’는 다른 얘기다.

가족끼리도 돈 문제는 복잡하게 얽히지 않아야 한다지 않은가?

피를 나눈 사이에도 돈 때문에 의가 상하는데, 연인끼리라면?

“아~! 설마 망하면 나랑 헤어질까봐 걱정했어요?”

“네?”

선뜻 아니라고 말 못하는 걸 보니 정말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돈 때문에 헤어진다니!

본말전도가 아닌가?

“절대 안 되죠. 못 된 생각을 했네. 절대 안 놔줄 거니까 상상으로도 그런 건 생각하지 말아요.”

“죄송해요. 그냥 제가 일을 망쳐버리면, 사장님이 화를 내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화가 나서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나보다.

내 입장에서 카페는 그녀를 붙잡아 둘 수단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돈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란나도 마찬가지일 거고.’

솔직히 나도 돈 좋아한다.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엄청난 돈을 쓸어 모았지만 여전히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하지만 돈이 없을 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과 돈이 많을 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란나한테 투자하는 돈은 얼마든지 감당 가능해.’

더군다나 내가 번 대부분의 돈이 더 큰 돈이 되기 위해 비앙카와 멜리사가 각종 방식으로 투자 된 상황이다.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가 있는 법이지만, 비앙카와 멜리사의 수완을 믿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든든하게 믿을 구석이 있는데, 굳이 내 여자에게 팍팍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란나에게 투자한 금액이 없어도 나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내 자식들 굶기지 않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지원해줄 수 있을 정도의 부였다.

“제가 투자금을 신경 안 쓴다고 해서 함부로 쓰라는 뜻은 아니에요. 근데 더 싫은 건 란나씨가 부담을 갖고 힘들어하는 겁니다. 당장 손해가 나기 시작했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도전해요. 란나씨를 응원하는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한텐 이깟 돈보다 란나씨가 더 중요해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더군다나 그녀에게 투자한 금액이 아깝지 않은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돈 벌자고 그녀에게 투자금을 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랑만 믿고 있다간 뜬금없이 떠나겠다고 하던 사람이 란나씨니까.’

만약 내가 아이템을 사용해 꿈으로 그녀의 성향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많이 방심했을 것이다.

지금 내 여자들을 봐도 나와 헤어지겠다고 나오는 여자가 한 명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란나씨의 꿈을 엿봤던 나는 정말 다양한 이유로 헤어짐을 말하는 란나씨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삶에 연인을 뚝 끊어놓은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든 이별을 선택했다.

그런 여자이기에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내 진짜 신분을 알면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하기에 새로운 신분을 파고,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서 카페라는, 그녀를 묶어 둘 장소까지 만들어두며 공을 들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고작 ‘돈’ 몇 푼으로 그녀의 마음을 묶어둘 수만 있다면 내게 훨씬 이득이었다.

‘란나씨라면 오늘 이 문제를 해결 안 했을 때, 헤어지자고 했을 지도.’

역시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 안 하게 확 잡아두는 게 필요하다.

‘카페을 키운다는 걸로 정신없이 바쁘게 일을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부담감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다시 바짝 긴장하자.

살짝 변명을 하자면 나도 바빴다.

해외 활동도 그렇고 복순 누나와 연주 누님이 연달아 출산을 해서 신경 쓸 게 많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란나씨는 상대적으로 방치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잠깐의 방심이 현재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동안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들로 안배를 만들어뒀지만, 역시 최고의 방법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다가 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사장님 같은 사람이 온 걸까요?”

내 말에 감동을 받은 란나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촉촉함이 깃들어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멋진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사장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는 걸까요?”

너무 큰 사랑도 란나씨에게는 헤어짐의 원인이 된다.

꿈에서 봤듯이 아이를 임신해도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녀가 아닌가?

나는 말랑말랑한 피부가 숨겨져 있는 옷 안으로 손을 은근하게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기쁘고 고마우면 제 아이라도 낳아주시던가요.”

쿨럭!!

내 말이 많이 당황스러웠는지 란나가 격하게 기침을 했다.

겨우 기침을 진정시킨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가, 갑자기 아이라뇨?! 너무 뜬금없잖아요.”

“별로 뜬금없지 않은데요?우리 꽤 오래 만났잖아요. 이 정도 만났으면 상상해볼 법한 일 아닙니까?”

“…확실히 오래 만나긴 했죠.”

내 말을 들은 란나의 얼굴이 복잡해진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녀 입장에서 임신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한 건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의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란나를 임신시키지 않은 건, 관계가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되면 그녀가 나를 떠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지 어느덧 3년에 가까워져 가고 있고, 그녀가 내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다.

“저랑 결혼 안 할 거에요?”

“겨, 결혼요?”

“나는 란나씨랑 대충 만나다가 헤어지는 관계로 생각한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평생 함께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어어….”

이거 설마 프러포즈?

란나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다.

나는 확실하게 못을 박기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청혼할 때 반드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그것.

‘청혼 반지’였다.

“헙!”

“너무 뜬금없는 프러포즈인가요?”

“이게 정말, 꿀꺽­ 정말 제거라고요?”

입이 마르는지 침을 크게 삼키며 란나가 재차 되묻는다.

믿기지 않는 눈치여서 직접 손에 끼워주기로 했다.

“네, 란나씨를 위해 준비했어요. 손 내밀어줄래요?”

란나가 순순히 자신의 손을 내민다.

손을 쥐니 그녀가 미미하게 떨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가 볼 수 있게 반지 케이스를 연 뒤, 꺼내서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딱 알맞게 손가락에 찾아 들어간 반지가 란나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청혼 반지이기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반지로 준비했는데,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

“역시 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맞나봐요. 이게 현실일 리 없어….”

“하하하, 이제 반지 받았으니까 거절은 안 돼요.”

“맙소사…oh my god!!”

프러포즈가 생각보다 더 기뻤는지 란나가 제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만약 여기가 바깥이었다면 안경의 인식 방해를 뚫고 전부 그녀를 구경했을 거다.

흥분한 란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기꺼이 기뻐하는 란나를 품에 안고 진한 키스를 나눴다.

한참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방방 뜨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는 뒤늦게 현실감이 오는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 왜 울어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어서요.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다니….”

프러포즈의 임팩트가 강했는지 어느새 임신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란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결혼식은 처음인데?’

내 진짜 신분으로 란나를 만난 게 아니다 보니 그녀와 결혼식을 치러도 문제가 없다.

그러니 이번 프러포즈는 결혼식을 올리는 첫 프러포즈가 되는 것이다.

상황을 자각하고 나니 나도 슬슬 긴장감이 밀려왔다.

‘결혼식이라….’

30대가 되었을 무렵부터 시작 된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들.

나도 언젠가는 저 친구들처럼 평생을 함께하게 될 여자를 만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 인연 자체가 부담이 돼서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던 게 바로 결혼이었다.

많은 여자를 만났고, 아기를 낳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서 이미 꿈을 다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마음이 술렁였다.

“란나씨 부모님을 뵙고 싶어요.”

“엣!? 벌써 상견례까지 생각하시는 거에요?”

“뭐든 시작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사실 이 정도 만났으면 부모님 한 번 뵙고 인사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럼 사장님은요?”

“저요? 아~ 저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

너무 깜짝 놀란다.

남자가 고아원에서 자라는 것자체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보니 그렇다.

입양이 가장 잘 될 수밖에 없는 게 남자아이고, 내가 껍데기처럼 쓰고 있는 이 얼굴은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낼 법하게 번드드한 나짝이기까지 했다.

“입양은 제가 싫어서 안 갔어요.”

“…저는 이걸 이제야 알게 됐네요. 사장님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일부러 내 신상에 관련 된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말할 수 있는 것도 드물었다.

전부 거짓말로 꾸며진 신분이 아닌가?

‘그나마 완전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을 해야 하면 막막했을 텐데.’

비앙카가 만들어준 신분이지만, 그 신분의 스토리를 만드는 건 나였다.

나는 그 스토리를 내 지구의 삶을 차용했다.

고아원에서 컸고, 남들처럼 고생해가며 취업을 해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만 세계가 다른 탓에 어느 정도 각색을 할 필요는 있었다.

내가 각색한 부분은 회사 생활이었다.

나처럼 잘 생긴 남자가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에 위화감은 없었다.

그렇게 돈이 굉장히 많은 잘 나가는 회사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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