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55. 조폭 장모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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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우렁찬 목소리의 사죄였다.
목소리가 큰 게 이렇게 큰 임팩트를 줄 거라곤 생각 못했다.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은 아무렇지 않은지 덤덤하게 여자를 내려다보셨다.
‘뭐야, 의심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게 맞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라는 게 있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니 의심을 하는 건 당연한 거였다.
이렇게 장모님께서 사과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날 의심할 수 있냐며 배신감을 느껴도 좋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변명도, 화도 내지 않고 냅다 고개 박고 사죄부터 하고 있는 거다.
‘여기 진짜 이상한 곳이구나. 저게 상남자 아니, 상여자 느낌인 건가?’
여태까지 선뜻 와 닿지 않았던 연주 누님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사죄를 받고 있는 장모님의 태도가 엄청났다.
여자의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던 것이다.
“흠흠! 네 마음을 의심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둘째는 부족한 게 많은 아이였어.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이 복잡해진 것뿐이다. 첫째 말은 내 생각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여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걸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왜 저렇게 좋아할까 의아했는데, 연주 누님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귀에 속삭였다.
‘다 연기니까 동요하지 마.’
‘저게 연기라고요?’
‘대충 체면 세워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체면?
마치 느와르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이랄까?
‘여기선 우정이 아니라 충성인가?’
확실히 주절주절 변명하는 것보단 저렇게 사죄를 하는 것이 윗 사람한테는 더 좋은 이미지로 남는 것 같다.
정말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가리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일어나거라. 손님도 계시는데 네가 그렇게 자세를 낮추는 건 보기 좋지 않다.”
“예, 보스.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을 때도 쿨했던 여자는 몸을 일으키는 것도 쿨했다.
무릎을 꿇은 여자를 다독이며 몸을 일으키게 한 장모님이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위한테 우리 관이를 소개시켜줬던가?”
‘우리’ 라는 단어에서 장모님이 저 여자에 대해 굉장한 신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뇨, 소개를 못 들었네요.”
“내가 배려를 못했구만. 나이가 들면 이렇게 깜빡깜빡 한다니깐. 이쪽은 내 수양딸 최관이네.”
“최관이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관이 너는 형부라고 부르면 되겠다. 자네도 관이를 처제라고 생각하게.”
“네,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한 나와 달리 최관씨는 펄쩍 뛰었다.
“예!? 제가 감히 어떻게….”
“감히는 무슨. 연주 너 혹시 불편하냐?”
“아뇨. 쓸데없는 겉치레 그만하지?”
연주 누님도 최관이라는 여자가 나를 형부라 부르는 것에 불만이 없어보였다.
저 여자를 말할 때 말투가 꽤 날카로워서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썩 나쁘지 않은 듯하다.
“네, 아가씨.”
“언니라고 부르라고 한지 꽤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아가씨네.”
“…송구합니다.”
“아무리 어머니를 존경한다지만, 쓸데없이 극촌칭 쓰는 거 되게 짜증나. 어머니가 저걸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드니? 자기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보스는 존경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이래서 딸 낳아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있나보다. 늙은 에미를 핍박하는 구나.”
“제가 핍박하면 당해는 주실 거고요?”
또 연주 누님과 장모님이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대화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머리를 굴려봤다.
장모님은 반드시 후계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현오를 포기할 수 없고, 연주 누님은 현오를 이곳에 얽매이게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그냥 최관씨한테 후계를 물려주라고 하면 분명 안 된다고 하겠지.’
나는 고민하다가 서로 한 발짝 씩 물러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떠올리고 모두에게 제안해보기로 했다.
대화를 하기만 하면 싸움으로 연결 되는 두 사람은 백일을 대화해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 여자를 이용하자.’
최관이라는 여자가 속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정말 속에는 꽤나 야망이 넘치는 여자일 수도 있다.
그녀의 위치상 야망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될 정도이기까지 하다.
최관씨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어떤 가능성이든 활짝 열어두기로 했다.
그녀가 야망을 갖고 있든, 충성심으로 정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든 상관없었다.
‘이걸로 장모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야.’
최관씨가 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도 조금만 생각을 해본다면 둘 다에게 좋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최관씨가 우리 현오 대모가 되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뭐?!”
“대모? 지금 자네 대모라 했나?”
한참 다투던 연주 누님과 장모님의 관심이 단숨에 나에게로 쏟아졌다.
“예, 최관씨가 현오의 대모가 되어준다면 굉장히 든든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 현오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장모님께서는 현오를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하시지만, 그게 어디 하루 이틀로 가능한 일인가요? 현오가 다 클 때까지 시간만 해도 20년입니다.”
“20년….”
지금부터 20년이 지나면 장모님 나이는 여든을 넘기실 거다.
갈 때는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지만, 그때까지 장모님이 정정하게 가문을 지키고 계실 수는 없을 것이고, 결국 가장 가까이에서 일을 물려줄 만한 인물은 최관씨였다.
자연스레 그녀가 실권을 잡아 간다면 현오가 후계자가 돼서 물려 받든 말든 좋은 관계를 다져둘 필요가 있었다.
‘장모님한텐 뭐한 말이지만, 돌아가신 이후를 생각해야지.’
현재 장모님과 연주 누님이 다투는 것은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줄 일이었다.
내가 현오를 위해 해줄 일은 한 가지다.
최관씨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주는 것.
아이가 자신의 미래를 진지하게 결정내릴 수 있는 나이.
스물이 될 때까지 말이다.
최관씨는 그때까지 장모님의 결정을 미루게 만들어줄 최고의 카드였다.
“나보고 20년을 기다리란 소린가? 그때면 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 걸세!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키우지 않으면 의미 없어!”
“그래서 최관씨가 대모가 되어주길 바란 겁니다. 장모님 가까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최관씨라면 아이가 다 성장한 이후에도 충분히 키워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현오를 이 집 안 사람들이랑 엮으려는 거야?”
“이대로 있다간 싸우고 감정만 상할 뿐이에요. 서로 한 발자국 씩 물러나야 해결이 되죠. 우리는 당장 현오 미래를 결정하는 게 싫고, 장모님은 20년을 기다릴 수 없다고 하시니까 최관씨가 대모가 되어주는 걸로 합의하는 거에요.”
여기서 장모님이 그럴 수 없다고 하면 무릎 꿇고 사죄까지 한 최관씨를 배신하게 되는 일이었다.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최관씨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최관씨가 제 제안을 받아주셨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오늘 형부와 저는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선뜻 절 믿어주시겠다는 겁니까?”
최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솔직히 그녀를 믿고 한 제안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봤다.
“그럼요. 장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을 보니, 현오의 대모 자리를 믿고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거든요.”
“그래도 아드님의 대모 자리인데….”
최관씨가 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결심을 했는지 눈을 번뜩 뜨면서 장모님을 불렀다.
“보스!!”
“으, 으응?”
갑자기 진행 되는 대화에 당황을 금치 못하던 장모님이 최관씨의 박력에 당황하셨다.
“제가 정말 도련님의 대모가 되어도 되겠습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그래도 괜찮은 게냐?”
많은 유혹이 있을 자리다.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지….
나도 진심으로 최관씨를 믿어서 한 재안이 아니지 않은가.
괜히 이 문제에 끼어들었다가 말년에 좋지 못한 일을 겪을 수도 있었다.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를 수양딸이라고 소개시켜준 것처럼, 제가 감히 보스를 어머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욕심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도련님에게 보스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보스께서 어떤 분이셨는지 분명히 가르치겠습니다.”
“…….”
장모님은 골치 아픈 문제를 얻었다는 듯 머리를 짚으시며 말을 아꼈다.
“당장 결정을 내릴 순 없을 것 같구나.”
“…예.”
최관씨는 다소 실망한 눈치였으나 장모님은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버리셨다.
연주 누님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가 슬며시 말했다.
“밥이나 먹죠. 배고픕니다.”
모두가 바랐던 깔끔한 화제 전환이었다.
? ? ?
장모님이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결국 붙잡혀서 묶고 가게 됐다.
현오를 한시도 곁에서 떼어내지 않던 장모님은 잘 때도 떼어내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누님과 함께 하룻밤 묶을 곳으로 움직였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생활감이 있었다.
“여기 혹시 누님 방이에요?”
“어릴 적 지냈던 방이긴 해.”
“오!”
연주 누님의 어릴 적 지내던 방이라니!
갑자기 이 방에 대한 엄청난 흥미가 돋아났다.
“사진 없어요? 원래 이렇게 놀러오면 사진 보여주잖아요.”
“없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에이, 있는데 없는 척 하는 거 아니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앉아 봐. 얘기 좀 해.”
“넵.”
상의 없이 저지른 게 있다 보니 누님의 부름에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넌 최관 처음 보잖아.”
“그렇죠?”
“뭘 믿고 걔한테 애를 맡길 생각을 해.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건 경솔한 행동이었어.”
연주 누님의 따끔한 혼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도 없이 생각나자마자 저지른 일이니 누님 입장에선 당황할 만하다.
“그분을 진심으로 믿고 한 제안은 아니었어요. 현오를 그 사람한테 맡길 생각도 없고요.”
“그럼 대모 얘기는 왜 꺼낸 거야?”
“장모님도 그렇고 누님도 그렇고 물러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최관씨를 이용하는 게 될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서로 winwin이 될 수도 있겠죠.”
“설명을 해봐. 네가 뭘 노리고 그런 짓을 했는지 들어봐야겠어.”
나는 누님이 이해하실 수 있게 설명을 시작했다.
머리가 좋은 분이니 이해를 하는 건 금방이었다.
“관이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겠다는 거구나.”
“이대로 장모님을 내버려두면 현오에 대한 집착이 갈수록 더 심해지실 거에요. 그땐 지금처럼 말로 해결이 안 될 수도 있겠죠.”
“그 사람 인내심은 내가 잘 알아. 얼마 가지 않아 초조해져선 별의 별 짓을 다 할 거야. 추잡한 줄도 모르고.”
“그래서 그런 거에요. 최관씨를 대모로 삼으면 현오 교육을 그리 조급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내 얘기를 듣고 보니 괜찮은 아이디어임을 이해했던 모양이다.
연주 누님의 심각했던 얼굴 표정이 풀어졌다.
“근데 어머니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어머님이 관이를 진심으로 믿어야 할 텐데, 그 양반이 그게 가능할 리 없거든. 진심으로 관이를 딸로 여겼으면 둘째를 데리고 그 난리를 쳤을 리가 없고, 현오한테 집착할 이유도 없었어.”
아무리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 해도 ‘수양딸’ 이라고 소개할 만큼 가까운 관계다.
누가 봐도 후계자로 어울리는 최관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은 현오를 탐내고 계신다.
그만큼 핏줄에 대한 집착이 심한 것이다.
그 집착을 현오에게 모두 쏟아지도록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최관씨를 이용할 생각을 한 거였다.
“전 장모님이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상황이 좀 미묘하잖아요. 가뜩이나 최관씨가 그 일로 무릎까지 꿇으셨는데.”
“미묘하다라…. 하긴, 지금 그 노인네 머릿속이 복잡할 거야. 네 제안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관이를 믿지 못한다는 걸 의미할 테니까. 걔도 사람이니 거절 당하면 배신감이 장난 아니겠지. 누가 됐든 두 사람 중에 한 명한텐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는 기회인 거네?”
원래 믿음이 클수록 실망하게 됐을 때 오는 리스크가 큰 법 아니겠나?
장모님이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었기에 누님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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