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69화 (369/849)

〈 369화 〉 #56. 호랑이 굴에 들어 온 호랑이 (1)

* * *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내 손에 네 자식 맡기기 싫어서 관이를 핑계로 삼은 걸 허락해준 거니 나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니?”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본인이 손해 보는 건 절대 싫어하시죠.”

“내가 누군데 손해를 볼까. 날 넘어서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래서 바라시는 게 뭔데요?”

장모님이 제시하는 조건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관이한테 대모를 시킬 거면 확실하게 해라.”

“그게 무슨 소리세요? 확실하게 하라니.”

“말로만 대모라고 하고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을 셈일 텐데, 어정쩡한 위치는 어림도 없다는 거다. 제대로 된 대모로 인정해.”

“그럴 리가요. 대모가 되어 달라고 한 건 우립니다.”

연주 누님이 아닌 척 굴어봤으나 그걸 느끼지 못할 장모님이 아니셨다.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가 들어 있는 분이 아닌가?

“택도 없는 소리! 모르는 척 하지 말거라.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알아들었잖니? 아무튼 관이를 집으로 보낼 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

이건 또 뭔 소리야.

“네? 집으로 보낸다니, 관이 쟤를요?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장모님의 지적에 연주 누님이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장모님도 만만치 않은 분이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직하게 밀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현오를 보호하려고 사람 몇 보내려고 했다. 누구보다 믿음직한 관이가 간다면 마음을 푹 놓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게 뭐가 있겠냐.”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현오를 교육하는 건 성인이 된 이후부터입니다.”

“애가 자랄 때까지 곁에서 보호해주면 되지!”

“현오를 보호하는 건 제가 알아서 할 일 입니다!”

나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꽤나 당황스러워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젠 익숙해졌을 정도로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최관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이라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주 누님도 최관씨의 그런 무던한 표정을 보았는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쟤가 그걸 순순히 하겠다고 했습니까? 어머니 옆에서 절대 안 떨어지려고 하던 애잖아요!”

“나를 위해서 큰마음을 먹어줬다. 정말 기특하지 않으냐? 내 곁을 절대 안 떨어지던 아이인데, 스스로 희생해서 현오를 지키겠다는 거잖니.”

“참 둘이서 짝짝꿍이 잘 맞네요. 이럴 거면 굳이 우릴 귀찮게 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그냥 둘이서 알콩달콩 사시면 되잖아요.”

“어허!”

장모님의 집착에서 현오를 빼내기 위해 제안했던 대모 자리가 이렇게 일을 꼬이게 만들 줄은 몰랐다.

연주 누님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바짝 긴장을 하고 장모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도 현오를 위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잠깐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절대 안 된다는 연주 누님과 자신이 한 발 물러났으니 이제 너희가 물러날 때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시는 장모님 사이에서 기어코 큰 소리가 나왔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너희들이 걔 귀에 뭘 속닥거릴지 알게 뭐냐! 관이라도 곁에 둬야 안심이 된다!”

아이의 성향이 영향을 받는 건 어릴 적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최관씨에게 아이를 맡겼다가 무슨 소리를 속닥거릴지 누가 아느냔 말이다.

‘곱게 자란 칸나가 최관씨를 견제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솔직히 최관씨가 눈살만 찌푸려도 칸나는 겁을 집어먹고 벌벌 길 게 분명하다.

“너도 관이라면 현오를 믿고 맡길 수 있지 않니?”

“그건 어머니 생각이고요. 현오는 지금도 충분히 보호 받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안을 아예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이미 한 번 양보 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하지 말 거라.”

장모님이 보여주시던 인자한 웃음은 어디로 가고, 누구 하나 담글 기세인 살벌한 눈빛이 연주 누님에게 쏟아졌다.

이게 소설에서 나오던 ‘살기’라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와씨, 진짜는 진짜구나. 무섭긴 하다.’

산전수전에 아수라장을 경험하고 살았던 분이시다 보니 장모님의 남다른 포스를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버티기 어렵진 않은데?’

처음 느껴보는 자극에 몸이 긴장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것도 금방 적응이 됐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코인’을 지불해서 얻어낸 능력을 당해낼 수 없는 것 같았다.

연주 누님은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경험했던 압박감인지 금세 털어내며 나를 걱정했다.

“지금 저만 있는 거 아닙니다. 무례하게 행동하면 다신 데리고 오지 않을 겁니다. 후회할 일 만들지 마세요.”

“흐잉…마아~”

화가 잔뜩 났던 장모님이 때마침 칭얼대는 현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시더니 눈에 힘을 푸셨다.

“어이구, 우리 손주. 할머니 때문에 깜짝 놀랬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흠흠! 딸아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군. 자네가 이해를 좀 해줬으면 하네. 마침 잘 됐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요구한 게 과하다고 보는가?”

“장모님한테 최관씨가 믿을 수 있고 가까운 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생활권을 침범하겠다는 말에는 동의를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오는 연주 누님이 말했던 것처럼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자네도 싫다 이건가? 그러다가 애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납치라니, 살벌한 말씀을 하신다.

이러다간 현오가 안전한지 시험해보겠다며 직접 아이를 납치하려는 시도를 해보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나도 한 번 양보했다. 이젠 너희들이 양보해야 하는 순간이야! 관이를 집에 들여라.”

“최관씨도 저희 집에서 지내는 게 불편할 거에요. 평생 장모님 곁에서 계시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오 이제 겨우 옹알이 하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관이씨가 집에 들어와도 하실 일이 없을 거에요.”

내가 최대한 부드럽게 타일러보았으나 연주 누님과 싸우기까지 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는데, 내 말이라고 통할 리가 없었다.

훈훈하게 마무리 될 줄 알았던 자리가 대설이 된 듯 싸늘해졌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로 집으로 돌아 온 우리는 다음 기회를 노려보기로 했다.

“관이 걔가 그 사람 꼭두각시라는 걸 잊고 있었어. 걔를 이용하는 건 그만두자.”

“나름 괜찮은 계획이었는데, 정말 이대로 포기해요?”

“솔직히 네가 걔를 꼬신다고 해도 어머니보다 더 우선해서 널 생각할 것 같지 않아.”

연주 누님은 최관씨에게 학을 뗀 눈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도 일단 상황을 조금 더 두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장모님의 행동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여자가 집에 쳐들어왔어요!

“이상한 여자?”

­그 사람 말로는 현오 도련님 대모라고 하는데요?

칸나의 입에서 ‘대모’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 번에 이해가 됐다.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기다려. 당장 갈게.”

­이 사람들, 문 따고 들어오면 어떡하죠? 시커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현오랑 너한테 해코지 할 사람은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내가 저번에 줬던 물건 잘 갖고 있지?”

­네에. 헉! 어, 어떡해요? 보안 직원을 누가 끌고 가요!

“괜찮으니까 침착하고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 거야.”

혹여나 돌발 상황이 있을 것을 예상해 몇 가지 호신용품 아이템을 칸나에게 줬었던 나다.

그럼에도 집에 현오와 칸나 둘만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곧장 아이템을 사용해서 집 근처로 이동했다.

칸나가 말했던 대로 우리 집을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들이 당당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역시나 짐작한 대로 최관씨였다.

“연락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무례한 방문이었기에 그녀를 보자마자 나오는 목소리가 결코 곱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형부.”

“…절 진짜 형부로 생각하셨으면 이런 무례는 안 저질렀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요?”

“그냥 문 앞에만 있었을 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자기가 마음만 먹었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배려해서 참았다는 것 같다.

“경호 업체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았다고 들었는데, 다 어디 있습니까?”

“잘 타이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체적인 위협은 가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우려했던 것처럼 경호가 시원찮더군요. 앞으로 경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신경 쓰겠습니다.”

막무가내로 찾아오더니 이젠 경호를 자기가 직접 신경 쓰겠단다.

“제가 알기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요.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밀고 들어오면 대충 넘어가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모 자리를 먼저 제안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자리에 맞게 최선을 다 해 조카님을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덤덤하게 하는 말들이 꽤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더욱이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던 게 더 있었다.

“그 캐리어에 든 건 뭐죠?”

“제 짐입니다.”

“지금 제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살겠다고 말하시는 중인 건 아십니까?”

최관씨는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담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내 집에 들어오겠다고 할 줄 몰랐다.

“이렇게 통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돌아가세요.”

“여기서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남의 집에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오겠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치곤 정말 뻔뻔했다.

“집에 들이고 싶지 않은데 어쩌죠?”

“그럼 근처에 적당히 조용한 카페를 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최관씨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집 안에 들이기로 했다.

저 검은 정장 입은 여자들과 우르르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힉! 데, 데리고 들어오시는 거에요?”

칸나가 빼꼼이 얼굴만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함께 집으로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나는 떨고 있는 칸나를 달래주고 현오에게 가 있으라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연주 누님 가족분들이셔.”

“아….”

칸나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최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기겁을 해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역시 짐작한 대로 칸나는 최관씨를 천적 만난 초식동물처럼 행동한다.

칸나를 보낸 나는 최관씨를 소파에 앉히고, 맞은편에 나도 앉았다.

“저분들은 안 들어오시네요.”

“여기가 어디라고 쟤네들을 함부로 들이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쟤들이 집에 들어올 때는 누군가의 습격이 있을 때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무례를 저지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미리 연락을 드리고 싶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최관씨가 무뚝뚝하고 감정 하나 묻지 않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사과를 했다.

장모님에게 서슴없이 무릎 꿇고 고개를 박았다고 해서 최관씨가 평소에도 사과를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정중하신 분이 그런 행동을 해서 더 실망스럽네요. 장모님이 이렇게 그냥 밀고 들어가라고 하시던가요?”

“아무리 형부라 해도 보스께 무례한 말을 하시는 건 참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서늘한 목소리가 귀에 박혀온다.

나는 내 실수를 인정하기로 했다.

최관씨를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과거의 나는 실수였고, 오산을 한 거였다.

‘물론….’

실수를 인정했다고 해서 내가 최관씨를 다루지 못할 거라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자기가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왔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인이 호랑이라 해도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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