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56. 호랑이 굴에 들어 온 호랑이 (5)
* * *
담배를 태우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나눴던 잠깐의 대화.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최관이라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슬슬 감이 잡혔던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장모님과 관련 된 얘기를 할 때 훨씬 생기가 돋고, 행복해 하는 사람.
‘보스를 어머니로 생각한다지만 좀 심하긴 하네.’
최관씨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는 했으나 장모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최관씨는 자기 인생이 없이 오로지 장모님을 위해 시간을 전부 사용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나로서는 더더욱 그녀의 희생이 가치가 있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애들 생각하는 마음인가 싶다가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태양, 현오, 지현.
어느덧 이 세계에 와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최관씨가 장모님에게 가지는 애정은 내가 아이들에게 갖는 애정만큼이나 깊고 짙을 것이다.
문제는 최관씨의 장모님에 대한 깊은 애정이 보답받기 어려워 보인다는 거다.
‘정확히 말하면 맹목적이지. 매달리는 쪽이기도 하고.’
최관씨를 가만히 보다보면 애정결핍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타인의 애정을 거의 받지 못할 때 생긴다는 이 병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애정 역시 과분하다고 생각해 불편해 한다고 들었다.
최관씨가 장모님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깍듯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진다.
더군다나 장모님의 성격상 최관씨가 주는 애정에 제대로 보답을 했을 리가 없다.
‘최관씨 성격도 만만치 않지. 장모님 외에 다른 사람의 관심은 거부했을 거야. 저 성격에 직업까지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니 접근해도 금방 떨어져나갔을 거고.’
그녀 스스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 하지 않아 모든 애정의 방향이 장모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빼앗아야 하는 상황인데….’
최관씨와 친해지는데는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하다보면 결국 나도 남들과 똑같이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끝날 거다.
그렇다면 애정결핍이 있는 것 같은 최관씨와는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
‘엄청나게 관심을 많이 주면 되려나?’
그녀와 함께 하는 대부분의 시간이 멤버들과 여러 사람들이 있을 때 뿐인지라 자주 말을 거는 건 힘들었다.
그렇게 자주 말을 건다고 해서 최관씨가 좋아할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짧고 굵직하게 들어가는 게 좋겠다.’
생각 정리를 끝낸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최관씨를 꼬시기 위해 움직였다.
최관씨가 처음부터 내 달라진 태도를 눈치 챈 건 아니었다.
억지로 핑계를 만들어서 말을 걸던 것을 멈추고 소소한 부분에서 그녀를 챙겨줬다.
흉터가 많은 그녀를 위해 연고를 슬쩍 손에 쥐어 준다던가.
그녀의 취향인 커피를 챙겨 준다던가.
그런 사소한 관심들에 최관씨도 슬슬 느끼는 게 있었는지 나를 부쩍 의식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보면 간혹 그녀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겨우 여기까지 왔네.’
상대방이 나를 의식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관계의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쩍 느껴지기 시작한 최관씨의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집요했다.
솔직히 어쩔 땐 뒤통수가 뚫릴 것 같이 뜨끈뜨끈하기까지 하다.
‘날 관찰하는 건가?’
어쩐지 내가 그녀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최관씨는 도저히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귀여운 동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나마 비슷한 포스를 가진 동물을 떠올리면 육식동물인 호랑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언제 기습당할까 뒤통수가 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느낌을 즐기기로 했다.
‘친해지는 과정이니까.’
그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서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었다.
워낙 감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변화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의 따끔따끔한 시선을 즐기다가 스케줄이 없는 날에 맞춰서 그녀에게 데이트를 제안했다.
대놓고 데이트를 제안하는 건 좀 그래서 나름 핑계를 댔다.
“아직도 현오랑 대면대면 하다면서요?”
처음 뵙는 장모님 품에 안겨도 울지 않고 배시시 웃곤 했던 현오가 유일하게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최관씨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사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현오가 배시시 웃어 줄 사람은 장모님이 아니라 최관씨어야 했다.
최관씨는 장모님으로부터, 혹은 누군지 모를 3자로부터 현오를 지켜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요놈이 부모 속을 썩이네.’
나는 오늘 현오와 최관씨를 친해지게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할 셈이었다.
“제가 인상이 좋지 못해서 대부분 싫어합니다. 아기는 더 그럴 거고요.”
“음…지금은 현오가 좀 거부감을 보여도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친해질 수 있을 거에요. 대모인데 이대로 대면대면할 순 없잖아요? 우리 스케줄 없는 날, 혹시 바쁘세요?”
“계획해둔 일이 없기는 합니다.”
“그럼 제 집에 놀러오세요. 관이씨가 있으니까 현오랑 같이 외출해보죠. 요즘 봄꽃이 잔뜩 피었던데, 현오한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저랑 둘이서요?”
“연주 누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날은 바빠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장님이 된 연주 누님은 긴 휴식기를 가졌던 게 한이 맺혔는지 일에 파묻혀 살고 있다.
아마 현오가 아니었다면 매번 야근을 하며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나마 내가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주고, 현오를 보고 싶어 해서 심할 정도로 일에 매몰 되어 살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과할 정도로 일에 시간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나는 누님이 가족들 때문에 자신의 일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돼서 최관씨를 유심히 살피니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이 상기 되어 있었다.
‘긍정적인 것 같은데?’
그동안 최관씨를 열심히 살펴 본 덕분에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봤자 매우 미세한 변화라서 나도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감정 변화가 워낙 뚜렷해서 표정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그것도 ‘매우 긍정적’ 이라는 결과를 말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 저한테도 웃어줄까요?”
“당연하죠. 현오가 그리 까탈스런 애가 아니거든요.”
연주 누님이 낳았는데 애가 너무 수더분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성격은 아무래도 날 닮은 것 같으니 최관씨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최관씨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너무 늦게 제안한 게 미안해진다.
저렇게 좋아 할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현오랑 친해지면서 저랑도 좀 친해집시다.’
나와 현오 모두 최관씨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좋다.
아무리 친해진다 해도 그녀에게 장모님보다 더 큰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이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데이트가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곧 최관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데이트’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관은 약속 날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와 한가하게 산책을 다닌다는 건 그녀 인생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둘만 가는 것도 아니고 조카님까지 껴서…?’
두근두근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의심할 바 없는 완벽한 가족으로 보일 것이다.
‘애기 엄마로 오해를 받으면 어쩌지?’
진짜 관계가 아니지만 평생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조연주의 자리를 잠깐이라도 자신이 차지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큰 의미로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상상.
아닐 수도 있는 일인데 최관은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시선이 옷장으로 이어졌다.
‘옷을, 뭘 입고 가야하지?’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아니, 그날이 특별하기를 바란다.
헌데 욕심이 과해서일까?
최관은 옷장을 열어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전부 검은색.’
평소에 자신의 옷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검은색의 단정한 옷은 거의 평생에 걸쳐 입어 온 옷이었으니까.
다른 색을 입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에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이다.
‘조카님이 날 무서워하지 않게 하려면 옷 색깔을 바꿔보면 될 것 같은데.’
검은색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최관은 잘 알았다.
그 옷들을 입고 수없이 피를 묻혀왔으니까.
‘그러니 그날은 다른 옷을 입는 게 맞아.’
조카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텐데 피 묻힌 옷을 입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렇게 스스로 자위하며 오랜만에 새 옷을 구매할 핑계를 만들어 보는 그녀다.
“어, 어서 오세요.”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내는 최관이 옷가게에 들어가자 직원이 당황하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검은색 옷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억지로 외면하며 직원에게 말했다.
“적당히. 아기가 무서워하지 않을 만한 색의 옷이 필요합니다.”
“아기…요?”
아기가 무서워하는 색이 따로 있단 말인가? 하는 눈치의 직원.
하지만 목적을 모두 말한 최관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옷가게 직원이라면 손님이 바라는 것을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요란스럽지 않은 스타일로.”
딱딱하게 목적을 모두 말한 최관이 팔짱을 꼈다.
직원이 옷을 가져오는 걸 지켜볼 셈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직원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최관이 말했던 ‘요란스럽지 않고 아기가 무서워하지 않을 만한 색의 옷’을 찾아 부지런하게 매장 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음, 제가 보기에 고객님은 쿨톤이세요.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이 들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돌거든요. 고객님 눈동자가 짙은 검정색이고 인상이 또렷하고 강한 편이니…!”
전문가인 직원은 당황스러움도 잠시, 곧 적극적으로 고객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애석한 것이 있다면 최관은 썩 좋은 고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고 말이다.
“됐습니다. 그런 건 관심 없으니 옷이나 가져오세요.”
“…네.”
직원의 말을 단호하게 끊은 최관이 다시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직원은 주섬주섬 옷을 가져와 최관의 앞에 보였다.
“장식이 너무 많은 건 안 됩니다.”
“저런 나풀거리는 걸 달고 다닐 순 없습니다.”
경호에 방해가 되는 옷은 거부되고.
그녀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은 장식 많은 옷들도 거부됐다.
상당히 많은 옷들이 최관의 손에 거부당하면서 직원도 오기가 생겼는지 꾸준히 옷을 가져다줬고.
“와! 너무 잘 어울리세요. 몸매가 좋으시니까 이렇게만 꾸며도 매력이 장난 아니시네요!”
데님 반바지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흰색 크롭 반팔티가 최종으로 선택 된 것이다.
슬림핏이라 은근히 속옷이 비치면서 섹시함도 어필할 수 있는데다 한참 봄이 찾아오고 있는 요즘과 참 잘 어울리는 스타일인 것이다.
최관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낯선 모습을 보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직원의 눈에는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옷이 정말 어울린다고?’
직원이 연신 감탄을 하지 않았다면 이 스타일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혼자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평소 입던 옷을 입었을 터.
최관은 거울을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 옷도 함께 계산합시다.”
혹시 몰랐기에 평소 그녀가 입던 검은색 옷까지 챙긴 최관이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옷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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