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8화 〉 #57.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방법 (2)
* * *
해솔이가 작곡을 할 때 영감 받는 방법.
방법이 워낙 황당해서 의심이 들긴 했지만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해봤다.
마침 해솔이가 옆에 있는데 안 해보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영감은 무슨.’
자신과 안 맞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가 주는 쾌락에 정신없이 느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날 아침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어이없었던 건 해솔이가 그렇게 해서 정말 영감을 받아버렸다는 거다.
비죽
아현의 입술이 삐죽삐죽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해솔이의 재능에 질투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숨길 수 없는 감정은 있다.
‘부럽다.’
곡 하나를 만들 때에도 고통 받아야 하는 자신과 달리 편하게 작곡하는 건 부럽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좋아, 다시 해보자.”
해솔이에 대한 부러움을 억지로 꾹꾹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를 질투한다고 해서 자신의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그나마 그가 자신을 찾아와줘서 우울했던 마음이 많이 편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이야 말로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도해 봐야 할 때인 것이다.
호기롭게 의자에 앉았다.
어제의 여파로 그 부분이 얼얼하긴 했으나 오히려 그 감감이 그녀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어줘서 나쁘지 않았다.
“음….”
깜빡 깜빡
눈동자를 깜빡인다.
손을 건반 위에 올려 두어봤다.
“으으음….”
일단 손이 가는대로 움직여보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멜로디를 만들었다.
손이 점차 풀어지고, 유려한 멜로디가 만들어진다.
익숙한 멜로디를 시작으로 조금씩 톡톡 튀는 리듬이 나왔다.
“이 부분 좋은데?”
아현이 씨익 만족스레 웃고 그 리듬을 재차 쳐봤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10분…20분…30분….
계속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하나의 멜로디에서 더 발전을 하지 못한 아현이 결국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기분이 나아졌다고 해서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던 거다.
“달라진 게 없네. 내가 그렇지 뭐.”
작업실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현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숨이 트일 것 같았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또 다시 시작 된 멜로디.
하지만 좀처럼 멜로디가 앞을 향해 나아가질 않는다.
아현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녀의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이 끼어들었다.
‘어제 진짜 좋았어.’
해솔이의 향기.
누구에게도 맡아 본 적 없는 그만의 특별한 향기가 있었다.
지금 해솔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그 향기를 다시 한 번 맡고 싶었다.
해솔의 향기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의 땀 냄새도 떠오른다.
킁킁
해솔이의 향기가 작업실에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괜스리 아현은 킁킁거리며 주변 향기를 빨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인위적인 디퓨저 향기만 난다.
해솔이는 땀 냄새조차도 향기로운데, 어쩐지 그보다 더 향기로워야 할 디퓨저 향기가 고약하게 느껴졌다.
변태 같지만, 아현은 솔직히 해솔이의 땀 냄새가 작업실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솔이가 땀을 흘릴 때는...내 위에 올라탔을 때지.'
꿀꺽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울린다.
어젯밤 자신의 아랫배가 해솔의 '그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 감각이 다 사라지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고, 텅 비어버린 자리가 애석했다.
‘분명 어제 다 풀었는데….’
슬그머니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아현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올려놨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게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무 건반이나 마구 눌러버렸다.
‘어제 해솔이랑 뜨겁게 보냈잖아.여기서 또 자위를 하는 건…너무 변태 같은 짓이야.’
남자 못 만나는 많은 여자들이 알았으면 있는 년이 더 한다며 욕을 퍼부을 행동이었다.
아현은 차오르는 성욕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면서도 아현은 해솔이를 최대한 빨리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 애가 점점 잘 생겨져. 거기서 더 잘생겨질 수 있나 싶었는데….’
그녀의 친구들은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오래 만나면 질린다는데, 신기하게도 해솔이와 만난 아현은 한 번도 질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만나면 항상 가슴이 떨렸고, 행복했다.
참 신기하게도 말이다.
'봐도봐도 잘생겼을 걸 어떡해.'
처음 만났을 때도 이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잘 생겼었는데지금은 심심치 않게 CG설이 돌고 있을 만큼 잘 생겨졌다.
그런 걸 보면 타고 난 미모가 가장 중요한 것임이 확실하다.
아무리 해솔이가 주는 화장품으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해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체력이 좀 떨어지면 뾰루지가 생기곤 한다.
특히 아현은 귀찮아서 해솔이가 준 화장품을 가끔 까먹고 안 쓰기도 한다.
그런데 해솔이는 단 한 번도 못 생겨진 적이 없었다.
피부도 완벽하고, 몸매도 완벽했다.
“심지어걔는 털도 예쁘게 나잖아.”
아무리 사람이 아름다워도 털은 털인 법.
해솔이도 털이 나야 할 장소에는 난다.
문제는 그렇게 난 털조차도 해솔이라서 그런지 예쁘다는 거다.
그때, 상념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메시지 소리에 아현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휴, 또 딴 생각 했네.”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긴 했지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친 피아노가 제대로 된 멜로디를 만들어냈을 리 없다.
그녀는 녹음하던 것을 끄고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로즈언니 : 이따가 작업실 들린다.]
학원 안에 있는 작업실이라서 로즈 언니가 수시로 드나드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현은 로즈 언니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뺨을 짝짝 때린 후, 찬물로 세수까지 하고 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로즈 언니가 아현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밥은 먹었어?”
“아직요”
“넌 항상 안 먹는다?”
“그래서 언니가 매일 가져다주잖아요.”
“허참! 요 영악한 꼬맹이.”
아현이의 애교 섞인 말에 밉지는 않았는지 로즈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가져다 준 샌드위치와 커피를 냠냠 먹었다.
배가 든든해지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역시 카페인. 카페인 없으면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커피가 대단하긴 하지.”
원래 달달한 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메리카노만 마시기 시작했다.
이걸 먹어야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해솔이 만났지?”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의 순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찾아와 준 상황인지라 뜨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생색내려는 건데, 내가 찾아가 보라고 했거든.”
“앗! 정말요?”
“그럼 일하느라 바쁜 걔가 네 상태를 어떻게 알고 왔겠어.”
“와~ 엄청 감동이에요.”
아현은 자신의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 싶으면서도 이런 배려를 해준 로즈 언니가 너무 고마웠다.
“고마우면 나중에 커피 한 잔 사.”
“네!”
“그래서 상태가 좀 어때졌어? 어제 해솔이가 제대로 하고 간 거 맞아? 애 피부가 뽀송뽀송해진 거 보면 화끈한 밤 보낸 건 맞는 것 같은데.”
“행복하게 보내긴 했어요.”
“곡은?”
“어…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감이 안 잡혀? 그냥 네가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고?”
“아니에요. 슬럼프라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슬럼프는 다들 한 번씩 경험하곤 하잖아요. 그래도 해솔이가 와줘서 기분은 정말 많이 나아졌어요. 해솔이 아니었으면 오늘도 우울하게 있었을 걸요?”
신경 써줬는데 소용이 없었다고 하면 서운할까봐 자기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는 것을 어필했다.
하지만 여전히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임을 직감한 로즈가 말했다.
“오늘 작업한 거 있어?”
“…아뇨.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빨리 곡을 못 만들어요.”
“그래도 오늘 작업한 건 있을 거 아냐. 들려줘. 내가 보니까 너 내 노래 구려병이야. 그거 한 번 걸리면 답 없어. 그럴 땐 주변 사람들한테 노래 들려주고 피드백을 받아서 자신감을 되찾아야 돼.”
“아….”
오늘 하루 종일 작업실에 있었지만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든 건 하나도 없었다.
작업한 게 없으니 보여줄 것이 없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로즈는 그것조차도 괜찮다며 뭐든 다 들려달라고 말했다.
결국 아현은 요 근래 작업했던 것을 들려주기로 했다.
싫다고 거절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싫었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서 해솔이를 불러주고, 또 이렇게 찾아와서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 로즈 언니만의 ‘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로즈 언니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게 결코 싫지 않았다.
“흐음…나쁘지 않은데?”
합쳐지지 않은 미완성의 멜로디들이 이것저것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현의 얼굴이 화끈화끈 열꽃이 피어오른다.
“괜히 저 위한다고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전부 엉망진창인데….”
“내가 거짓말로 안 괜찮은 걸 괜찮다고 하진 않아. 미완성본이라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는 거야.”
로즈 언니의 말이 영 믿기지 않았던 아현이 삐죽 입술을 내민 채 다음 녹음곡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녹음은 로즈 언니가 작업실로 오기 전, 야한 생각을 했을 때 마구 건반을 놀렸던 녹음본이었다.
“아…! 이건 아니에…어?”
그녀의 손으로 만들었다기엔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어딘가 끈적끈적하고, 숨통을 콱! 막히게 만드는 쫀득쫀득한 멜로디.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지는, 꿀렁거리는 리듬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뭐야, 역시 내 노래 구려병이잖아! 너는 이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섹시 컨셉으로 팔면 당장 사겠다고 허니 엔터에서 달려들 곡을?”
로즈 언니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아현은 믿을 수 없는 멜로디에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귀를 손가락으로 후볐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건지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이게 제가 만든 멜로디에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어, 어디서 들어 보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이게 딴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친 거라서….”
“뭐야, 너도 천재였네. 해솔이가 작곡하는 방법이 부럽다더니, 너도 똑같잖아.”
아현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이게 왜 이렇게 좋은 거지?
만약 로즈 언니가 곡을 들려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녹음본을 확인도 하지 않고 삭제했을 것이다.
그걸 떠올려보니 뒷골이 서늘했다.
“언니…언니!!!”
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즈의 품으로 안겼다.
“고마워요! 언니 아니었으면 이거 확인도 안 하고 삭제해버렸을 거에요!”
“내 덕분이라는 거야?”
“네!! 언니가 아니었으면 제가 이걸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을 걸요?”
“도대체 뭔짓을 하고 있었길래 이런 걸 만든 줄도 몰라?”
“!!”
로즈 언니의 말에 아현이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해솔이와 지난밤 보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고.
‘헛! 그러고 보니까 해솔이가 영감 받는 방법이라는 게 이런 거였어?’
변태 같은 생각을 하며 저절로 손이 움직였는데, 이런 곡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아현이가 작곡했던 방식과 180도 다른 방법이었고, 곡의 분위기도 굉장히 달랐다.
“이제 그럼 슬럼프 끝인 건가? 내가 준비했던 선물이 성공적으로 먹힌 거지?”
“…네. 맞아요. 언니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그럼 나한테 잘 해. 요 녀석아.”
친해져서 그런지 자꾸 자신과 맞먹으려 한다며 로즈가 아현을 흘겨봤다.
하지만 그 부분은 아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부터 아현은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앵기고 투정 부리는 걸 좋아했으니까.
“언니이이!!!”
자신이 슬럼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건 깨달은 거고.
고마운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슬럼프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고, 작곡가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 찼던 아현이 아닌가?
계속 이 상태가 유지 됐다면 꽤 심각한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 곡, 어떻게 할 거야? 허니 엔터에 팔 거니?”
“어…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이번에도 우리 학원 학생한테 가이드 시켜도 될까?”
로즈 언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해준 바가 있기에 아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그 정도야 당연히 되죠!”
로즈 언니가 추천해주는 학원생들의 실력은 프로에 버금가는 정도이다.
인선을 믿고 맡겨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현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헤실거리다가 로즈가 되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멜로디를 다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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