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 #57.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방법 (4)
* * *
메이 린이 싱긋 웃으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잘 생겼네요. 해솔씨는.
메이 린씨.
서로의 손이 하나로 맞잡은 순간.
전기가 찌릿! 하고 오는 것 같이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좀 더 날카롭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소속 된 그룹이 해외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이,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안나가 자기 브랜드를 런칭한 것처럼, 그녀도 예전보다 더 유명하고 업계에서 순위권에 이름 올릴 만한 명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실 나와 만나고 있을 때는 동양인만 찍는다는 이유로 실력에 비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았으니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 린은 친분 있는 지인으로부터 부탁을 받게 된다.
유명한 서양 여배우를 찍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서양인을 잘 찍지 않는 메이 린이지만, 친구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들었고, 그때 찍었던 사진이 엄청난 화제를 모으면서 메이 린의 이름이 서양 쪽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동양인만 찍지 않았더라면 진작 얻었어야 할 유명세이긴 했다.
워낙 실력이 좋으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
메이 린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내년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잘 나가는 포토그래퍼가 된 것이다.
개인 촬영부터 들어가죠. 먼저 준비 된 순서대로 할게요.
메이 린과 나는 오랫동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워낙 많기도 했으며, 곧 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중후한 멋이 나는 정장과 포머드 스타일의 헤어를 해 널직한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상태다.
가장 먼저 촬영을 시작한 건 제키.
다음으로 강준이 촬영을 했고, 경태 형 다음이 내 차례였다.
“형형! 어땠어요?”
“진짜 다르긴 달라.”
촬영을 끝내고 돌아 온 준이가 우연의 질문에 소감을 말했다.
“다르다고? 어떤 부분이?”
“예전에도 잘 찍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더 잘 찍으셔. 똑같은 포즈라도 저분이 찍어주신 사진은 좀 다른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 형 찍은 거 볼 걸!”
“네 거 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게 될 거야.”
예전에 메이 린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게 떠오른다.
이름값 높은 사진작가와 작업하는 게 처음이어서 꽤나 고생했었지.
포즈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냐며 굴욕을 당했고, 표정이 그게 뭐냐면서 거울 보고 연습하고 오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 기억이 마냥 굴욕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결국 그녀가 카메라 셔터를 가장 많이 누르게 만든 게 나였던 걸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험이 없었던 예전의 내가 아니지 않은가?
다음 차례는 해솔씨인 가요?
네.
준비 됐어요?
물론이죠.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이쪽에 서볼까요.
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화려한 조명이 내리쬐고 있는 공간에 홀로 우뚝 섰다.
나는 능숙하게 포즈를 잡았다.
그녀는 카메라에 집중한 채로 말했다.
많이 능숙해졌네요?
찰칵
괜찮은가요?
훨씬요. 사실 에어플레인과는 다시 한 번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른 이유는 아니고, 풋풋했던 모습을 찍어봤으니 지금처럼 푹 익어 있을 당신도 찍어보고 싶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뀌는 변화가 참 좋더라고요.
제가 당신 바램을 충분히 만족 시켰나요?
물론이죠. 눈빛부터 깊어졌어요. 얼굴에 어림이 사라지고 한 명의 남자가 되었으니까요. 옷 좀 살짝 풀어볼까요? 팔도 좀 걷어보고. 거기! 가서 좀 도와줘.
네.
스태프가 쪼르르 달려와 내 옷을 다듬어주었다.
옷을 흐트러트리면서 자연스레 내 피부가 노출이 되자 스태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까이에 있는 나는 스태프의 변화를 알아봤지만, 메이 린은 자기가 찍은 결과물을 살펴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사해요.
뭐, 뭘요. 다, 당연한 건데…헤, 헤헤.
꿀꺽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들렸다.
스태프의 눈이 부지런히 내 살결을 향하고 있음을 안다.
이런 눈빛이 어디 그녀 혼자만의 것일까.
이보다 더 음흉하고, 질척이는 욕망이 담긴 눈빛은 심심치 않게 받아오곤 했다.
심지어 서양에는 공연 중에 자기가 입던 속옷을 던지는 게 문화인 곳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연 문화였지만 이들 나라의 특색이라고 해서 싫은 티도 못 낸다.
스태프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는지 한참 머뭇거리다가 기어코 메이 린의 매서운 시선을 받았다.
뭐하는 거야? 다 했으면 내려와!
힉! 네, 네!
스태프가 단숨에 깨갱하고 도망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 한 메이 린이 입술을 짓이기며 다른 스태프에게 물었다.
저년 누가 데려온 거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한 달 전에 새로 뽑은 신입이에요. 손이 야무져서 믿고 맡긴 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당장 이 촬영장에서 꺼지라고 해.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전하고.
네.
메이 린이 잠깐 쉬었다 가자며 촬영을 끊었다.
다들 20분 정도 쉬다가 와.
네, 작가님.
아마 20분이라는 쉬는 시간은 방금 깨갱하고 도망 친 스태프가 처리 되는 시간일 것이다.
메이 린이 카메라를 놓고, 내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불쾌했죠?
익숙해서 괜찮아요.
이런 일에 익숙해지는 건 좋지 않아요. 부당한 일을 당하면 바로바로 항의를 해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하는 거에요. 본인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권리를 찾아주려 하지 않을 거에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근데 이런 거에 일일이 다 반응을 하면 아마 전 일을 못 할 걸요? 저 스태프분은 그나마 예의 있는 쪽에 속하는 거에요. 일 핑계로 제 몸을 더듬지는 않았으니까요.
만약 일부러 내 몸에 손을 댔다면 지금처럼 스태프를 위해 옹호의 말을 해주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니 과할 정도로 처분을 받는 건 좋지 않았다.
‘솔직히 그 정도 훔쳐보는 건 본능이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
여자의 몸을 슬쩍슬쩍 훔쳐보는 남자의 마음과 스태프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기에 너그럽게 봐주고 싶었다.
당신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저런 애를 내 스태프로 두고 싶진 않아요. 이런 일을 할 땐 더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인데 그걸 어겼으니까요.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거나 다름없다는 게 메이 린의 주장이었다.
나도 나 때문이 아니라 스태프가 자격을 잃는 행동을 했기에 해고당하는 것이라면 굳이 더 옹호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까지 날 시선으로 희롱한 스태프를 옹호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은 제가 참견할 게 아닌 것 같네요. 마음대로 하세요.
좋아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내 스태프가 저지른 무례한 태도를 너럽게 봐줘서 고마워요.
전 이미 잊었습니다.
다소 복잡해질 수 있는 상황을 우리끼리 합의한 끝에 소란이 일지 않게 해결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멤버들과 매니저 누나에게 상황이 전달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저한테 미안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으면 빨리 촬영부터 시작해주실래요? 멤버들이 소식을 들었는지 저쪽에서 시선으로 제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이 쳐다보고 있거든요.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메이 린은 내가 혹여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까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스태프가 저지른 일로 아무런 타격도 없었던 나한테는 불필요한 배려였다.
다시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 ?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솔직히 걔 마음이 이해가 돼.”
“쉿! 그러다가 작가님한테 혼나.”
“걔가 그렇게 남자 밝히는 애가 아니었잖아. 평범했다고. 근데 저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데 어떻게 참아? 나라도 훔쳐봤을 걸?”
“그래도 참았어야 지. 작가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였잖아. 나였으면 꾹 눌러 참았을 걸? 그리고 걔 때문에 작가님이 사과까지 하셨어. 그런데도 옹호하는 말이 나와?”
“…시발 정말 저 얼굴을 보고 참을 수 있다고? 네가?”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동료 직원이 촬영 현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직원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쨍쨍한 조명 아래에, 절로 침을 삼키게 만드는 섹시한 남자가 도도한 표정으로 멋드러진 자세를 잡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찍고 있었다.
사실 이미 한참 전부터 주변 스태프들이 촬영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홀려 있는 상태였다.
보정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잘 생길 수가 있지? 난 솔직히 사람들이 CG 아니냐고 할 때마다 웃었거든. 저런 스타일은 카메라가 사기 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미남으로 소문난 스타가 정작 촬영 날 피부가 뒤집어진 채로 와서 빡세게 보정을 해야 했던 일이 한 두 번인가?
메이 린 작가의 스태프들은 미남에 대한 환상이 거의 벗겨진 상태였다.
싸가지 없는 미남, 애인지 어른인지 구분이 안 되는 미남, 두꺼운 화장으로 변장을 한 미남 등등.
그런데 진해솔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순간, 그녀들은 하나 같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미남은 실재한다!!!!!!!!!’
카메라가 다른 의미로 사기를 치고 있음을 깨달은 그녀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크게 한탄했다.
“어떻게 카메라에 담기는 게 반도 못 될 수가 있어? 해솔씨는 엄청 억울할 거야. 자기 얼굴이 맨날 못 생긴 채로 화면에 담겨지니까.”
“우리 작가님이라면 실물도 담을 수 있을 걸?”
“암암, 우리 작가님 아니면 누가 저 얼굴을 담을 수 있겠어. 근데 사진 작가 입장에서 마냥 편한 얼굴은 아닌 것 같아.”
아무리 잘 나가는 포토그래퍼라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순 없다.
그런데 진해솔은 이미 완벽한 ‘유’가 존재하기에 그 ‘유’를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 됐다.
다만 얼마나 ‘유’를 카메라에 차이가 없도록 담았는지가 문제였고, 실력이 고스란히 뽀록이 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어흑!”
“미쳤다. 미쳤어.”
“오늘은 이거구나…!”
“너도 잘리고 싶어? 말조심 좀 해. 속으로 하라구, 속으로!”
“크흑, 심장 터질 것 같아.”
여태까지 중후한 미남으로 어른스러운 포즈와 표정을 짓고 촬영을 하던 해솔이 메이 린 작가님한테 무언가 말을 듣더니 그에 따르듯 장난기가 가득 담긴 소년처럼 웃었다.
그 미소가 스태프들의 애간장을 다 녹여버리고 말았고, 한동안 촬영장은 조용히 술렁거렸다.
이미 스태프 하나가 무례한 행동으로 나가리가 된 상태여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흥분한 스태프들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란을 일으켜 당사자의 귀에 들렸을 것이다.
스태프들이 촬영을 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음을 모르는 당사자는 마지막 피날레로 섹시하게 고개를 비트는 포즈를 취했다.
그 섹시한 모습에 직원들의 가슴이 또 다시 크게 울렁였다.
그리고 저런 황홀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메이 린이 아주 바쁘게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작가님이 저렇게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시다니. 저런 모습은 그때빼고 처음인 것 같은데.'
동양 한정 작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던 메이 린 작가가 서양인도 잘 찍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던 그때 그 화보.
그때 함께 작업을 했던 직원은 빠르게 눌려지는 셔터음 소리가 마치 그날 작업을 했을 때 보여주었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 린 작가를 존경하기에 그녀의 스태프가 되어 일하고 있는 직원이 대부분인지라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여줬을 때 나오게 될 작업물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특히 티를 내진 않아도 직원들 사이에선 에어플레인의 팬이 존재했기에 메이 린 작가의 결과물에 더 기대가 모아지고 있었다.
이런 직원들의 바램을 알아서일까?
촬영장의 셔터음은 개인 촬영이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에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직원들 모두 메이 린 작가님이 촬영에 100% 집중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최선을 다 해 그녀를 보조했다.
'뭔가 엄청난 게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야.'
스태프들은 촬영 내내 두근대는 심장을 다독이지 못하며 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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