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84화 (384/849)

〈 384화 〉 #57.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방법 (8)

* * *

메이 린과 뿌듯한 재회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그녀에게서 메모리 카드를 받아 언제든 소환이 가능하고, 나만 열어 볼 수 있는 USB를 코인으로 구매해 파일을 옮겼다.

‘흔들린 사진이 많네. 흠흠.’

그녀가 이걸 찍을 때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를 수가 없는 사진들이다.

초반부는 초점이 잘 맞춰져서 찍혔는데 후반에는 흔들려서 제대로 찍히지 않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워낙 실력이 좋은 사람이다 보니 아예 건질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뉘집 아들인지 몰라도 참 섹시하게 잘 생겼구만. 껄껄!’

여자들이 이 사진을 보면 코피가 터질 거다.

어쩌면 남자도...에헤이!

아무튼 홀딱 벗고 섹스하고 있는 내 모습은 스스로가 봐도 무척 섹시했다.

토 나오게 남자가 섹시해서 뭐하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응, 아니야. 봐도봐도 안 질려.’

성별을 따지지 않은 외모라는 게 뭔지 알고 싶으면 내 얼굴을 보면 된다.

그리고 이런 얼굴을 가졌는데 나르시즘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과거에 평범하게 생겼었던 기억이 있기에 현재 내 얼굴에 대한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

스스로 잘 생겼다는 걸 자각하고 있고, 그럴 수 있어서 행운이라 여긴다.

‘그건 그렇고, 전부 내 사진밖에 없네.’

예전에 찍었던 사진에는 조안나가 껴 있어서 사진들이 거북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사진 속에 찍힌 내가 섹시한 건 섹시한 거고, 나 혼자만 나온 사진을 계속 보려니 금방 흥미가 식는다.

‘역시 다음에는 조안나를 불러서 해야겠어.’

이건 내가 변태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메이씨도 동의한 일이다.

생각해봐라.

혼자서 나를 감당하려 하면 나 때문에 사진을 못 찍는다.

그런데 조안나가 있으면?

그땐 메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거다.

'조안나도 긍정적이었어. 먼저 다 같이 만나자고 했으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조안나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셋이 함께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을 팠다.

그리고 조안나에게 메이씨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니 엄청 기뻐하더라.

[세최디자이너 : 그럴 줄 알았어. 진작 그럴 것이지~! 괜히 애 태우긴. 우리 셋이서 뭉치자!]

조안나도 우리 셋이서 다시 뭉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셋 모두 기대하고 있는 만남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봐야 할 것 같았다.

메시지함을 흐뭇하게 확인하고 끄려던 순간.

'아직도 연락이 없네.'

나는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아현이의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복순 누나한테 물어봐도 별 일 없다고 하는데, 왜 나는 별 일이 있을 것 같지?’

이렇게 오랫동안 아현이한테 연락이 없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단언컨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아현이는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연락을 해줬었다.

딱히 할 말이나 용건이 있어서 연락하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점심 꼭 챙겨 먹으라거나 어디어디 프로그램 나온 거 봤다면서 잘 찍혔는지 알려주거나 하는 소소한 대화들이었다.

아현이의 그런 연락들이 나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뚝 끊기니 금방 빈자리의 티가 났다.

‘걱정 되는데. 역시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복순 누나는 아현이와 자주 만나더니 거의 자매처럼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인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아현이가 부탁을 하면 마지 못해 들어주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슬럼프를 경험했다가 내가 쓴 아이템으로 극복을 한 아이다.

혹여나 다른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건 아닐지 신경이 쓰여서 도통 다른 일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신경 쓰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메이 린과의 일이 해결 됐으니 편해야 하는데, 아현이도 그렇고 최관씨도 그렇고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사람이 계속 생긴다.

'아현이도 아현이지만, 최관씨 일도 심각한 것 같은데.'

내 옆을 지켜야 하는 경호원인 최관씨는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다.

메이 린과 작업을 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집을 지키고 있는 경호 인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만 갑자기 쏙 빠져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연주 누님이 하는 말에 따르면 장모님 쪽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곳 일을 처리하느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한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던 최관씨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낮고 살벌했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짐작했는데, 연주 누님까지 나한테 구체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됐다.

‘심각한 일이면 나한테 부탁을 해도 될 텐데….’

연주 누님은 내 특별한 능력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니 정말 심각하고 큰일이라면 나한테 털어놓는 게 훨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임을 알 것이다.

‘부탁하는 게 부담스러운가?’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다.

그녀가 내 능력을 이용할까 걱정이 돼서 말하기 꺼려 해놓고, 정작 이런 상황이 되니 누님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게 서운해지는 것이다.

연락이 없는 두 사람.

아현이와 최관씨의 일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 ? ?

아현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작업물을 보며 믿을 수가 없어 스윽 눈가를 옷소매로 닦아냈다.

며칠 째 작업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그녀는 무려 100곡에 가까운 작업물을 만들었다.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리숙한 작업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다른 회사에 팔 수 있을 만한 퀄리티의 곡들이었다.

슬럼프로 고생을 하다가 갑자기 곡이 미친 듯이 잘 써질 줄 누가 알았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정말 해솔이와의 섹스가 작곡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 아현이다.

“아직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머리가 텅텅 빌 정도로 뽑아낸 곡들.

아현은 100곡에 가깝게 쌓인 작업물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조해졌다.

갑자기 찾아 온 이 압도적인 영감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초의 심지가 얼마나 긴지 모르니, 다 타기 전에 모든 영감을 쏟아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가 며칠 째 작업실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루만 더 할까?”

배는 채웠다.

이번에도 역시나 로즈 언니가 가져다 준 죽으로 말이다.

로즈 언니가 아니었다면 결국 배가 고파서라도 밖으로 나갔어야 했을 거다.

아현은 작업이 끝나면 로즈 언니에게 꼭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는 멜로디가 있었다.

‘이게 천재가 생각하는 세상인 걸까?’

이런 경험을 한 이상, 아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만들고 있는 곡을 전부 팔고나서 은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감각을 경험해놓고 어떻게 평범하게 곡을 쓰겠는가?

‘탈 수 있을 때까지 전부 쫙쫙 뽑아야 돼.’

예술가가 마지막 혼을 불태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고, 그래서 아현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다는 것을.

한 자리에 앉아서 한 시도 쉬지 않고 머리를 쓰는 것은 생각보다 큰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작곡하는 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현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진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무거운 것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 주는 것이라 철썩 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이번에는 이 멜로디를 중심으로…해서….”

똑…또옥…똑!

“어?”

아현이 황급히 자신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콧물이 흐른 줄 알았는데, 손을 확인하니 비릿한 피가 묻어 있었다.

‘또 코피네.’

코피가 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익숙하게 근처에 있는 휴지를 찾았다.

처음 코피가 난 전 3일 전 새벽이었고, 그때부터 꾸준히 코피가 찾아왔다.

‘헤헤, 나 진짜 열심히 일하고 있네.’

계속 코피가 나면 문제가 있구나 생각하고 조심을 해야 하는데, 아직 어려서 건강의 중요성을 모르는 아현은 자기가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로 코피가 났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몸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어…어?”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고.

“아…왜 이러지?”

속이 울렁거리면서 현기증이 난다.

그걸 꾹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현이의 몸이 비틀거리면서 휘청거렸다.

그리고.

쿵!

큰 소리와 함께 아현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기회는 준비 된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 했던가?

준비 되지 않은 아현이 분에 넘치는 기회를 얻게 되고, 욕심을 부리면서 좋지 못한 결과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오늘은 작업을 그만하고 집에 가서 쉬기로 로즈와 약속을 했던 아현이 제대로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하기 위해 로즈가 작업실에 들렸다.

그때까지도 아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덕분에 로즈는 바닥에 쓰러진 아현을 발견하며 대경실색했다.

다급하게 사람이 쓰러졌음을 119에 알린 로즈가 아현과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다.

로즈는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현이의 어머니와 해솔에게 연락을 넣었다.

“일하고 있는 너한테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너한테 숨길 순 없을 것 같아서 연락했어.”

­무슨 일인데요?

“…아현이가 지금 병원에 있어.”

­네?!

해솔이의 목소리가 금세 낮게 가라앉는다.

로즈는 내가 왜 걔 대신 이래야 하나 한숨이 나오면서도 변명조로 말했다.

“걔가 이번에 슬럼프가 세게 왔었잖아? 네가 달래주고 돌아가서 신 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무섭게 곡을 쓰기 시작했어.”

­잘 된 거잖아요. 근데 왜 애가 병원에 있다는 거에요?

“그래, 처음에는 그랬지. 우리도 슬럼프에서 벗어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얘기도 했었고. 그런데 애가 조절을 못했어. 내가 따끔하게 말해서 그만하라고 말렸어야 했는데, 슬럼프를 경험했던 애라서 말리기가 쉽지 않았거든.”

아현의 눈빛이 너무 필사적이라서.

그래서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걸 막았다가 지금과 같은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내 잘못이야.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방치한 거야.”

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나온다.

로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 병원이에요? 당장 갈게요.

“너 스케줄은?”

­…잠깐 휴식하기로 했어요. 말해서 30분만 더 밀어볼게요.

다른 사람이라면 30분 만에 병원에 오겠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겠지만, 해솔은 그게 가능하다.

로즈는 병원이 어디있는지 알려줬고, 해솔은 10분 정도 흐른 뒤에 병원에 도착했다.

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아는 척을 해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로즈는 해솔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나 왜 울지?”

애를 낳았을 때도 독하게 울지 않았는데.

아현이랑 알게 모르게 쌓인 정이 굉장히 깊었던 모양이다.

“많이 놀랐을 테니 그럴 수 있어요.”

해솔은 울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걔는 진짜…나이가 어려서 그렇다는 건 아는데…하…내가 제대로 따끔하게 혼내고 쉬라고 했어야 하는 게 맞았던 걸까?”

로즈가 횡설수설 해솔에게 속에 있는 마음을 털어놓는다.

해솔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크게 놀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아현이한테 가줘. 네가 옆에 있어야 금방 회복할 거야. 네가 우리 피로 회복제잖아.”

겨우 30분 정도 시간을 낸 해솔이다.

자신에게 금보다 귀한 시간을 쓰게 할 순 없었다.

아파서 병원에 온 사람은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의 말에 순순히 해솔이 아현에게로 움직였다.

아현은 병원으로 실려와 조취를 받자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병원에선 푹 자는 게 회복을 돕는다며 링거를 맞으면서 한숨 자라고 한 상태였다.

“설마 벌써 잠들었나?”

커튼을 걷고 침대를 확인하니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아현이 보였다.

창백하던 얼굴색이 좀 돌아 온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로즈가 자리를 비켜주자 해솔이가 아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준 것들도 안 먹었나봐요. 그거라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으면 이렇게 쓰러지진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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