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 #57. 슬럼프에서 탈출하는 방법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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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쪽 빠져서 반쪽이 되어 있는 아현이를 보니 참담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내가 준 건강제 하나를 못 챙겨 먹고 이 사단이 났나 싶었다.
아현이의 옆에 서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복순 누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내가 애를 잘 보살폈어야 했는데 미안해.”
“누나가 왜 미안해요? 그러지 마요. 잘못 없으니까.”
복순 누나가 아현이를 챙겨야 한다는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아현이가 미성년자는 아니지 않은가?
“과로로 쓰러졌다고 했죠?”
“응.”
“무리해서 작곡을 하다가 이렇게 된 거고요.”
“며칠 내내 작업실에서 살았어. 밥도 내가 챙겨줘야 겨우 먹었고.”
하루 종일 작곡에 집중한 것도 아닐 텐데, 왜 내가 준 약도 챙기지 않았던 걸까?
그냥 건강 보조제 챙겨 먹듯이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기만 하면 몸속에 필요 영양분이 모두 채워지는데 말이다.
영양분이 채워지는 것뿐인가?
쉽게 병들지 않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늙은 것까지는 커버하지 못해도 병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가 준 아이템이 문제였을까.’
자기 몸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일에 집중할 줄 몰랐다.
슬럼프로 고생했던 경험 때문에, 갑자기 찾아 온 영감이 금방 달아날 거라 생각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템을 썻다는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걸 그랬다.
‘푹 자고 일어나면 알게 되겠지. 여태까지 얻은 영감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영구적이라는 걸.’
아이템 효과가 너무 좋으면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이미 아이템 때문이라고 털어놓기엔 시기가 늦었다.
아현이가 깨어나면 몸이 회복할 수 있게 돕고, 따끔하게 혼을 낸 뒤 규칙적으로 작업을 하도록 약속을 시켜야겠다.
“눈 뜬 건 못 볼 것 같네요.”
아현이의 곁을 지킨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 지나있었다.
촬영 중간에 나온 것이기에 서둘러 돌아가봐야 했다.
나를 찾는 사람이 나오면 큰일이니 말이다.
“응. 내가 왔다 갔다고 전해줄게.”
“아현이 깨어나면 이거 챙겨 먹여주세요.”
“링거 맞고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뭘 산 거야?”
“걱정 돼서요. 이래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 같아요.”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복순 누나에게 아이템을 건네주고 무거운 마음으로 촬영장에 돌아왔다.
“해솔씨 오셨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딱 맞춰서 오셨어요. 지인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면서요. 괜찮대요?”
“다행히 큰 문제없이 과로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어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근데 과로도 무시하다간 큰일 날 수 있어요.”
처음에 복순 누나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 걸 듣고 아현이에게 큰 사고가 난 건가 싶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물론 과로로 쓰러진 지금도 많이 놀라긴 했다.
다만 코인 아이템으로 관리를 받고 있는 아현이 설마 과로로 병원에 실려 갈 거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제 친언니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병원을 꾸준히 다녔거든요. 그래서 지인이 아프면 어떤지 잘 알아요.”
촬영이 곧 시작 될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시간을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인이 쓰러졌음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프로그램의 MC와 제작진 모두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그렇게 30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졌다.
요긴하게 쓴 30분의 시간.
아현이에 대한 걱정은 접고, 지금은 촬영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가족 일은 유감이에요. 마음고생 많이 했겠어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튼튼해져서 일도 다니는 걸요. 헤헤!”
현재 나는 TV 프로그램에 단독으로 출연을 한 상태다.
예능이긴 하지만 웃기려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아니고, 선배 아이돌과 후배 아이돌이 뭉쳐서 서바이벌 공연을 하는 것을 찍는 프로그램이었다.
실력파 아이돌 그룹 출신인 나와 신인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실력파로 유명세를 얻은 후배 아이돌의 케미를 집중적으로 다룬 프로그램 「마니또」.
출연진은 당연히 우리 두 사람이 전부가 아니었다.
각 유명 아이돌 그룹의 대표들이 섭외 되어 후배 아이돌과 팀을 짰고, 나와 팀을 짜게 된 후배는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애’라는 여자 아이돌이었다.
‘역시 잘 고른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선배라서 어려워 그런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사심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시애에 대한 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다.
성격이 쾌활하고 밝으면서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친구라서 함께 있어도 부담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관심이 ‘업계 선배’에 대한 관심이지 이성적은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여사친’ 혹은 ‘귀여운 동생’ 느낌이 났으니 말이다.
“잠깐 휴식하는 사이에 팀끼리 꽤 친해졌어요.”
방금 팀을 짜는 촬영을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전화를 받아 나갔다 왔던 거다.
앞으로 자주 마주쳐야 하는 팀이다 보니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는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시애와 나는 그 시간을 요긴하게 쓰지 못해 불리해진 상황이었다.
“선배님이 안 계시니까 되게 외롭더라고요. 다들 같은 팀 된 선배님이랑 친해져서 부러웠어요. 생각보다 빨리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빨리 와봤자 30분이나 걸렸는데…. 설마 30분 내내 혼자 있었어요?”
“네에.”
사실 이런 후배가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우리가 해외에 집중하는 사이 데뷔해서 제법 잘 나가고 있는 신인 아이돌 그룹 멤버라고 하는데….
‘스케줄 하기 바쁜데 데뷔하는 다른 아이돌까지 다 챙기긴 어렵지.’
얼굴은 아이돌치고 평범하지만, 노래를 엄청나게 잘 불러서 실력파 신인 아이돌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음색이 유난히 귀에 팍 꽂혀서 함께 작업을 했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 중이었다.
“많이 심심했겠네요.”
“제가 의리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요. 헤헤, 아무튼 다른 팀이 친해졌으니까 우리도 빨리 친해져요!”
“시애씨가 성격이 좋아서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긴 하네요.”
“앗! 저 본명이 안신애에요. 신애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아~그럴까요?”
“반말해주세요! 편하게! 저쪽 팀 선배님은 후배한테 말 편하게 해주고 계신단 말이에요.”
승부욕이 꽤 강한지 뒤쳐질 수 없다며 눈을 빛낸다.
자리를 비운 건 내 잘못이 맞으므로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알았어. 촬영 시작 하니까 이제 진정하자.”
“넹!”
얘가 올해 몇 살이라고 했더라?
어쩐지 우연이가 생각나는 깨발랄함이었다.
? ? ?
“우리 시애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촬영이 마무리 되고, 출연진이 각 소속사의 벤으로 이동하는 사이.
시애가 매니저와 함께 오더니 90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도 잘 부탁해. 이틀 후에 우리 소속사로 오는 거 맞지?”
“넵! 그때까지 곡 후보 생각하고 가겠습니다!”
“응. 나도 고민해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슬슬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현이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까 싶다.
시애 아니, 신애의 우렁찬 인사를 받고 나서 벤 안으로 들어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매니저 누나에게 말했다.
“저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거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날 따라온 건 해외에서도 함께 따라와 일을 해왔던 매니저 누나가 아니라 국내 담당 로드 매니저 누나였다.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우리 스케줄을 자주 따라다니는 분이 아니라서 편하게 부탁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저 혼자 갈게요. 퇴근하셔야죠.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 따라오실 필요 없어요.”
“어휴, 안 됩니다. 병원까지 데려다드려야 합니다. 그게 매니저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결국 로드 매니저 누나가 날 태우고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자들 조심해야 하는 거 알죠? 병원은 특히 조심해야 돼요.”
“네, 조심할게요.”
안경을 착용하고 여유롭게 벤을 나섰다.
복순 누나에게 연락을 해서 아직 아현이가 병원에 있다는 걸 확인한 상태였기에 발걸음은 무척 바빴다.
“아현아.”
“어? 해솔이 네가 여긴 어떻게…?”
“누나가 얘기 안 해줬어? 누나한테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 했거든.”
“로즈 언니? 그런 말 안 했어. 나는 언니가 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깜짝 놀래켜 주려고 그랬나보다. 그래서 깜짝 놀라긴 했어?”
“당연히 놀랐지! 나 병원에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응. 누나가 바로 연락 줘서 알았어.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보고 가기까지 했는걸.”
“헉! 진짜?”
아무래도 복순 누나가 내가 전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나보다.
“그럼 이것도 네가 준 거겠네?”
아현이가 쪽지를 주섬주섬 보여준다.
복순 누나가 깨어나면 곧장 먹으라며 약과 쪽지를 남겨두고 갔나보다.
“어, 맞아.”
“어쩐지. 이거 먹으니까 몸이 확 좋아지더라고.”
링거를 맞고 일어났는데도 피로가 다 풀리진 않았던 모양이다.
코인으로 구매한 아이템이니 효과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픈 일이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아현이에게 해줘야 할 말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아파서 링거를 맞는 애한테 바로 잔소리를 할 순 없었기에 일단 집에 데리고 갈 필요가 있었다.
아현이는 내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섰다.
집에 도착한 아현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소파에 누웠다.
“배는?”
“고파~ 뭐 먹지? 맛있는 거 먹자!”
복순 누나가 챙겨주지 않으면 먹는 걸 입에 대지 않았다는 아현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먹보 아현이 되어 음식에 대한 탐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서 배달 앱을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배는 어때? 고기 먹어도 괜찮겠어?”
“응. 문제없어! 나 튼튼해!”
“쓰러진 녀석이 튼튼하다고 말해봤자 하나도 안 믿기거든요?”
“헤헤, 미안해~ 많이 놀랐지?”
“엄청 놀랐어. 네가 크게 잘못 된 줄 알았거든.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건강보조제 한 알 먹는 것 정도는 힘들지 않잖아. 그거라도 먹었으면 이렇게 쓰러지진 않았을 텐데….”
“흐잉, 미안해에~ 챙겨 먹는 걸 잊어버렸어.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럴게. 진짜 꼭꼭 약속해!”
아현이가 울상을 짓는다.
슬슬 얘도 사태 파악이 되는 모양이다.
“일단 밥부터 먹자.”
음식을 배달시키고, 그 사이에 나는 아현이를 앉혀놓고 어떻게 된 사정인지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지금 좀 무서워.”
“다시 예전처럼 곡이 안 나올까봐?”
“응.”
“너 겁 진짜 많다. 곡이 잘 써지면 좋아해야지, 그걸 왜 겁을 내?”
“지금이 아니면 다신 이런 기분을 못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되게 무서웠고. 근데 지금은 속이 시원하네. 되게 슬플 거라고 생각했거든.”
세상이 온통 음악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특별해서 말이다.
“내 능력이 아닌데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추해질 뿐이야. 나는 요령 부리지 않고 내 음악을 만들래.”
처음에는 즐거웠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음악이 나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고자 강요를 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아예 공감이 안 가는 설명은 아니었다.
내가 ‘영감’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지 않겠는가.
“음…그럼 예전처럼 작곡하는 게 더 좋은 거야?”
“아쉽긴 하지만 애초에 내 능력이 아닌 걸.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고 계속 했던 것처럼 작곡할 거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며 아현이가 또랑또랑하게 눈을 떴다.
꽤 기특한 말이었기에 엉덩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아현이에게 온 행운은 결코 일시적인 행운이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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