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394화 (394/849)

〈 394화 〉 #58. 기적 (9)

* * *

연주 누님은 통화로 깊은 얘기를 할 생각이 없으셨다.

나를 당장 호출하셨다.

얼굴만 진짜 내 얼굴로 바꾼 후, 바로 움직였다.

누님을 본 순간 사과부터 했어야 했을까?

“…….”

“…….”

우리 사이에 깊은 침묵이 돌았다.

그 침묵이 누님의 질책 같이 느껴져서 아무 말도 안 듣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반성이 되고 그랬다.

잠시 후, 누님이 먼저 입을 열어서 침묵을 깼다.

“죄 지은 사람처럼 왜 그러고 있는 거니?”

“잘못했으니까요. 누님이랑 약속을 어겼잖아요.”

절대 현장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얼떨결에 범인을 내가 잡아버렸으니 누님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누님이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네가 도와준 덕분에 어머니랑 내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나는 너한테 사과를 하려고 해.”

“사과요?! 화나신 거 아니었어요?”

내가 누님한테 사과를 받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네가 나서준 덕분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어. 걔가 칼을 가져왔다는 건 우릴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맞아.”

진짜 섬뜩하긴 했다.

신문지에 쌓여 있는 칼을 품에 넣고 있는 사람이라니….

그 눈빛도 솔직히 오금을 저리게 만들만큼 살벌했다.

“그래서 위험을 막아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덕분에 어머니와 내가 무사할 수 있었어. 그리고 너한테 좋지 못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으니 사과를 하고 싶었다. 깊게 발을 담그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본의 아니게 자주 얼굴을 보게 됐는데, 본래 연주 누님은 나와 장모님을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이쪽 일에 발을 담가버리게 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혼날 준비하고 왔는데, 이게 뭔가 싶네요. 차라리 화가 났다고 한 소리 들었으면 더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아요.”

“이곳은 늪이나 다름없다. 묻으면 질척이고, 고약한 냄새가 나지. 깨끗한 너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이제 보니 연주 누님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건 나한테 화가 나서라기보다 자신의 집안일에 나를 깊게 끌어들인 것이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누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누님이 고약한 냄새가 나고 질척거리는 늪에 발을 담궈놓지 않았으면 몰라도, 한 발은 담궈져 있는데 내가 모르쇠 할 순 없지 않겠는가?

“제가 끼어드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래. 죽어도 널 끌어들이기 싫었다. 그런데 결국 그 다짐을 나 스스로가 어겨버렸지. 선을 넘어버렸던 건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너에게 부탁을 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네가 느끼게 해준 든든함에 마음이 약해져버렸던 거야.”

사실 범인을 잡은 것에 나 스스로 뿌듯해 하는 중이었는데, 누님의 이런 말을 들으니 힘이 쭉 빠져버린다.

만약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됐겠는가?

장모님은 여전히 중환자실에 계실 것이고, 최관씨는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크게 다쳤을 수도 있다.

“하긴, 장모님이 수술하는데도 알려주지 않았었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위독하고, 큰 후유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를 불렀다.

그것도 새벽에.

그 시간이 되도록 잠도 못 자고 고민했을 연주 누님의 고뇌를 모르지 않았기에 그녀의 말을 그냥 들어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좀 서운하네요. 가족끼리 이 정도 도움도 못 줘요? 그리고 누님이 발을 걸치고 있는 곳이 왜 늪이에요? 아니, 누님이 하신 말처럼 좋지 못한 곳이어도 상관없어요. 어디에 있든 가족이니까 따라가야죠. 누님은 저한테 안 좋은 일 있으면 안 돕고 선 그으실 거에요? 지금처럼?”

“이번 일은 상황이 특이하잖니. 나도 다른 일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네가 개입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연주 누님은 내가 서운함을 느낀다고 하니 굉장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험한 일에 끼어든 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화내시면 겸허히 받아들일게요. 사과도 드리고요. 근데 참견했다고 뭐라고 하시진 말아주세요. 저도 도울 자격 있어요. 현오 아빠잖아요.”

일부러 현오 아빠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주 누님이 크게 동요한다.

“…자꾸 날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할래?”

“그때도 도울 거에요. 장모님이 큰일이 나게 생겼는데 사위가 돼서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까요.”

“어머니가 좋아할 법한 말을 하는구나.”

내 단호한 태도에 연주 누님이 한숨을 쉬었다.

“누님이 싫어하실 것 같으니까 이건 우리끼리만 알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이번 일로 이쪽 세계에 학을 뗀 건 나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세계.

이런 곳을 현오와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장모님을 위하는 마음과 현오와의 일은 엄연히 다른 분야였다.

“가출을 하면서 더 이상 핏줄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작 어머니가 잘못 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그동안 혼자서 잘난 척하고 다녔는데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더군.”

“장모님한테 큰일이 생겼는데 멀쩡할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되겠어요? 저라도 그랬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위로해줘서 고맙다.”

연주 누님은 이번 일로 알게 된 게 있으셨다.

장모님을 미워하긴 했어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는 것을.

장모님이 최관을 내버려두고 핏줄에 집착을 하시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연주 누님인데, 결국 그녀도 마음 속으로는 장모님이 밟혔던 거다.

‘이번 일로 사이가 좀 좋아지려나?’

이번에 나쁜 일을 잔뜩 당했으니 이제 좋은 일이 올 법도 하다.

이 일로 영영 얽혀서 풀지 못할 관계가 호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면목 없어 하는 연주 누님을 열심히 달래드렸다.

내 위로에 힘을 좀 얻었는지 연주 누님이 뒤늦게 범인에 관련 된 얘기를 물으셨다.

“그런데 어쩌다가 네가 범인을 잡게 된 거니? 관이한테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그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제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어요. 정말 우연하게 벌어진 일이었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을 연주 누님에게 설명했다.

“최관씨가 범인을 한 번 놓치고 나서 다시 위치를 알아봐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저도 이번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 위치를 알아봤죠. 그런데 범인이 있는 곳이 이 병원이라잖아요.”

내가 얼마나 식겁을 했는지 모른다.

“병원에 누님도 있고, 장모님도 계신데 범인까지 있다? 와~ 아찔하더라고요.”

“네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확률이 높지.”

“너무 무서웠어요. 누님이랑 장모님한테 이미 큰일이 벌어졌을까봐요. 정신없이 병원으로 이동했어요. 그 와중에 얼굴을 무슨 정신으로 바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동하니까 바로 눈앞에 범인이 있지 뭐에요?”

“미치겠군. 하필이면?”

“그 사람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고, 저도 남들 시선을 피해서 이동해야 하니까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만났어도 모르는 척 도망쳤으면 좋았을 거다. 위험했어.”

“저도 그 사람이 절 모르는 척 지나갔으면 그랬겠죠. 근데 그쪽에서 먼저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갑자기 부탁을 하더라고요. 같이 병실을 좀 가달라고요. 조직원들 시선을 피하는데 절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누님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범인이 나를 그냥 지나쳤어도 내가 그러지 못했을 거다.

믿는 구석이 있는데, 범인을 왜 놔줘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바로 분명 혼나겠지….’

진실과 거짓말이 미묘하게 섞인 내 설명을 들은 연주 누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다른 부분에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직접 제압을 했다고 하던데, 다친 곳은 없는 거니?”

“에이~ 제가 그 사람한테 어떻게 다쳐요? 전혀 안 다쳤어요. 평범한 사람은 저한테 절대 못 당한다니까요?”

원래 게임도 템빨인 법이다.

나도 엄청나게 든든한 템빨이 존재하기에 그런 사람에게 다칠 일은 절대 없다.

만약 다친다 해도 순식간에 나을 방법이 상점에 넘쳐 흐르지 않는가?

“이거 한 방 딱 뿌려주니까 바로 끝났어요.”

제압용 스프레이를 누님에게 보여주었다.

누님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스프레이를 건네받았다.

“고작 이걸로 신소원을 제압했다고?”

“칙! 하고 뿌렸죠. 얼굴에다가.”

“구체적인 효과는?”

“정신은 또렷한데 몸이 마비가 돼요. 효과 지속시간은 한 번 뿌리면 30분이고, 여러 번 뿌리면 중첩이 되는데, 효과가 배로 늘어나요.”

1번 뿌리면 30분.

2번 뿌리면 1시간.

3번 뿌리면 2시간.

4번 뿌리면 4시간.

이렇게 남아 있는 시간의 2배수로 늘어나는 것이다.

“아, 그리고 몸이 마비된다고 해서 감각이 둔해지는 건 아니에요. 모든 감각을 다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직접 당하는 사람은 굉장히 당황스러울 거에요. 갑자기 몸이 안 움직여지니까요.”

상상만 해도 꽤 무서울 것 같지 않은가?

갑자기 몸이 마비가 되는데, 정신은 또렷하니 말이다.

“근데 지금은 효과가 풀렸을 거에요. 한 번밖에 안 뿌려서 효과가 오래 가지 않을 거거든요. 누님한테 이 스프레이 드릴게요.”

“이걸 날?”

“사람 미래를 어떻게 알겠어요? 지금처럼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잖아요. 그때 이 스프레이가 있으면 안전하실 거에요. 오늘 일 때문인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요.”

“…그래. 네가 안정이 안 된다는데 어쩔 수 없지.”

다행히 연주 누님이 순순히 스프레이를 받아들었다.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휴대가 편한 크기여서 어딜 가든 후대하고 다니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끝난 거겠죠?”

장모님은 지금처럼 무난하게 회복하시고, 최관씨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거다.

연주 누님도 지금처럼 고생하지 않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말이다.

“끝나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위태롭게 지낼 순 없으니까.”

장모님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누님이 일을 쉬는 건 아니었다.

회사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췄다가 퇴근을 해서 본가에 얼굴을 비추고 다음으로 병원에 가서 장모님의 곁을 지킨다.

그걸 며칠 내내 반복해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내가 준 건강보조제를 먹는다 해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장모님 상태는 좀 어떠세요? 저번에 뵀을 때 많이 회복한 것 같긴 했는데.”

“그때보다 훨씬 많이 괜찮아지셨다. 이젠 가볍게 운동도 하신다.”

“벌써 운동을요?? 천천히 걷기 시작한 게 엊그제 아니었어요?”

“하루하루가 다르셔.”

중환자실에서 나온 장모님은 병원에서 연신 놀람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 중이셨다.

“벌써요?”

“의사들도 경악을 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후유증도 안 남을 것 같다고 하더라.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의사는 어머니한테 일어난 일이 기적이라고 하더라.”

그때 봤던 광경은 확실히 기적 혹은 이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임팩트기는 했다.

진짜 천사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교인 누님이 갑자기 종교를 갖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아무튼 이번 일로 유일하게 좋아진 부분이 있다면 장모님과 연주 누님의 사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흐뭇하게 연주 누님에게 말했다.

“기쁘신 것 같네요.”

“형편없는 몰골로 누워 있는 걸 보니까 차라리 꼬장꼬장하게 눈 부릅뜨고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걸 보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게 됐어.”

“…….”

사이가 좋아진 거 맞지?

그래도 그때 봤던 장모님의 둘째 딸, 그러니까 나한테는 처제가 되는 조혜연씨보다는 장모님과 사이가 좋은 게 맞는 것 같다.

처제는 병원에 한 번 오더니 장모님이 후유증 없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이후 병원에 발길을 뚝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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