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 #58. 기적 (10)
* * *
장모님이 정정해지셨으니 아직 유산을 받긴 어려워졌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연주 누님의 예상에 따르면 그렇게 사라진 처제는 어디 해외에서 남자들을 끼고 놀고먹고 있을 거란다.
그러다가 또 지금처럼 장모님에게 문제가 생기면 유산을 챙기려고 뻔뻔하게 나타날 것이고.
원래 그런 아이였으니 나는 상관할 필요 없다는 거였다.
그 말을 할 때 장모님이 옆에 있으셨고, 누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기까지 하셨다.
장모님이나 연주 누님에겐 익숙한 일인 것 같은데, 제 3자인 내 눈에는 그 태도가 절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기왕 다시 병원 근처까지 온 거, 장모님 뵙고 갈게요.”
“불편할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장모님이 저 오는 거 은근 좋아하시더라고요. 얼굴 잠깐 뵙고 갈게요. 늦은 밤이라서 실례인 건 아니겠죠?”
“실례일 리가 없잖니.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널 반기시는 게 더 마음에 안 든다.”
큰 수술을 받은 이후.
몸이 잘 회복 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장모님이 누님이나 날 대하는 태도가 많이 누그러지셨다.
그리고 장모님의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연주 누님도 충분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장모님이 쓰러지셨을 때, 연주 누님과 최관씨가 힘을 합쳐서 어려울 수 있었던 일을 잘 헤쳐 나갔던 것이 변화를 보이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장모님, 저 왔습니다.”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
아니다 다를까?
장모님이 환한 미소를 보여주시며 나를 반겼다.
? ? ?
한편.
최관은 굴욕적인 자세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신소원을 온기 하나 없이 차갑게 내려다 봤다.
“끄으응…커헉…쿨럭!”
황당한 방식으로 붙잡혀 버린 신소원을 병원 지하 계단에서 데리고 나와 폐공장에 데려다 놨다.
조직원에게 붙잡힌 것도 아니고 조직과 연관 되어 있지 않은 일반인에게 붙잡힌 꼴이 참 우스웠다.
“꼴이 참 어울리는군요.”
“히윽…으으…살…려…흐억!”
“재미없게 이게 뭡니까?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당신은 참 분에 넘치는 자리에 있었네요.”
최관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신소원이 살려달라며 공포에 질려 있는 이유가 자신을 무서워해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 남자는 신소원한테 어떤 짓을 했기에 이토록 깊은 공포를 심어 줄 수 있었던 걸까?
이번 일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진행 되는 게 없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수술 그리고 수습까지. 전부 엉망진창이었어. 큰 아가씨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생겼을 거다.
큰 아가씨가 활약해주신 덕분에 무난하게 수습한 지금조차도 조직원들은 큰 동요를 보였다.
그동안 쉬쉬하고 있던 보스의 부재가 미치는 영향을 이번에 제대로 느낀 것이다.
적어도 보스를 그렇게 만든 년을 잡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냈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신소원이 병원에 몰래 침입할 때까지…아니, 큰 아가씨의 인맥에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무능하구나.’
보스가 없다는 사실에 동요한 건 조직원들도 있지만, 최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스가 그녀에게 너무도 큰 존재였기에 갑작스러운 보스의 부재는 최관을 무너트렸다.
정신을 다 잡으려 노력했으나 결과를 보면 전부 엉망진창.
최관이 유일하게 희망을 갖고 있었던 ‘범인 검거’조차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뤄지고 말았다.
남의 손에 허무하게 말이다.
그뿐인가?
본격적으로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범인의 의지가 모두 꺾여버린 상태였다.
“안 되겠다. 얼굴에다가 찬물이라도 뿌려봐. 아, 얼음 넣어서 아주 시원하게 만들어.”
“예, 형님!”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고통으로 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깨워낼 것이다.
그래야 보스께서 느낀 고통을 고스란히 신소원이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촤악~!
“흐아악!”
얼음이 든 찬물이 얼굴에 우수수 쏟아지고 몸 전체에 뿌려진다.
“정신이 좀 듭니까?”
“씨이…바알….”
찬물의 효과로 정신을 차린 신소원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최관과 시선이 마주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됐음을 직감하고 욕을 읊조렸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 그 개 같은 말투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언니? 흐흐….”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신소원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쏟아졌던 폭력의 여파와 무자비하게 쏟아진 얼음물이 신소원을 극한에 다다르게 만들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평범한 사람은 쉽게 느끼지 못할 끔찍한 경험을 막 끝낸 상태였다.
멀쩡한 정신으로 온 몸이 마비되는 걸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고통.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던 막막한 공포.
신소원은 자신을 죽일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뻤다.
아니, 그녀를 멀쩡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안도감이 들었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낫지, 계속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잠깐의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소원은 이보다 두려운 공포는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금수보다 못한 년이랑 태평하게 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하하!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인 거야?”
신소원은 일부러 더 과장 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야 자신이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최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 맞지. 근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거 아닌가? 바라는 걸 쟁취하고자 하는 거.”
“뻔뻔하시군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둬주신 보스를 배신하는 게 어떻게 당연하다는 겁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쓰레기라는 뜻입니다.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요.”
“크크, 그래서 뭐 어쩌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날 죽이는 거밖에 없지 않냐? 근데 이거 어쩌지? 나는 네 화풀이 대상이 될 생각이 없는데. 큭큭!”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려달라고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으득!
“그건 네가 무서워서 한 말이 아니야!!”
최관의 도발에 신소원이 곧바로 달려든다.
최관도 여유가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신소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그 남자한테 무슨 짓을 당했기에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지?’
최관은 신소원이 일부러 더 과장 되게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신소원은 폭력으로 굴복할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싸우면서 다쳤던 게 얼마인가?
칼을 옆구리에 꽂힌 채로도 다수의 적대파 조직원과 싸워서 이긴 전적이 있는 사람이 바로 신소원이었다.
“웬만하면 참아보려고 했는데, 궁금해져서 참을 수가 없군요.”
“뭐?”
“그 남자가 당신한테 뭘 했기에 천하의 신소원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건지 알아야겠습니다. 전화 한 번이면 간단하게 알려주겠죠. 당신이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
“시, 시발 년아!! 미인계를 쓰더니, 어디까지 치졸해질 셈이야!”
미인계?
이상한 소릴 하는 신소원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최관이 말했다.
“치졸하게 나온 건 당신이 먼저죠. 같잖은 폭력으로 당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진짜 무서워하는 걸 찾아야겠습니다.”
신소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관이라면 능히 말한 바를 실행시킬 능력이 있었다.
여전히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끔찍한 경험을 또 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던 것이 오히려 최관에게 약점을 알려준 꼴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신소원이 다급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
그 끔찍한 경험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차, 차라리 죽여. 어차피 죽이려고 했잖아.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패고 죽이라고!”
“흥미롭군요.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두려워할 줄 몰랐는데.”
좋은 걸 발견하긴 했지만, 썩 마음에 드는 약점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신소원을 처리하는 것조차도 아가씨 지인의 도움을 받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정말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최관은 표정 관리를 했다.
신소원이 안절부절 못하는 꼴은 그동안 묵혀있던 체증을 싹 가시게 할 만큼의 쾌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뭐, 뭐든 하, 할게. 뭘 바래? 보스께 찾아가서 무릎을 꿇을까?”
뻐억!
최관이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들어 신소원의 뺨을 쳤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당신은 죽을 때까지 보스의 그림자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사과도 자격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다.
스스로의 행동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신소원에게 사과를 시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발,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 끔찍한 걸 또 당하란 말이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제발. 응? 자비를 좀 베풀어줘. 내가 잘못했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정말 진심이 0.1%도 담겨져 있지 않은 변명들이다.
최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도 할 수 있어.’
잠깐임에도 불구하고 신소원에게 공포를 안겨 준 남자.
그 남자의 도움을 또 다시 받고 싶지 않다.
이것조차 못해서야 어떻게 보스 앞에 고개를 들고 있을 수 있겠는가?
신소원이 느끼고 있는 알 수 없는 공포를, 최관은 빼앗아오고 싶었다.
‘보스를 다시 만나 뵀을 때, 고개는 들 수 있어야지.’
본의 아닌 일이었지만 여태까지 쉬운 길로 일을 해결하게 됐다.
조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곁을 지켜준 조직원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도 싫다고 도망치기까지 했던 곳에 다시 돌아와 자신을 지지해준 큰 아가씨 아니, 연주 언니.
그리고 직업상 직접 얼굴을 비추진 못했으나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큰 도움을 준 형부.
이들이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최관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로 방향을 잡으려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약하게 있을 거냐. 정신차리자.’
최관은 의지를 다지고 여전히 무언가에 두려워하고 있는 신소원에게 말했다.
“한 판 뜨시죠.”
신소원이 최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정당하게 싸우면 자신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소원으로부터 진정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는 그 생각부터 산산조각 내주어야 했다.
“뭐? 이 상황에서 싸우자고?”
“저도 몸 상태가 썩 정상은 아니니 핸디캡이니 뭐니 그런 비겁한 소린 하지 않는 게 나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내가 이기면 뭘 해줄 건데.”
“풀어준다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은 안 할 겁니다. 대신 편하게 죽여드리죠.”
“시발년. 끝까지 지 이익만 챙기는군.”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 싫을 리가.”
곱게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를 신소원이 아니다.
자신이야 말로 제발 죽여 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낄낄 비웃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더욱이 상대방이 절대 자신이 패배할 리 없는 분야에서 내기를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최관만 쓰러트린다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조직원쯤이야 쉽게 뚝딱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운이 좋으면 도망을 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니지, 왜 도망을 쳐? 최관을 죽여야지.’
기회가 오자 또 다시 사람 죽일 생각부터 하는 신소원.
그런 신소원의 생각을 모를 리 없는 최관이 조직원에게 말했다.
“풀어줘.”
“형님,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다 잡아 놨는데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개자식이긴 해도 주먹 하나는 알아주는 녀석이 아닙니까?”
“너희는 설마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조직원들이 최관의 물음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 그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는 년들이 대답소리가 작았다.
최관도 안다.
신소원의 대단한 무용담을.
반면 자신은 보스를 지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싸움에 나선 경험이 없었다.
물론 최관도 과거에는 전투를 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고, 그녀의 실력을 아는 조직원들은 이미 한 자리씩 받아서 전국으로 흩어졌다.
현재 그녀의 곁에 있는 조직원들 대부분은 그녀의 무용담을 전설처럼 들어 온 이들인 것이다.
“필요성? 당연히 있다.”
누구나 한 번씩 술자리에서 말할 법한 ‘왕년에 내가…!’ 같은 느낌.
반면 상대는 현역으로 어마어마한 괴이한 전설을 만들어낸 행동대장이었다.
“이대로 죽인다 한들 신소원의 자존심을 꺾을 순 없을 테니까.”
신소원이 가장 신뢰하고 믿는 것은 자신의 주먹이다.
실력 하나로 이 자리에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러니 주먹으로 그녀에게 두려움을 심어 줄 생각이었다.
“신소원의 자존심을 박살 낼 거다. 그래야 보스를 배신한 걸 진심으로 후회하며 죽을 수 있을 테니까.”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그녀 혼자서 쟁취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주먹을 꽉 쥔 최관이 밧줄에서 풀려나 실실 불길하게 웃고 있는 신소원을 향해 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