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59. 후배 시애 (6)
* * *
“역시 그때 봤던 거지? 나도 아차 싶긴 했었는데.”
“죄, 죄송해요. 함부로 엿봐서….”
직접적으로 얘기가 나왔는데 모르는 척 할 순 없는 노릇.
내 말에 면목이 없다는 듯 시애가 고개를 숙인다.
“소문 내지 않을 거지?”
“그럼요!!! 당연하죠. 절대 오늘처럼 실수하지 않을 게요.”
확실히 시애는 믿을 만 한 아이다.
오늘 나를 도와준 것만 봐도 심성이 곱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아까 나서줘서 고마웠어. 일이 흐지부지 됐지만 그래도 날 도와준 건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것 같아서.”
“앗! 아닙니다, 선배님. 괜히 제가 나서서 민폐가 되지 않았나 싶은 걸요.”
“아니야. 도와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성희롱 당하지 않은 거니까.”
“헤헤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뿌듯하네요. 그나저나 앞으로 촬영은 어떻게 하죠?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하기야 하지. 근데 프로니까 참고 해야지.”
돈을 받은 만큼 그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태업을 할 생각은 없었다.
“와~ 저도 선배님 마음가짐을 본받아야겠어요.”
“내 얼굴에 금칠해도 나오는 거 없거든?”
그렇게 시애와 내가 훈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뒤늦게 대기실에 우리 스탭들이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우리 애…너어! 너 왜 여기 있어! 네 대기실은 국 끓여 먹을래? 빨리 따라와!”
“언니! 나 선배님이랑 얘기 나누고 있잖아!”
“죄송하지만 애 좀 데려갈게요. 제가 지금 할 말 되게 많거든요.”
“네, 그러세요.”
매니저가 양해를 구하니, 사양 할 수 없어 순순히 시애를 내줬다.
“앗! 선배님!”
시애가 배신자를 보듯이 나를 원망스레 바라본다.
아무래도 매니저에게 불려가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나보다.
“어허! 빨리 오지 못해?”
매니저가 시애의 손목을 잡아채 질질 끌고간다.
“으아앙~!”
“너 작가님이랑 왜 다툰 게 사실이야? 그쪽에서 뭐라고 해도 네네 했어야지! 이런 일 한 두 번 있는 거 아니잖아. 갑자기 왜 욱한 거야? 큰소리 내던데, 도대체 뭔 일이었어? 스탭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쉬쉬하고 말을 안 해줘서 답답해죽겠네.”
대기실 문이 열려 있었기에 매니저가 시애를 나무라는 소리가 전부 들렸다.
작가와 싸웠다는 것이 매니저 입장에서 굉장히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아니이~! 그게!! 하씨,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래! 나 몰라! 모르니까 네가 설명 좀 해봐. 도대체 뭔 일인 건데?”
여기서 시애가 솔직한 얘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작가한테 성희롱 당할 뻔 한 걸 자신이 구해줬다고 한다고?
그게 사실이긴 하다만, 함부로 입에 열기가 뭐한 주제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 나는 복도로 나가서 매니저에게 말했다.
“시애는 잘못한 거 없어요. 저랑 작가님이 다툰 겁니다. 시애는 중간에 끼어 있었던 거고요.”
“앗! 들렸나요? 호호호! 어쩐지 작가님이 시애를 못 마땅하게 보시는 것 같아서 걱정한 거였는데…. 제가 잘못 알고 괜히 시애를 나무랐네요.”
“네, 시애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넵! 호호호! 시애야? 언니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순순히 가자아?”
“거짓말 하지 마! 잔소리 할 거잖아!! 그리고 언니는 왜 내 편을 안 들어줘? 해솔 선배님 매니저님은 선배님 편 들어주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던데, 언니는 오자마자 저한테 네네 하라고나 하고. 진짜 완전 서운해!”
“야야. 언니가 다 너 생각해서 한 말이지. 업계에서 싸가지 없다고 소문나면 안 된단 말이야.”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왜 작가랑 싸웠냐면서 네네 하라고 말하는 게 썩 좋게 들리진 않았다.
매니저는 시애가 많이 서운해 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쩔쩔매면서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했는지 매니저가 시애에게 말했다.
“흠흠, 일단 네 대기실로 들어가자. 여기서 이렇게 있는 거 민폐야. 소란스러워서 다들 쳐다보잖아.”
“앗! 그렇네. 선배님! 이따 뵐게요!”
“그래, 이따 보자.”
시애와 그녀의 매니저가 사라지고 대기실로 들어오자 배탈 때문에 얼굴이 헬쓱해진 매니저 누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휴, 이제 좀 조용하네. 저쪽은 텐션이 너무 높아.”
“하하!”
“그나저나 너 솔직히 말해봐. 진짜 그게 전부였어?”
“…….”
갑자기 명치를 때려오는 매니저 누나의 질문.
‘이 누나, 은근히 촉이 좋단 말이지.’
형사도 아닌데 눈빛이 꽤나 날카롭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그쪽에서 좀 삐딱하게 나와서 화가 좀 났던 거에요.”
“네가 별 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굴 리가 없잖아. 얘기 들었을 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단 말이지.”
신입이었던 매니저 누나가 어느덧 우리와 함께한지 3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 시간이면 당연히 내가 어떤 성격인지 파악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굳이 누군가와 싸워서 분란을 일으킬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흠, 사실 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근데 증거가 없어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걸요?”
“역시 뭐가 있었구나? 혹시 그거야?”
매니저 누나가 말하는 ‘그거’는 우리가 활동하면서 굉장히 많이 당했던 일.
그리고 오늘도 당할 뻔 했던 ‘성희롱’을 일컫는 말이었다.
대놓고 그 단어를 쓰기엔 낮말은 쥐가 듣는다지 않는가?
조심할 필요가 있었기에 매니저 누나가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죠.”
“젠장! 어쩐지 느낌이 영 안 좋다 했어. 이런 촉은 한 번을 안 비켜간다니까. 그 작가도 간덩이가 엄청 크네. 널 건드리고.”
데뷔하고 신인이었을 때의 멤버들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고 난 이후, 매니저 누나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당했다고 전달하는 거다.
그럼 매니저 누나가 회사에 얘기를 해서 그쪽과 얼굴을 보지 않도록 스케줄을 조절해줬다.
선을 넘을 정도로 성희롱을 하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 법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준다.
이래서 소속사가 중요한 거다.
허니 엔터는 특히나 아티스트를 제대로 보호해주는 것으로 유명해서 점차 이런 일들이 쌓이기 시작하니 쉽사리 우리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더라.
더군다나 요령이 없던 신인시절이 지나가고, 지금은 사전에 적절하게 거부하는 방법을 알게 돼서 불편한 일이 생기는 빈도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저급하고 노골적인 성희롱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특히 나는 당하면 절대 가만히 넘어가지 않는 편이어서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보면 된다.
원래 이런 부분에서 만만해 보이면 호구인 줄 알고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절대 봐주지 않고 강경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던 것이다.
‘다른 애들은 그런 거 당한 거 자체가 창피해서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하는데….’
나는 그런 거 없다.
얄짤 없이 현장에서 지적한다.
그래야 쪽팔린 일이라는 걸 실감할 테니 말이다.
“도중에 시애가 막아줘서 시도로 그쳤어요.”
“앞으로 저 작가랑 같이 작업할 일 없을 거다.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을게. 어디 만지거나 그런 거야?”
“포즈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누구한테 뭘 가르쳐주겠다고 했다고? 참나, 핑계도 인성만큼 저급하구만.”
내가 비주얼이 되다 보니 화보는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할 정도로 많이 촬영했다.
그런데 포즈를 가르쳐준다니.
작가가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고작 국내에서 일하는 작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 누나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작가 스스로가 멘탈이 나갔는지 돌발 행동을 했다.
“어…작가님은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가셨어요.”
“아니, 촬영 도중에 이러시면 곤란하죠! 남은 촬영은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매니저 누나가 바로 나서서 펄쩍 뛰었다.
누나가 저렇게 나서줘야 내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거다.
괜스레 잘못 없는 스태프들만 열심히 고개를 숙인다.
여러모로 인성이 참 화려한 인물이다.
인성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지만, 그 작가는 실력도 영 아닌 것 같던데….
“죄송한 건 알겠고, 그래서 일은요.”
“남은 촬영은 저한테 맡기셨어요.”
“그쪽 분이 하신다고요? 실례지만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결과물로 증명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포토그래퍼가 자기 스탭에게 일을 맡기고 아프다는 핑계로 튀어버린 것이다.
그 작가 밑에서 일하고 있는 스탭이었기에 썩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그녀가 아니면 당장 사진을 찍을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과물로 증명하겠다고 하니 믿어보는 수밖에.
‘도망친다고 일이 해결 되는 게 아닐 텐데….’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나는 도대체 왜 건드린 걸까?
소식을 들은 시애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얼마나 아프셨으면 촬영 중간에…. 작가님 몸이 괜찮으신가 모르겠네. 이럴 게 아니라 다른 날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이걸 튄다고?”
시애는 튀었다는 말에 황당함을, 그녀의 매니저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작가의 몸을 걱정해줬다.
“다시 시간을 내는 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그냥 이분이랑 작업 시작하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은 작가가 도망쳤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쉬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결과물을 걱정하면서도 모아진 의견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스태프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 된 촬영이 다시 시작 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이 있다면 작가의 스탭이 찍은 사진이 메인 작가가 찍은 사진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다는 거다.
“실력 좋으신데요?”
더군다나 이 스탭은 작가와 얽힌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서 촬영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이끌려고 애를 썼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찰칵
“두 분 다정하게, 시애씨는 보조개가 매력적이거든요. 보조개 보이게 활짝 웃어주세요. 아이, 예쁘다.”
찰칵 찰칵
“그 포즈 굉장히 좋네요. 포즈는 그대로 하고 표정을 바꿔서 해볼까요?”
찰칵찰칵찰칵!!
시종일관 칭찬이 쏟아지다 보니 작가의 도망으로 엉망이 됐던 촬영장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시애의 몸이 풀리고, 나도 불편한 사람과 작업을 하지 않게 돼서 그런지 훨씬 포즈와 표정이 좋게 나왔다.
“괜찮네요. 잘 찍으시는데요?”
“이건 무조건 A컷이에요! 정말 잘 나왔어요!”
“그러네. 시애가 정말 예쁘게 나왔네.”
“솔직히 선배님은 어떤 사진이든 다 A컷 같아서 저만 잘 골라내면 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작가님, 왜 이런 실력으로 스탭을 하고 계셨어요?! 제 프로필 사진 맡기고 싶을 정도로 잘 찍으세요!”
시애의 칭찬에 스탭 작가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하는 티를 억누르지 못한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한참 부족해요.”
“제가 보기에도 실력 좋으세요. 나중에 작가님 이름으로 작업하게 될 날을 기다릴게요.”
“헉! 가, 감사합니다!”
스탭 작가는 우리의 칭찬에 더 흥이 났는지 본격적으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쓰레기 작가 밑에서 착취당하고 있던 스탭 작가라….
‘흔한 클리셰지.’
하지만 클리셰라는 게 괜히 만들어진 말이 아닌 법.
스탭 작가가 제대로 각성해서 하극상을 해낸다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가 없지 않을까?
먼저 도망을 쳐준 덕분에 우리 쪽에서 보복을 할 수 있는 건수를 만들어준 메인 작가다.
누군가가 계기만 만들어 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로 보였다.
그렇게 순조롭게촬영이 끝난 이후.
매니저 누나가 도망친 메인 작가의 처리에 대해 내 의견을 물었다.
“도망친 작가는 어떻게 할까?”
“항의 해야죠. 이대로 그냥 넘어가주면 같은 짓을 할 테니까요. 보니까 되게 익숙해보이더라고요. 조금씩 건드려서 반응 보고 괜찮다 싶으면 더 심한 짓을 하고 다녔겠죠.”
손버릇이 나쁜 사람은 호되게 당해봐야 한다.
그래야 제가 잘못한 걸 깨닫고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거다.
내게 했던 짓을 떠올려보면 이미 상당수의 피해자가 있을 게 분명하니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혼을 내줘서 다신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내 의견을 들은 매니저 누나가 오케이라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좋아, 네가 바라는 대로 처리 해줄게.”
“정말 하실 수 있겠어요?”
“그쪽에서 먼저 겁먹고 도망쳐준 덕분에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그쪽 스탭 작가를 슬쩍 건드려 들어보니까 욕심이 없는 게 아니더라고. 메인 작가가 저지른 구린 짓들 알고 있는 게 꽤 돼.”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죄의 업보는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본인에게 돌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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