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 #60. 가족 여행 (1)
* * *
또 그때의 꿈인가?
최관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주변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어둠이 아니라 몸을 질척하게 달라붙어오는 기분 나쁜 어둠.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이런 어둠과 함께 했던 나날이었으니 말이다.
남들은 이런 꿈을 악몽이라고 부르겠지만, 최관에게는 달랐다.
‘이런 꿈, 이제 그만 꿔야 하는데.’
오히려 이 꿈을 꾸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자제하고 있는 거였다.
‘수술 한 번 받았다고 이렇게 나약해져서야….’
건강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잃고 나니 더 크게 실감이 되고 있었다.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는다.
보스를 잃을 뻔했던 것이 그녀에게 큰 두려움을 줬던 게 분명하다.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고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어둠이 늪처럼 그녀의 몸을 조금씩조금씩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최관은 굳이 반항하지 않고 어둠에 순응했다.
어차피 이 어둠은 자신을 장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빛이 자신을 휘감았다면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둠이라면 혼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아니, 굳이 벗어나야 하나?
스스로가 약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관은 질끈 눈을 감고 싶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지 않은가?
‘또 나타났구나.’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온다.
그 빛은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검은 늪에 빠져드는 그녀를 구원해주기 위한 손길.
꿈속의 최관은 뻗어오는 손을 망설이지 않고 잡아챘다.
턱!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던 그녀의 몸이 손을 붙잡자마자 쑤우욱! 하고 검은 늪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이때 느끼는 감각이 최관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가 지면에 부딪치기 직전, 있는 줄 몰랐던 안전끈이 내 몸을 하늘 위로 끌어올리는 것 같은 기분.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이게 아니면 딱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정말 저 늪에 몸이 다 빠져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안심하게 되어버린다.
‘또 구함을 받았구나.’
번쩍!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은 흰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비로소 최관은 눈을 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짹 짹짹!
창문 밖으로 들리는 참새 소리와 따듯한 햇살이 만들어내는 빛들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게 했다.
“…하아.”
최관은 짜증을 내며 손등을 얼굴에 얹었다.
“왜 자꾸 꾸는 거야.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심각한 상태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던 최관은 현재 무사히 퇴원해서 보스의 집으로 돌아 온 상태였다.
보스가 그랬듯이 그녀도 완벽하게 재활을 끝내고 퇴원을 하진 않았다.
내 몸은 내가 안다면서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퇴원을 했다.
‘그게 문제였나?’
수술을 받고 난 이후라서 그런지 체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다시 운동을 시작하며 회복하는 중이었다.
수술을 받고 회춘까지 하신 보스와 달리 자신은 평범해서 깎인 체력을 회복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뿐인가?
회복은 회복대로 하고, 일은 일대로 해야만 했다.
최관은 그녀가 퇴원을 하던 날 찾아 온 보스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앞으로 내 후계자는 너다.”
최관에겐 폭탄이 터진 것 마냥 갑작스러운 일을 보스는 산책 가자는 듯이 평이한 목소리로 전달했더랬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잠시 맡았다가 내 손주한테 넘기라는 뜻이 아니다. 임시 딱지가 붙은 보스 말고, 진짜 제대로 된 후계자가 되란 소리다.”
“!!!”
진짜 후계자가 되라고?
조카님 아니, 현오에게 자리를 넘기는 게 아니라?
놀랍게도 그녀가 퇴원하기 전에 보스가 상황을 모두 정리해둔 상태였다.
“이미 간부들 동의도 다 받아 놓은 상태다. 무르는 건 안 돼.”
“하지만 보스, 그 문제는 이미 다 끝난 일 아니었습니까? 저는 정말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 없어도 하라면 해! 이번에 있었던 일을 봐라. 네가 진짜 후계자가 아니면 다른 년들은 절대 널 인정하지 않을 거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을 때야 네 말을 듣는 척 하겠지. 근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우리 현오한테 보스 자리가 가기도 전에 조직이 뒤집어질 거다!”
보스의 말은 씁쓸해서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었다.
최관이 보스의 빈자리를 잘 채운다면 되기야 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현재 조직의 간부들은 보스와 같은 시대를 보냈던 노괴들이다.
산전수전 다 경험한 사람들.
결코 최관에게 순순히 당해 줄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욕심을 부렸다. 이래서 사람은 당해봐야 안다는 말이 있나보더라. 둘째한테 매달려 있지 말고 진작 널 후계자로 삼았다면 이번에 내가 이런 일을 당했어도 조직은 문제가 없었겠지.”
아니면 아예 문제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보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어쨌든 후계자 자리를 받아들인 걸로 알겠다. 내 진짜 후계자가 됐으니 밖에서 하던 일은 전부 그만둬라. 집에 다시 들어와.”
보스가 결정한 일에 한 번도 반발해본 적 없는 최관인지라 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계자 자리를 받아들이고 몇 주가 지났다.
최관은 아직도 체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몸에 자꾸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치솟았다.
특히 보스가 그녀와 비슷한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돌아다니신다는 걸 알기에 더 그랬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재활 운동을 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몸이 회복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가 회복이 더 빨랐던 것 같다.
‘역시 의사 말을 들었어야 했나.’
하지만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을 순 없었다.
그녀가 보스의 후계자가 되었기에 주변에서 그녀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그만큼 보스의 후계자 자리는 굉장히 무겁고 어려운 자리였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이게 뭐냐…멍청아….”
최관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어던진 최관은 흥건하게 젖어 있는 팬티를 보며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렇다.
그녀가 왜 그런 끔찍한 꿈을 악몽이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에 항상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을 때, 최관은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팬티가 흥건하게 젖을 만큼 말이다.
‘이 나이에 몽정을 하다니.’
한창 때의 여자들이나 하는 ‘몽정’.
그걸 지금의 그녀가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관은 자신을 구원하는 손길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난감한 거다.
‘욕심내지 않기로 했잖아!’
이미 조카에게 갔어야 할 후계자 자리를 빼앗게 된 최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형부까지 욕심을 낸다고?
물론 한 때는 형부를 빼앗고 싶다는 뒤틀린 욕망을 가진 적이 있다.
‘…지금도 썩 떳떳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최관은 연주 언니에게 경호원으로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형부와의 접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형부는 자신이 걱정이 되는지 자주 안부를 물어왔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사과를 하면서 대면대면하게 답장을 해줬다.
형부도 그녀의 대답을 통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점점 연락하는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계속 이런 태도로 형부에게 거리를 벌린다면 의도한 것처럼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사람 마음이 왜 마음대로 되질 않는 걸까.’
쉽게 마음을 끊어내는 게 가능 할 리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런데 괜찮지 않다는 걸 꿈을 통해 알게 됐다.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형부의 손이 수시로 꿈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흥건하게 적신 팬티가 익숙해질 지경이다.
최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에 최관은 오늘도 한숨을 늘려나갔다.
? ? ?
“태양아! 여행이야!!”
“꺄아!!! 여행! 좋아!”
넉살 좋은 태양이가 내 호들갑에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고 반응을 해줬다.
꺄륵꺄륵 웃는 태양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이걸 못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어휴, 북적북적한 것 좀 봐. 다 모이니까 장난 아니네.”
주아 누나가 집에 잔뜩 모인 인파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나는 질린 표정인 주아 누나와 달리 매우 행복한 상태였다.
하나 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 모두 내 여자이지 않은가?
주아 누나, 정화씨, 아현이, 복순 누나, 민영 누나 그리고 연주 누님.
거기에 메이드 역할로 비앙카와 칸나 멜리사도 함께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온 사람도 있지.’
메이 린과 조안나 그리고 란나씨.
세 사람은 각자 일이 바쁘기도 하거니와 특히 란나씨는 내 진짜 신분을 모르기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어찌됐든 내 여자들만으로도 9명이나 되는 대인원.
거기에 자식인 태양이와 정현이 현오까지 추가하면 총 12명이 된다.
나는 어느덧 이 세계에서 대가족을 이룬 것이다.
그 결과물이 눈에 보이니 절로 흐뭇함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가족 여행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다 같이 움직이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네.”
“저희가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비앙카가 섹시하게 눈웃음을 치며 주아 누나에게 달라붙었다.
영악한 비앙카는 이미 예전부터 주아 누나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앙큼한 여우짓을 해오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는 절대 무서운 모습도, 광기 서린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덕분에 주아 누나는 비앙카를 정말 괜찮은 여자로 생각하고 있다.
‘본 성격을 안 보여주는 게 낫긴 한데, 저렇게 오해를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좀 그렇단 말이지.’
비앙카와 멜리사, 그리고 칸나까지 모두 재벌 출신이라는 걸 알아서 어쩌다가 나 같은 놈한테 코가 꿰였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렇게 대가족이 거의 다 모인 건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끼리 수다가 장난 아니었다.
“아현이가 요즘 예술병 걸렸잖아.”
“예술병?”
“아앗! 언니! 안 돼요!”
“잘못 삐끗하면 중2병이야. 그래서 요즘 아현이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엄청 웃기다니까.”
“으앙!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뭔가 영감이 오면 성격이 그렇게 바뀌어버린다고요.”
“예술병 걸려서 명곡 만들어내고 있으니 아예 손해는 아니려나?”
복순 누나와 아현이 그리고 민영 누나끼리 뭉쳐서 대화를 나눴고, 주아 누나는 메이드(?)들과 여행 일정에 관련 된 얘기를 나눴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친분이 깊지 않은 연주 누님을 신경 써주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도 연주 누님의 큰 결심 덕분이지 않은가?
여행을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으니 이번 여행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누님, 현오는 저한테 맡기세요.”
“아, 현오가 투정을 부리네. 낯설어서 그런가봐.”
사람이 갑자기 많아지다 보니 그럴 수 있다.
“곧 적응해서 잘 돌아다닐 걸요? 그리고 현오가 태양이 좋아하잖아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태양이를 못 알아보는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친해져서 함께 놀 거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태양이가 힐끔힐끔 현오를 훔쳐 보고 있었다.
태양이는 자기가 형아 라는 게 좋았는지 지현이와 현오에게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
함께 있을 때면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아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