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화 〉 #61. 식사 (5)
* * *
“야, 안신애.”
“…….”
“안신애!!”
“…헉! 까, 깜짝아. 소리 안 질러도 들을 수 있거든? 나 귀 멀쩡해!”
“멀쩡하기는 개뿔. 귀가 멀쩡하면 뭐하냐, 정신이 딴데로 가 있는데. 요즘 너 왜 이래? 멍 때리는 시간이 엄청 많다고.”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많으니까 그런 거지.”
촬영을 하는데 가장 힘든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기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그 대기 시간에 멍 때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조잘조잘 잘도 말하더니 요즘에는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데?”
“그게말야….”
“응. 말해봐. 어떤 개소리든 다 들어줄 테니까.”
시애가 시무룩하게 있는 건 멤버들 입장에서 익숙하지 못한 일이었다.
언제나 강력한 텐션으로 체력이 떨어져서 늘어져 있는 멤버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어줬던 시애다.
그런데 그녀가 시무룩해져 있으니 멤버들끼리 있어도 분위기가 침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말이야….”
“응응.”
멤버들 모두 귀를 쫑긋 세우며 시애가 어떤 고민을 말해올지 기다렸다.
“기억이 안나.”
“응?”
“엉?”
“엥?”
“뭐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건데?”
“그러니까.”
“응?”
기억이 안 난다는 시애의 말에 멤버가 뭐가 기억이 안 나는 거냐고 물으니 대답이 ‘그러니까’다.
멤버들은 서로 시선을 번갈아바라봤다.
서로 친자매처럼 친한 이들은 눈빛으로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다.
‘넌 이해했냐?’
‘아니. 너는?’
‘나도 모르겠는데. 저게 뭔 말임?’
‘누구 이해한 사람 없어?’
‘아무도 없는 듯. 근데 설명이 좀 이상하지 않아? 못 알아들은 우리 탓이 아닌 것 같은데.’
눈빛으로 대화를 하며 결론을 내린 멤버들의 시선이 시애를 향했다.
정작 문제를 만든 시애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생각이 안 날까?”
“그러니까 뭐가.”
“나도 몰라. 뭔가 잊어먹은 것 같아. 근데 이건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래.”
“하…됐다. 얘 또 실없는데 빠졌나봐.”
“에이~ 난 또. 진짜 심각한 줄 알았네. 저러다가 말겠지. 냅두자.”
멤버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시애를 빠르게 포기(?)했다.
워낙 독특한 친구인지라 별의 별 사건을 만들어내는데, 이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작 본인은 진짜 심각해서 끙끙 앓고 있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으아아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당. 끄으으으!!”
시애가 결국 떠올리기를 포기하고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녀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하게 고미한 거였다.
“생각났어?”
“아니! 일단 포기할래!”
“중요한 걸 잊은 거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거야. 그냥 그때까지 잊고 있어.”
“응응. 그래야할 것 같아.”
중요한 게 아니어서 영영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해도 그다지 상관없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걸 잊은 것 아니겠나?
시애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시 평소처럼 발랄해져서 멤버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무거워, 임마!!”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감히 내 고민을 무시했겠다? 이얍! 이얍!”
“너 진짜 무거워어엇!!!! 나 죽는다! 숨 막혀!!”
꺄륵 꺄륵!
시애의 그룹 대기실은 어느새 그녀로인해 시끌벅적한 평소 분위기로 돌아왔다.
? ? ?
[나 : 요즘 잘 지내?]
[계약인 ㅅㅇ : 당빠죠! 엄청 잘 지내고 있슴다. 선배님은 요즘 어떠하십니까?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니까?]
[나 : 허허, 참으로 잘 지내고 있느니라.]
[계약인 ㅅㅇ :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나으리~]
나는 주기적으로 시애에게 연락을 해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을 했다.
이렇게 확인한다고 진짜 문제를 말해줄 것 같진 않았지만, 신경을 아예 끄고 살 수는 없었다.
완전히 기억을 지운 것은 아니기에 부작용이 덜하겠지만, 기억이 비면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시애가 걱정 됐기 때문이다.
내가 시애와 했던 계약의 전말은 이러했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 자체도 잊어버리는 계약.
내가 지정해놓은 ‘키워드’를 내 목소리로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시애는 비밀에 대한 기억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시애에게 ‘강제로 비밀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계약’이라고 한 거였다.
기억이 없으니 비밀을 말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너무 밝아서 부작용이 있는지 없는지 짐작이 안 되네.”
“응? 뭐라고 했어, 형?”
“아니야. 혼잣말이었어.”
“으아 떨린다. 저 형은 진짜 강심장이야. 떨리지도 않나 봐.”
“내가 떨릴 게 뭐가 있어?”
“애인 소개시켜주는 자리잖아! 그런데도 긴장이 안 된다고?”
“너희들이 내 애인을 두고 예의 없게 행동 할 애들도 아닌데 뭐 어때.”
태연하게 시애에게 안부 문자를 나눌 정도로 나는 여유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소개 받게 될 멤버들이 과하게 긴장을 하기 시작한다.
“TV로 봤을 때, 엄청 예뻐지셨던데….”
이들이 이렇게 긴장한 이유는 주아 누나의 위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니 엔터 연습생일 때부터 예쁘기로 유명하던 누나.
그뿐인가?
얼굴뿐만 아니라 실력도 뛰어나서 그녀를 롤모델로 삼던 연습생이 한 둘이 아니었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아 누나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던 거다.
“설마 누나가 첫사랑이라서 이렇게 긴장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의심스러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해주기로 했다.
“누나, 우리 왔어~”
드디어 집 앞.
거침없이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가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장 먼저 코끝을 자극해온다.
“실례합니다아~”
“우와아….”
“맛있는 냄새난다.”
긴장한 멤버들이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에 홀린 것처럼 졸졸졸 안으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진주아에요.”
주아 누나가 작정을 했는지 엄청나게 예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다.
누나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예뻤지만, 예쁘게 보이려고 본격적으로 꾸미면 그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족들 모두 얼굴로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주아 누나라고 인정 할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내 취향으로 직접 빚어 만든 민영 누나가 유일하게 주아 누나와 비벼볼 만한 급이긴 한데….
‘자연(?) 미인이 아니라서 이런 쪽으로는 자신감이 없달까.’
순수 모태 자연 미인인 주아 누나에게 자신이 감히 어떻게 비벼보겠냐며 손사레를 치곤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나이의 두 여배우 팬들이 실제로 두 사람의 미모를 비교하며 싸우는 걸 본 민영 누나가 직접 SNS에 올려 싸움을 막은 에피소드가 있다.
이후로 민영 누나는 본의 아니게 마음씨까지 착하다며 이미지 상승이 됐고, 주아 누나와 굉장히 친하다는 친분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세인 두 여배우가 예상보다 더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두 팬덤만 머쓱해진 사건이었다.
같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친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니….
‘자존심 싸움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더군다나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여배우의 세계는 한 차원을 건너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 세계가 좀 더 치열하다고도 볼 수 있다.
유난히 예쁜 여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압도적인 1%의 여자들만이 될 수 있는 여배우.
그렇게 여배우가 되었음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살아남아야 하니 말이다.
그걸 알기에 그녀들의 팬들도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가 최고라며 싸웠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해솔이랑 같은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멤버 강경태입니다.”
“오랜만이네요. 해솔이한테 소식 전해 들었어요.”
“어?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저! 저는 남은규라고 합니다!!”
“잘 왔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주아 누나와 멤버들이 일단 어색하게나마 서로 인사를 나눴다.
“형, 완전 부러워요. 너무 예쁘셔서 말이 안 나오는데요?”
기우연이 내 귓가에 속삭인다.
주아 누나를 칭찬하는 것이었기에 킥킥 웃으면서 우연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너도 나중에 이쁜 여자 만나면 되지. 여사친들 중에는 없어?”
“에이! 친구라니까여? 그리고 저렇게 예쁘신 분이 흔치 않단 말이에요! 형은 운 좋은 줄 아셔야 해요.”
“흠, 반박하는 건 아니지만, 내 얼굴도 만만치 않게 귀한 얼굴 아니야?”
“으음, 반박할 수 없어서 너무 분하네요.”
다른 멤버들 모두 주아 누나의 미모에 제대로 홀린 모양이다.
제일 진중한 성격인 제키마저도 주아 누나의 실물을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 좀 봐.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니까.”
그때, 주아 누나가 방에 갔다가 정화씨를 깨우고 왔는지 둘이서 함께 나타났다.
‘이런.’
나는 정화씨의 모습을 확인하고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은데, 자다 깬 정화씨가 엄청난 색기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화씨가 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자면 나랑 실컷 섹스하고 나서 푹 자고 일어났을 때라고 할까?
“어어어?”
“누구…세요?”
멤버들은 정화씨를 향해 누구지? 하는 눈치였다.
정작 사정을 모르는 정화씨는 그런 멤버들을 향해 따스한 눈웃음을 보여줬다.
본의 아니게 흘러나오는 색기에 아주 야한 웃음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어서 와요.”
“주아씨 친언니세요?”
경태 형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온다.
사실 지금 정화씨를 보면 20살이 넘은 장성한 딸이 있는 아줌마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주아 누나의 친언니라고 오해하는 게 당연해질 만큼 정화씨는 시간을 역행하는 중이었다.
“호호,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다들 참 착하네요. 주아 엄마에요.”
“허억! 어, 어머님이시라고요!?”
“언니신 줄 알았어요. 엄청 동안이시다. 못 믿을 정도에요!”
“자꾸 띄워주니까 민망하네. 호호,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주아가 최대한 신경써서 준비한 건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해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그래요.”
정화씨가 능숙하게 정리를 해주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많이 가셨다.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 되자 정화씨의 활약은 더 빛이 났다.
멤버들이 밥을 먹는 거에 방해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질문을 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다.
정화씨가 도와주니 주아 누나도 마음이 편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해솔이가 멤버들 사이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많이 됐어요. 해솔이가 자기 얘기는 잘 안 하는 편이거든요. 얘기를 잘 들어주는 건 좋은데, 이럴 땐 조금 서운해질 때가 있어요.”
“아~ 저희도 그거 알고 있어요! 저희는 막 형한테 상담도 하고, 부탁도 하고 그러는데 형은 그런 게 없거든요. 물론 형이 잘나서 혼자서도 잘 한다는 건 알지만요….”
“조금은 우리한테 기대도 괜찮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특별하게 노력을 들인 것도 아닌데, 정화씨는 능숙하게 멤버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얼떨결에 나도 몰랐던 멤버의 속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연이가 한 말에 다른 멤버도 맞장구를 치는 걸 보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형으로 불러야 하는 멤버가 있어도 나한테는 하나같이 어린 애들인지라 무언가를 상의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애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나는 선뜻 도움을 줬다.
그러나 내가 애들한테 도움을 받는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서 그걸 서운해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기우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성인이어도 스물 초반이라 이런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너희들은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해.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큼 힘들었던 일이 없었던 것도 있고.”
“그럼 만약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도와달라고 할 거야?”
“응. 당연히 그럴 거야.”
본의 아니게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게 됐다.
정화씨와 주아 누나는 멤버들끼리 사이가 좋다는 걸 확인하고 흐뭇했는지 태양이를 볼 때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들이 내 엄마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