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 #62. 하나 얹고 하나 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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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정말 죄송해요. 상처 받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란나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아요. 제가 제대로 못 살아서 생긴, 제 부족이죠. 아, 그나저나 되게 부끄럽네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얼굴이 붉어진 거지만, 란나씨는 철썩 같이 믿어버린 눈치였다.
앞으로 나한테 친구 소개 시켜 달라는 말은 절대 안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죠! 저도 학창시절에 친했던 친구들이랑 다 연락하고 지내는 거 아닌데요, 뭐.”
란나씨는 나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친구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듣다 보니 내 지구에서의 친구 녀석들이 생각났다.
그놈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 녀석들이 이 세계에 왔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남자였던 친구 녀석들.
여자들이 잔뜩 있는 이 세계에 온다면, 내가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예쁜 여자들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몸부터 들이 댔을 거다.
아마 나 못지않게 여자를 거느리고 다니지 않았을까?
그 유쾌한 녀석들을 란나씨에게 소개시켜주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내 친구들과 란나씨는 제법 잘 통하는 사이가 됐을 것이다.
“친구는 없어서 소개 못 시켜주지만, 집은 초대할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저는 집으로 초대해주는 걸로 충분해요!”
내가 마련해준 살 길을 란나씨가 냉큼 물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친구가 없어서 소개를 못 시켜주는 것이었음을.
“지금 당장 가고 싶어요?”
당장 그녀를 데려가는 것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거기에 있는 거라고는 먼지 쌓인 가구들밖에 없다는 점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너무 오랫동안 가보지 않아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생활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그런 싸늘한 집일 거다.
그런 곳을 내 집이라고 란나씨한테 보여준다는 게 썩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진짜 생활하는 따듯한 '우리 집'을 보여주고 싶지만,그랬다간 난리가 나겠지.'
아무튼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땐 항상 란나씨의 거처로 가거나 모텔 같은 곳을 애용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빈집으로 보일 그곳에 그녀를 초대할 순 없으니 말이다.
“사장님이 괜찮다면요.”
내겐 썩 내키지 않은 일이지만, 란나씨한테는 기대하던 일이었나보다.
내 말에 냉큼 가고 싶다는 뜻을 내보인다.
“흠, 정말 볼 게 없을 텐데. 알다시피 제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거기서 자주 생활하질 않거든요. 국내로 들어오면 항상 란나씨를 만나서 집에 들어갈 일이 더 없어졌고요.”
“괜찮아요. 아! 당장 제가 방문하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다음에 가도 좋고요.”
착하기는 또 착해서 내가 불편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배려의 말까지 해준다.
이렇게까지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인데 실망시킬 순 없지.
“부담 아니에요. 근데 내집을 보고 실망할 것 같아서 걱정하는 거죠. 생각보다 별로일 거에요.”
"안 그래요! 단칸방을 보여줘도 저한테는 소중한 시간이 될 거에요."
"그럼 당장 갑시다. 일어나요."
결국 란나씨와 나는 비앙카가 마련해준 집을 향해 움직이기로 했다.
란나씨가 보고 싶다면 봐야 하는 게 맞는 거다.
내 집을 보고 싶은 이유가 나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고 싶기 때문이라지 않은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좀 이상해 보이긴 하겠지만 내가 이곳저곳 자주 다닌다는 거 아니까 이해해주겠지.’
여기서 나중으로 미루면 서로 신경 쓰느라 피곤해질 것 같다.
그나저나 란나씨가 내 집을 궁금해 할 줄이야.
이건 좀 감동해도 되는 부분 아닌가 싶다.
이러한 행동들이 결국 나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리는 욕심이지 않겠는가?
‘이참에 밀어붙여서 결혼도 해버릴까? 내가 사는 꼴을 보고 깜짝 놀라서 결혼하자고 할 수도 있잖아.’
아직 그녀와는 갈 길이 멀었다.
언젠가는 란나씨에게 내 진짜 신분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결혼도 못한 상황에서 너무 까마득한 미래의 얘기이긴 했지만 말이다.
'나라고 가짜 신분으로 그녀의 곁에 있는 게 좋지만은 않다고.'
선녀와 나무꾼에서 사슴이 나무꾼에게 해준 말이 있다.
선녀가 아이를 4명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주지 말라고.
선녀가 도망칠 때 3명은 데려가도 4명은 챙길 수 없으니 그런 소릴 한 거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도 그 부분은 사슴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으면 추한 짓을 해서라도 붙잡아야지. 병신처럼 양심 챙기자고 놓치라고? 나는 그런 거 못 봐준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붙잡아서 내 곁에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내 아이를 낳는다면?
말할 것도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
내가 가족에 대한 묘한 집착이 있는 터라 ‘가족’이라고 인식이 되어 있는 존재는 절대 손아귀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와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는 거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확실한 연결 고리가 있어야 진실을 알려줬을 때 도망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너무 쓰레기 같은 생각인가?’
내 생각을 남이 들으면 아이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아이한테도 미안한 생각인 건 알지만, 엄마 아빠가 헤어지지 않기 위한 일이니 이해해줬으면 한다.
“여기가 제 집이에요.”
카페에서 얼마나 이동했을까?
비앙카가 쓰지도 않을 집을 쓸데없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마련해둔 덕분에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더 이곳에 오지 못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가게 건물 위층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장소가 있어서 필요하다면 그곳을 주로 이용했다.
카페 위층에 간이 침대를 놓고 가끔 그곳에서 란나씨와 데이트를 즐기고 또 란나씨가 휴식할 때도 쓰였다.
그곳만으로도 충분히 생활공간이 돼서 따로 집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으나비앙카는 가짜 신분이니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며 굳이 집을 구매해놨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확실하게 준비해둬야 들킬 위험이 줄어든다는 이유였다.
‘비앙카 말 듣길 잘했네.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집에 데려가 달라고 했는데 정작 지내는 집이 없다고 했으면...상상만으로도 아찔하네.’
친구도 없고 집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황당할까.
결국 구해 놓으니 이렇게 쓰이게 되는 거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준 비앙카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날려봤다.
“…정말여기가 사장님 집이에요?”
란나씨는 내 집을 확인하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이렇게 놀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 된다.
나는 이렇게 큰 집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평수가 적더라도 가족들과 복작복작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더 좋다.
그런데 비앙카가 구해 놓은 집은 쓸데없이 넓고 웅장하며 화려하기까지 해서 봐도봐도 정이 가질 않았다.
“이 정도 건물에 꼭대기 층이면…펜트하우스 아니에요?”
“음, 아마맞을 걸요.”
아파트, 호텔, 주상복합 등 고층 건물 상층부의 고급스러운 주거공간을 펜트하우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의 전망은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는 빌딩의 불빛 덕분이다.
도시의 야경이 창문 아래로 펼쳐지니 란나씨가 한동안 넋을 잃고 압도적인 광경에 매료 되었다.
그녀가 창밖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에 나는 오랜만에 들어 온 낯선 집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먼지가 없네? 치우는 사람을 고용해놨구나.’
이곳에 언제 들어와 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났는데, 의외로 먼지 하나 쌓여 있지 않은 깔끔함을 자랑했다.
이 정도로 깔끔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람 손을 탔다는 뜻이었다.
'먼지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여전히 별로 정이 안 가는 집이야.'
“사장님! 여기 전세에요? 자가에요?”
“자가에요.”
“아...역시 그렇구나. 건물도 갖고 계신 분이니 그럴 줄 알았어요.”
최고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본 란나씨의 표정이 매우 복잡해보인다.
이 집이 내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속물이든, 그런 사람이 아니든 보통 애인이 돈이 많으면 좋아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부담스러워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어요. 내가 가진 재력이 우리 관계에 변화를 줄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나잖아요. 사장님은 도대체 절 왜 만나시는 거에요? 전 정말 평범한 사람이에요. 지금이야 사장님 덕분에 카페 사장님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취업을 걱정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고요.”
어디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는 그녀.
어디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는 나.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었기에 란나씨가 저렇게 말하는 걸 거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란나씨가 너무 평범해서 놀랐지.’
칠리라는 요정이 저 여자를 콕 짚어서 임신 시키라고 했다는 건 그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만나 본 란나씨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한 대학생에다 붉은 머리카락에 주끈 깨가 있는, 어딘가 비슷한 사람 한 명쯤은 있을 법한밝은 성격의 여성.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줄 아는 성격이라는 점이 그나마 특별하다면 특별할 것이다.
확실히 란나씨는 나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말이다.
란나씨까 정말 특별했다면, 내가 그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을까?
“꼭 특별해야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건가요? 제가 꼭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해요? 평범하면 사랑할 수 없다는 법은 없잖아요.”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무슨 차이요? 키 차이? 나이 차이? 취향 차이? 그런 거 문제 없지 않나, 우리?”
"사장님, 제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내가 란나씨랑 차이가 있는 건 그거 말곤 없어요. 다른 건 몰라."
나는 란나씨의 평범함이 좋다.
그 평범함이 우리가 거래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난 인연이라는 생각을 잊게 해준다.
그녀가 특별했다면 나는 그 녀석과 거래를 했던 걸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란나씨와 함께 있을 땐 진해솔이라는 아이돌이 아니라 지구에서 살던 나로써 만나는 기분이 든다.
주로 남들이 할 법한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걸 즐기기에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사실 예전부터 란나씨가 제가 가진 것들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근데 재력이 사랑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제 사랑은 란나씨와 함께 한 추억들로 만들어졌어요.”
“사장님….”
“란나씨가 부담스러워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걱정도 했어요. 그래서 그동안 최대한 티 안 내려고 열심히 숨겼고요. 근데 오늘 저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잖아요. 그 말 거짓말이었어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건데요? 고작 이런 걸 부담스러워하면 뭐 어떡하려고요? 나랑 헤어지기라도 할 겁니까?내가 란나씨한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에요? 하, 이래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손해라고 하나 봐.”
내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란나씨가 억울해졌는지 외쳤다.
“말도 안 돼요! 저보다 사장님이절 더 좋아한다뇨!아니에요!! 사장님보다 제가 더 많이 좋아해요!”
“내가 보기엔아닌 것 같은데요?결혼 얘기 나왔을 때, 난 좋다고 했는데 란나씨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와~ 다시 생각하니까 또 서운해지려고 하네.”
미안하지만, 오늘 좀 징징거릴 거니까 란나씨가 이해 좀 합시다.
내가 삐진 것 같아 보이자 란나씨가 초조해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제대로 된 프러포즈가 아니어서 아니라고 했던 거죠!”
“그럼 란나씨는 프러포즈 해줄 마음이 있긴 한 거에요?”
“물론이죠!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렇게 얼렁뚱땅 프러포즈를 하겠어요?!”
“알았어요. 그럼 란나씨 믿고 프러포즈 기대하고 있을 게요. 근데 너무 늦게는 하지 말아줘요.”
“어…그…어? 네?! 프러포즈요? 아니, 갑자기 얘기가 왜 이런 식으로 진행 돼요?!”
서로 내가 더 좋아한다고 하다가 갑자기 프러포즈 얘기로 넘어가니 란나씨가 환장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안 할 거에요?”
언제까지 간만 볼 거니, 응?
이제 우리 가족하자.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아.
허락만 해.
내가 평생 책임지고 너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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