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화 〉 #62. 하나 얹고 하나 더! (4)
* * *
사람 마음을 쫄리게 하는데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는 란나씨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시간을 끈다.
란나씨가 대답을 할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 그만 넘어와!
간 좀 그만보자. 응?
이대로 실패하는 건가 싶어 초조해져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렇게 인내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란나씨가 입을 열었다.
“아, 안 할 건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아직 결혼은 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요? 마,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와~ 이걸 거절한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 진짜 오기 생기네.’
이쯤 되자 이 여자가 나랑 결혼할 마음이 없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우리가 만난 게 몇 년째인데 성급하다고해요? 란나씨는 불안하지도 않아요? 나 다른 여자한테 뺏길 거에요?”
다른 여자들은 나를 남한테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름 질투도 하고 집착도 하는데, 란나씨는 그런 게 없다.
그녀와 만나 사귀게 된지 3년이 넘어간다.
마음이 조급했던 게 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게 못된 말을 해버렸다.
뒤늦게 말하고나서 아차한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해요.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도 그런 못된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아니에요! 사장님은 잘못 없어요. 제가 여자답지 못하게 굴어서 그렇죠. 저야 말로 죄송해요.”
원래 여자가 남자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리는 게 보통이다 보니 란나씨도 머릿속이 복잡한가보다.
분명 기분이 나빴을 텐데 나를 흔쾌히 용서해준 란나씨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로 말했다.
“이제 우리 관계를 확실하게 다질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꼭 여자가 프러포즈 하란 법도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프러포즈해도 될까요?”
“네에?! 사장님이 프러포즈를 하신다고요?”
경악하는 란나씨.
근데 나한테 프러포즈는 이미 몇 번 해봤던 일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
애초에 지구에서는 남자가 프러포즈 하는 게 대부분이지 않은가?
“왜 이렇게 놀라요? 프러포즈 한다고 해서 기겁한 건지, 아니면 결혼하자고 하는 게 싫어서 기겁한 건지 구분이 안 가잖아요.”
“아휴,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리해서라도 란나씨에게 확답을 받아내야겠다고 다짐한 참이니 란나씨가 정신 없어 할 때를 노려보기로 했다.
“잠깐 시간 좀 주세요. 저 숨 좀 쉬자고요.
“그렇게 시간 줬더니 결국 나중에 하자면서요. 결혼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이 사람은 나랑 평생 함께 할 사람이라고 도장 찍어 두는 거요. 그러니까 나한테 도장 찍어요. 나도 당신한테 도장 좀 찍어두게.”
“설마 진짜 프러포즈 하려는 거에요?”
“네. 그럴 건데요?”
“안 돼요! 프러포즈를 사장님이 왜 해요. 아무리 제가 여자답지 못하게 굴어도 프러포즈는 제가 해야죠. 저도 자존심이 있단 말이에요.”
드디어 란나씨 입에서 프러포즈를 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힘들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정말요? 기다리면 프러포즈 해주는 거에요?”
“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프러포즈 하면 안 돼요. 무효에요!”
“당연하죠. 저 프러포즈 한 적 없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반지 맞추러 갈까요? 프러포즈할 때 그 반지로 해주면 되잖아요.”
반지를 맞춰놔야 이 아가씨가 딴 말을 안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란나씨가 내 두 손을 꽉 붙잡고 필사적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제발 진정하세요. 막 집에 왔는데 바로 나가자고요? 시간이 벌써 8시가 넘었어요! 가게 문 다 닫았을 거라고요.”
“아~ 그러네. 시간이 많이 늦긴 했네요.”
비앙카한테 말하면 닫힌 가게 문도 다시 열게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럼 란나씨가 또 기겁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다만 내 미련을 읽었던 걸까?
란나씨가 다급하게 이어서 외쳤다.
“그리고 저 사장님 집 구경하러 왔잖아요. 아직 구경 하나도 못했단 말이에요.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요.”
“음,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우리 집 구경하러 왔는데 거실만 보고 갈 뻔했네요.”
“휴우~”
자꾸만 급발진을 하는 나를 겨우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는지 란나씨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속으로 씨익 웃고, 그녀가 안도하는 걸 보지 못한 척 시치미를 뗐다.
“우리 결혼하고 나면 란나씨가 여기서 살 수도 있으니까 잘 살펴봐요. 인테리어 바꾸고 싶은 부분 말해주면 그대로 해줄게요.”
“!!”
결혼하면 집을 합쳐야 하는 거고, 기왕이면 큰 집에서 사는 게 서로를 위해 낫지 않겠는가?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은, 서늘하기만 한 이곳도 란나씨의 손때가 묻기 시작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살라고요? 제가요?”
“아니면 제가 란나씨 집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에엣?! 이런 집을 두고 제 집을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죠. 결혼하면 같이 살아야 하니까. 선택은 란나씨한테 맡길 게요.”
누가 봐도 내 집이 우월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를 낳을 걸 생각해보면 우리 집에서 사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헌데 란나씨는 그 부분까지는 생각을 못하겠는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곤란해 했다.
“제 집은 사장님이 사시기엔 너무 누추해요!”
“그럼 여기서 살면 되겠네요.”
“여기는 저한테 너무 과분한 집인데요?”
“그럼 우리 결혼까지 해놓고 따로 살아요? 결혼하면 곧 아이도 낳을 텐데?”
“!!!”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둘 다 선택지가 곤란한 상황.
덕분에 란나씨가 살짝 망가진 것 같다.
“아…으…아아…!”
너무 괴롭혔나보다.
귀엽다고 계속 건드리는 건 안 될 것 같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머지도 구경해야죠?”
망가진 란나씨의 손을 잡고 다시 집 탐험을 시작한다.
집을 구경하는데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보였지만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이 방이 햇빛이 잘 들어와서 침대 놓고 안방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아기방으로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사, 사장니임!!”
“하하하, 알았어요. 오늘은 그만할게요. 이제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뭐할까요? 와인 한 잔 할까요?”
“네!!”
란나씨가 이렇게 망가진 건 비앙카가 돈지랄로 인테리어를 해놔서인 덕도 좀 있었다.
내가 봐도 부담이 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인테리어였다.
란나씨를 데리고 다시 거실로 와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와인을 꺼내왔다.
쪼로로록!
와인 잔에 레드 와인이 찰랑이고, 란나씨가 와인을 맥주 마시듯이 꿀꺽꿀꺽 마셔댔다.
“괜찮아요?”
“네에, 이제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요.”
“어땠어요? 이 정도면 들어와서 살만 하지 않아요? 사실 제가 디자인해서 꾸민 게 아니라 돈 주고 맡긴 거라서 란나씨가 들어와서 살면 손대야 할 곳이 은근 많을 거에요. 저는 거의 대부분 출장을 다니다 보니 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아~ 어쩐지 그래서….”
“엄청 화려하죠? 제 스타일대로 꾸민 건 아니에요. 그냥 인테리어 디자이너 스타일이죠. 그러니까 란나씨가 이 집에 들어오면 취향대로 바꿔줘요. 지금 이 집이 제 마음에 쏙 드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이 집을 막 바꾸라고요…? 굳이 손댈 곳 없이 완벽해보이는데요?”
“좀 정 없지 않아요? 싸늘하고 차갑고. 전 란나씨 집 같은 곳이 더 좋아요. 그래서 이곳도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고요.”
“비싸게 하셨을 거잖아요. 인테리어 바꾸는 게 한 두 푼으로 되는 게 아닌데….”
“여기까지 보여줬으니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제가 돈 걱정 할 처지는 아니라서요.”
란나씨가 내 말에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억누르고 있던 부담감이 다시 올라오는 듯하다.
“…이런 곳을 자가로 갖고 있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하는 거에요?”
“제가 막 재벌들처럼 엄청나게 돈이 많은 건 아니에요. 갖고 있는 재산은 카페 건물이랑 이 집이 전부거든요. 그 외에 재산은 전부 주식으로 투자 되고 있어요.”
“주식 하세요?!”
“네. 일하면서 번 돈도 돈이지만, 투자로 번 돈이 꽤 됩니다.”
비앙카와 멜리사가 제대로 각 잡고 내 돈을 불리기 시작한지 꽤 됐다.
내가 순수하게 아이돌로 일하며 번 돈이 우스울 정도로 그녀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성과가 대단했다.
“투자로 돈 벌었다는 사람 처음 봐요. 보통은 주식으로 돈 날린 사람들만 수두룩하잖아요. 제 친구들 중에도 주식하는 애가 있는데, 항상 돈 날렸다면서 퀭해져서 술 마시고 그러거든요.”
“제가 운이 좋은 편이죠. 그리고 저는 돈을 전문가한테 맡겨놨어요. 그러니까 대단한 건 제가 아니라 돈을 굴려주는 전문가인 거죠.”
술이 들어가니 확실히 대화가 훨씬 매끄럽게 진행 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란나씨의 표정과 목소리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오늘 집을 구경하면서 느꼈던 궁금함을 술기운을 빌려 용기내서 묻기 시작했다.
“제가 이런 집을 갖고 있으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집에만 붙어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쩐지 집에 있는 가구들이나 물건들이 전부 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 그게 티가 났군요. 사실 사놓긴 했는데 쓴 적이 거의 없긴 해요. 쓰던 것만 계속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낭비한다고 생각할까봐 숨겼던 건데.”
“안 좋은 습관이에요! 안 쓰는 물건 사 모으는 거.”
란나씨의 호된 지적에 내가 깨갱했다.
“앞으로는 자제할 게요. 살 때만 해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들어오질 않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고칠게요.”
“두고 볼 거에요! 근데 이 아까운 물건들, 다 어떡하실 거에요?”
“저는 여전히 집에 잘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냥 이 자리에 계속 이러고 있겠죠? 아니면 란나씨가 저 대신 써주면 안 될까요?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란나씨가 부담 돼서 싫다고 하면 얘네들은 그냥 계속 여기에 두면 되니까요.”
“!!!”
애초에 내 것이라는 생각도 안 하고 있던 물건이니 란나씨가 요긴하게 써주면 물건 입장에서도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냥 팔아버려요!”
“에이, 그건 아니죠. 다 새것들인데 중고로 판매하면 값이 반 이하로 뚝 떨어져요.”
사실 명품 중에는 중고라도 값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부분까지는 란나씨가 알지 못하는 일이었고, 덕분에 성공적으로 란나씨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건 너무 아까운데….”
“그죠? 아깝죠? 그러니까 란나씨가 잘 좀 써줘요. 그럼 얘네도 여기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 훨씬 기뻐할 거에요.”
“으으으…미칠 것 같아. 제 몸보다 비싼 것들을 어떻게 쓰고 다니죠? 제가 그 물건들을 모시면서 다녀야 할 것 같은데.”
“하하, 자꾸 쓰다보면 익숙해질 거에요. 그래봤자 가방이고, 옷이고, 악세서리일 뿐이니까요. 물론 망가져도 상관없어요. 제가 설마 란나씨한테 물어내라고 하겠어요? 참! 오늘 현관 지문 등록해놔요. 나 없을 때도 막 들려서 물건 가져가서 쓰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더 부담 되는 거에요. 저한테 너무 과분한 것들이니까. 저도 사람인지라 저런 것들에 혹할 수밖에 없기는 한데…. 이러다가 제가 못된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이러세요?”
“못된 짓이요? 결혼하면 어차피 다 공유하게 되는 건데 그게 왜 못된 짓이에요. 당연한 거지.”
카페도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맡겨주고 있는데, 집도 빌려주겠다고 하고, 자기 물건도 빌려주겠다고 하는 이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지금이야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결국 같이 살려면 그녀가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란나씨의 어깨에 하나씩 손을 얹고 이 부분을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저한테는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란나씨도 이 부분은 받아줘요. 여기까지만 욕심내고 다른 부분은 란나씨한테 맞춰줄게요. 우리가 계속 함께 하려면 서로가 서로한테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사장님은 저한테 뭘 맞춰주실 건데요?”
오늘 나한테 당한 게 많은 란나씨가 서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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