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 #63. 축하 파티 (4)
* * *
“근데 제대로 된 파티면 거기 입고 가야 할 옷도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헉! 그럼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아니야? 옷 사야지!”
다들 제 몫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옷을 사야한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빼줘!”
불길함을 느낀 내가 재빨리 발을 빼려고 했으나.
“어허이! 안 돼.”
“어디 혼자서 꿀을 빠시려고. 너도 파티장에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옷 사러 가야겠지?”
역시 실패했다.
여자들이 날 놔줄 생각이 없었거든.
“난 옷 많은데?”
“응, 그래도 안 돼.”
“이거 하나 이번 기회에 정장 하나 맞춰.”
“파티 드레스 코드는 여배우로 하자!”
“여배우?”
“예전에 아현이가 나 시상식에 드레스 입었던 거 보고 부러워 했었거든.”
“앗! 언니! 그거 비밀인데.”
주아 누나의 말에 아현이가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돼. 예쁘게 꾸미는 거 싫어할 사람이 어딨니? 그러니까 이번 컨셉은 여배우인 거야. 다들 시상식에 가는 것처럼 꾸며보자.”
우리 가족 중에 여배우는 민영 누나와 주아 누나 둘이다.
평소 그녀들을 도와주는 스태프에게 도움을 받으면 다른 여자들도 얼마든지 여배우처럼 꾸미는 게 가능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돈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화장이랑 머리 같은 건 어떡하지?”
“걱정 하지 마. 내가 아는 스탭들 하루 고용하면 되니까.”
“내 스탭들한테도 하루 부탁할게!”
주아 누나와 민영 누나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다른 여자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꺄악! 너무 재밌겠다. 나 이런 거 너무 해보고 싶었어.”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더 재밌을 것 같아.”
“이럴 게 아니라 1년에 한 번씩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평범한 여자가 꾸며봤자 얼마나 꾸며봤겠는가?
이번 파티에서 전문가들의 손길을 받아 제대로 꾸며볼 심산인 것 같았다.
“정말 드레스 코드로 시상식 복장을 하는 거야?”
“왜? 너는 마음에 안 들어? 장소도 엄청 좋은 곳으로 빌려놨으면서?”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파티 규모가 커질 것 같아서 그렇지.”
그렇게 공들여 꾸며놓고 하는 일이 우리끼리 하는 파티가 전부라면 좀 허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내가 생각한 파티는 그냥 다들 모여서 근사한 코스 음식을 먹고 가볍게 술을 즐기는 자리였다.
집에서 하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니 외식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 가게를 빌린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꾸민다고 하니 뭔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이었다.
“파티는 그냥 네가 계획했던 대로 해. 우리도 거창한 파티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맞아. 추억 만들기지, 뭐. 여자들 꾸미는 거 좋아하는 거 알잖아.”
여자들도 대단한 파티를 바라고 꾸미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 꾸밀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고, 파티는 그저 좋은 구실이 되었을 뿐인 거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내 여자들이 예뻐지면 나만 노난 거 아닌가?’
내 여자들이 예뻐지면 그 수혜를 받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그녀들의 남자인 나다.
지금도 아름다운 그녀들이 제대로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 꾸민다면 얼마나 예뻐질 수 있을까?
나는 벌써부터 불끈해지려는 아랫도리를 황급히 조절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을 그녀들을 위해 아무래도 코인 주머니를 조금 더 풀어야 할 모양이었다.
? ? ?
“어, 어때요?”
“저번에 내가 가르쳐준 걸 잘 써먹었는데? 잘했어. 점점 실력이 늘어나는 게 보인다.”
“히히!! 정말요?”
시애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수업.
대단한 걸 가르치는 건 아니고, 기초 드로잉과 투시도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그걸 응용한 그림을 숙제로 내줬다.
그리고 시애는 내가 가르쳐준 것을 찰떡같이 익혀서 숙제를 제대로 해왔다.
바빴을 텐데도 내준 숙제를 정성을 들여서 해온 것을 보고 있으니 가르칠 맛 나는 학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드로잉 연습도 정말 많이 했더라. 포즈를 굉장히 다양하게 그린 것도 굉장히 좋았어.”
시애가 해보고 싶은 취미의 궁극적인 목표는 웹툰이다.
“여러 포즈를 그리면서 이제 표정도 그려보자. 웹툰을 그리려면 표정이 중요하거든.”
“넵! 표정! 알겠습니다.”
“일단 내가 다양한 표정을 알려줄게.”
시애는 수업 받는 선생을 즐겁게 할 줄 아는 학생이었다.
수업 태도가 워낙 좋다보니 그렇다.
이걸 가르치면 저것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고나 할까?
덕분에 시애의 수업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흘러갔다.
삐빅 삐비빅
“어? 벌써 끝이에요?”
“응, 그러네. 배고프지 않아?”
“군것질을 해서 배가 막 고프진 않은데, 그래도 시간이 됐으니까 먹긴 먹어야겠죠?”
시애랑 나는 뭘 먹으러 갈지 상의했다.
내가 괜히 시애랑 잘 지낼 수 있는 게 아니듯 우리는 선호하는 식성이 비슷해서 뭘 먹든 서로 취향에 맞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여기 근처에 곱창 맛집 있다는데 어떠세요? 혹시 그런 거 못 드세요?”
“아니, 좋아해.”
곱창도 좋아하고 막창도 좋아한다.
내 말에 시애가 활짝 웃었다.
“와! 다행이다. 제 주변에 곱창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배달시켜서 먹거든요. 근데 이런 거는 원래 가게에 가서 먹어야 제 맛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거기 가게로 가자.”
나도 오랜만에 곱창을 먹을 생각을 하니 입맛이 다셔졌다.
“그 집 냄새도 하나도 안 나고, 안에 곱이 꽉 차서 진짜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시애가 호언장담한 대로 곱창은 굉장히 맛있었다.
우리는 모둠을 시켜서 곱창, 막창, 대장을 골고루 먹고 곱창전골까지 야무지게 흡입했다.
“후와~ 배 터질 것 같아요.”
“그러게. 엄청 먹었다.”
시애도 2인분은 먹은 것 같고, 나도 2인분~3인분 정도 먹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밥을 먹고 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애가 산책하는 걸 좋아해서 배를 꺼트릴 겸 근처를 걷기로 했다.
시애의 집 근처에는 사람 보기 힘든 산책로가 있었다.
“요즘 특별한 일은 없어?”
나는 이 시간에 주로 시애의 생활에 대해 묻는 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계약의 후유증이 사라지고 있는 걸로 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허한 느낌이 들어서 고민이라던 시애였다.
“딱히 없어요. 스케줄 줄고 휴가 받아서 엄청 편하게 쉬고 있는 걸요. 특히 선배님 덕분에 그림에 취미를 두고 나서부터는 스트레스 받지 않아서 그런지 멍 때리는 일도 사라졌고요.”
“진짜 다행이네.”
“선배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취미를 갖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던 생활에서 즐길 수 있는 게 생겼다.
시애는 새로 생긴 취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더욱이 실력이 쑥쑥 늘어나니 안 재밌을 수가 없는 거다.
나도 처음에 그림 능력을 올리고 난 이후 그리는 것에 푹 빠졌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워낙 다양했기에 이젠 잘 쓰지 않게 된 재능이지만 말이다.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요.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손을 놓고 있었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그림 그리는 거에 푹 빠진 게 보여서 좋네. 개인적으로 이런 취미 갖는 게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한텐 꼭 필요하다고 봐.”
“나중에 계약 끝났을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응.”
활동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아두면 먹고 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기는 할 거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뭐든 앞날을 준비해둬야 한다.
아예 돈을 벌 방법이 사라져버리면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워지니 말이다.
돈이 많다고 평생 놀고먹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제가 정말 그림으로 먹고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배워놓으니까 미래를 생각할 때 불안감이 덜하더라고요.”
“맞아. 그래서 나도 여러 가지를 배우고 다니는 거야. 작곡도 배우고.”
“에이~ 선배님은 솔직히 그런 거 배울 필요 없죠. 평생 연예계에서 잘 먹고 잘 사실 텐데. 얼굴이 워낙 사기잖아요. 만약 제가 선배님 같은 미모를 갖고 있었으면 게으르게 살았을 것 같아요.”
“이것도 어쩌면 자격지심이려나? 내가 연습생 생활을 오래 안 하고 바로 데뷔조에 들었거든. 얼굴 덕분에. 그래서 실력을 더 열심히 올렸던 것 같아. 대게 비주얼 멤버로 합류하면 실력 없다고 욕을 많이 듣잖아.”
“아~ 그런 부분이 있기는 하죠. 근데 악플은 뭔 짓을 해도 욕을 하는 놈들만 쓰는 거잖아요. 선배님 혹시 악플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산책을 하면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시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두운 산책길을 걸어가던 우리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시애를 친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여자와 남자 사이였다.
특히 시애는 한창 때의 여자인지라 나에 대한 호감을 아예 버리지 못했다.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애를 동생으로 여기겠다고 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에 대한 호감이 쌓여갔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먼저 접근하지는 않는데….’
요즘에는 자제를 하던 것도 한계에 도달했는지 은근한 스킨십이 늘었다.
저번에는 산책을 하다가 내게 팔짱을 끼려고 하더라고.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닌 척 팔을 피했는데, 만약 이 분위기에서 스킨십을 시도하면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한 마음으로 얘가 더 이상 동생으로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자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서투르게 스킨십을 하는 것도 귀엽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이미 얘한테 감겼는데 부정해봤자 뭐하겠는가.
이걸 그 뭐라고 하더라?
입덕부정기?
이미 내 마음을 자각하고 있는데 굳이 부정해서 시애 아니, 신애를 고생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겉으로 밝아보여도 속은 여린 신애이기에 내가 모르는 척 하면 혼자서 마음 고생을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오늘도 손을 꿈틀거리면서 고민하고 있는 신애의 손을 먼저 잡아버렸다.
“!!!”
내가 먼저 손을 잡으니 엄청 놀랐는지 신애가 걸음을 멈추고 굳어버린다.
“신애야.”
“서, 서, 선배님?”
여태까지 내가 굳이 본명이 아니라 활동명인 시애라고 부른 것은 우리 관계의 거리를 좁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애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시애와 거리감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시애도 나와 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빠라고 부르기보단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예의를 지켰다.
내가 일정한 선을 긋고 있음을 시애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으로 시애의 본명인 안신애의 이름을 불렀다.
스킨십을 할까말까 고민하던 신애의 손을 먼저 잡아오면서 말이다.
이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눈치 챌 수밖에 없는 신호였다.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줄래? 이제 그렇게 부를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하거든. 아무래도 선배님은 좀 딱딱하잖아.”
“네, 네?! 오, 오빠요?”
“힘들어?”
오빠라고 부르는 걸 싫어할 수도 있었기에 물으니 신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아뇨아뇨! 그게…제가 감히 선배님을 그렇게 불러도 될지….”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히라는 소리를 해. 네가 괜찮다면 나는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