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2화 〉 #64. 웨딩 (1)
* * *
단숨에 사람을 압도 시켜버리는 엄청난 크기의 존재를 눈앞에 두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일단 몸이 굳어버린다.
숨이 턱! 하고 막히고 심장이 쿵쿵쿵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저게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게 정말 ‘가벼운 환상’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바짝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이 광경을 나 혼자만 보고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다만 거대하고 푸르른 나무에 시선을 떼는 게 쉽지가 않았다.
나무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귀에 꽂혀 들어오는 음악이 내 시선을 강제로 붙잡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 멍하니 놓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겨우겨우 유혹을 참아내고 고개를 돌려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괜...찮네?'
깜짝 놀라 공포에 질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거대한 나무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을 뿐.
갑자기 나타난 나무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홀린 듯이 아니라 정말 홀려버린 걸지도.’
굳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다시 음악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아까부터 온 몸에 쏟아져 내려오는 음들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돌렸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옮긴 순간, 살짝 흐려졌던 환상이 다시 찾아왔다.
거대한 나무는 산들바람을 만나 여유롭고 웅장하게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음들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이 음악을 들으라며 강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강요에 굳이 반항하지 않고 순응하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걸 들려주겠다는데 왜 거부해?’
귀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다.
압도적인 크기의 거대한 나무가 음악과 더해지며 나를 환상 속으로 이끈다.
음악에 흠뻑 젖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파티장에 있었던 우리는 거대한 나무 앞에서 연주를 듣다가, 배를 난파시킬 것 마냥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기도 하고.
거대한 절벽 꼭대기에서 콸콸콸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를 환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보통 음악을 들을 때는 귀로 듣는 게 정상인데, 우리는 온 몸으로 연주를 듣고 있었다.
‘압도적이구나.’
광활한 자연을 눈앞에 두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존재인지 실감이 된다.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고, 심장을 두드리는 웅장함에 감동이 몰려와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연주가 다 끝나고 나서야 다시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들은 모두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 ? ?
“아~ 다시 듣고 싶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요, 언니.”
“난 요리.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었어.”
그 정도 음악이라면 평생 듣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또한 그날의 기억은 음악적으로 많은 영감을 안겨주었다.
파티가 끝나고 다음날, 쏟아지는 영감에 허겁지겁 곡을 만든 게 무려 5곡이었다.
‘이런 음악을 한 번도 못 들어 본 사람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나와 마찬가지로 아현이도 파티에서 연주를 듣고 엄청난 자극을 받았는지 한동안은 연락하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
쏟아지는 영감들 속을 허우적대느라 낮과 밤을 잊었다던가?
그나마 지금은 좀 괜찮아져서 이렇게 수다를 떨겠다고 집에 놀러오기까지 했다.
‘그날 봤던 나무가 세계수라고 했지?’
여러 차원을 다니면서 실제로 봤던 적 있는 세계수를 환상으로 구현한 거라고 한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가장 약한 환상으로 봐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신기한 것은 그날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 비슷한 광경을 보긴 했지만, 그걸 이상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홀한 음악의 위용에 압도 되었다는 감상평만 할 뿐, 나무를 봤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나만 기억하는 건가? 혼자 기억하기 아까운 광경이었는데….'
연주자들에게 따로 들은 바가 있는데, 내가 봤던 거대한 나무는 세계수라고 불린다고 했다.
보통 세계수라고 하면 자연스레 뒤를 이어서 생각 나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엘프'다.
사실 미션으로 들어오는 의뢰 내용을 보면 다양한 종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일단 포니부터가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연주자들이 100% 힘을 발휘해서 환상을 봤다면 얼마나 더 대단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음악을 들으며 엘프를 환상으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초청해서 100% 힘을 사용한 연주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나저나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 거야? 정말 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준비하려고?”
정화씨 임신 축하 파티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일이 남았다.
바로 우리들의 결혼식이다.
정화씨 배가 부르기 전에 치러야 하기에 빠르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혼자 준비하는 건 아니야. 비앙카랑 멜리사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
“아…걔네들이 손대면 또 엄청 거창해지는 거 아니야?”
“그럴 것 같아서 진행 상황 매일 확인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누구누구 참여하는데? 아현이 너도 할 거지?”
“아니! 난 빠지겠다고 했는데.”
“왜?”
“그냥….”
“그냥이 어딨어! 왜 싫은 건데?”
“음, 나중에 해솔이랑 결혼식 올리는 거 기대하고 있을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아현이가 쪼로록 음료를 마시면서 대답한다.
주아 누나는 좀 더 설득해보려는지 말했다.
“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직업이 평범하지 않다 보니 관계를 숨겨야 하니까, 은근히 서운함이 쌓이잖아. 그래서 이번에 작게 결혼식을 올려서 서로 신뢰도 회복하고 관계를 좀 더 튼튼하게 다지자는 의미로 준비한 거야. 특별한 이벤트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무슨 의미인지는 아는데, 그래도 나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남들이 들으면 복에 겨웠다고 할 걸?”
복순 누나의 말에 아현이가 삐죽 입술을 내민다.
“그래도 싫어. 안 할래. 내가 낄 자리 아닌 것 같아.”
“이제 알겠네. 우리는 아이가 있는데, 너는 없으니까 이러는 거지? 그 요즘 애들 말로 낄끼빠빠? 뭐 그런 거 하겠다고 거절한 거 아니야?”
복순 누나의 말에 주아 누나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그런 거면 오해야! 우리가 언제 그런 걸로 차별한 적 있니?”
“없지! 없는 거 아는데…. 에이! 몰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거기에 낄 자격은 없는 것 같아.”
“연주 누님도 안 하겠다고 했어.”
내 아이를 갖고 있는 연주 누님의 불참 소식.
아현이가 깜짝 놀라 왜? 하고 되묻는다.
“나중에 정식으로 결혼 올리는 거 아닌 이상 굳이 번거롭게 두 번 일 하고 싶진 않으시다네. 아무래도 우리가 컴백하면 연주 누님도 자연스레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거든.”
바쁜 시간 쪼개서 결혼식을 이벤트 성으로 올린다?
연주 누님에게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도 안 할 거야. 더 이상 설득하지 마. 이미 마음의 결정 내렸어.”
조금은 설득이 먹혀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아현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부한다.
“뭐야, 그럼 결혼식은 나랑 정화 언니랑 주아 셋뿐이네?”
결혼식을 세 명과 동시에 올려야 하는 상황이 정상적인 건 아니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고 결혼하는 게 합법인 세상이지만,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이 평범한 일반인이라 해도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쓸 정도의 특이한 일인 것이다.
“민영이는?”
“민영 누나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진짜? 걔는 꼭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민영 언니는 해솔이만 있으면 된다면서 자긴 결혼식 같은 거 필요 없댔대.”
그랬다.
의외로 민영 누나는 결혼식에 크게 흥미가 없었다.
그냥 내가 자기 옆에만 있어주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더라.
덕분에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한 사람이 내 아이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버렸다.
결혼식날 웨딩드레스를 입지는 않아도 다들 참석해서 자리를 채우겠다고 했으니 너무 휑한 결혼식은 아닐 것이다.
‘남은 여자들도 더 잘해서 섭섭하지 않게 해줘야겠어.’
특히 깜짝 선물로 준비하고 있는 ‘예물’들은 식을 올리는 사람과 올리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준비할 생각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얼마나 진행 된 거야?”
“그렇게 궁금해? 파티는 이렇게까지 안 물어봤잖아.”
“파티랑 결혼식이랑 같냐?”
“…그건 아니지. 완전 다르지.”
“그러니까 빨리 얘기 좀 털어놔봐. 답답해죽겠어!”
주아 누나뿐만 아니라 복순 누나와 정화씨 그리고 드레스를 입지 않겠다고 한 아현이까지 진행 상황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일단 식장을 잡기가 애매해서 멜리사가 갖고 있는 별장을 결혼식장처럼 꾸미기로 했어.”
“비행기 타고 나가는 거야?”
“응.”
“잘 됐네. 겸사겸사 신혼여행처럼 즐기면 되잖아.”
“응, 맞아. 그럴 예정이야. 참고로 웨딩드레스는 빌리는 게 아니라 아예 구매할 예정이고.”
“구매를 한다고??”
“이런 거라도 해줘야 내가 좀 면이 살지 않을까 싶어서. 내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우리 관계를 숨겨야 했잖아. 그게 미안해서 돈 좀 쓸 생각이었어.”
“아….”
유일하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고 했던 아현이가 신음을 흘렸다.
“풋! 얘 표정 좀 봐. 나라 잃은 표정이야.”
“나, 나는 드레스를 사줄 거라곤 생각 못했단 말이야!”
“너도 하나 골라. 그날 안 입는다고 해도 사줄게. 우리 진짜 결혼식 올릴 때 입으면 되잖아.”
“헉! 진짜? 나 골라도 돼?”
“당연하지.”
“꺄악! 해솔이 최고!”
아현이가 흥분해서 내 볼에 입술 도장을 찐하게 찍었다.
“어머어머, 얘 좀 봐라. 우리 앞에서 대놓고 뽀뽀를 하네?”
“질투나면 언니도 하시던가!”
아현이가 보란 듯이 내 옆구리에 매달린다.
복순 누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서로 워낙 자주 부딪치고 부대끼다 보니 이런 일로 질투심이 생기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도발(?)을 한 아현이를 다들 귀엽게 봐주고 있었다.
“날짜는 정해진 거야?”
“정해졌지.”
“근데 왜 아직도 안 알려줘?”
“사실 근래에 말하려고 했어. 근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돼서 미루고 있었던 거야.”
“날짜 말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고민이 돼?”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여자들에게 어색하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이 결혼식날이거든. 그래서 웨딩드레스, 이번 주 주말에 보러 가야 돼.”
“뭐?! 다음 주 수요일이 웨딩드레스 맞추러 가는 날이 아니라 결혼식 날이라고?”
“!!!”
“야아!! 뭔 일정을 그렇게 잡아”
모두가 경악할 만한 스케줄에 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어쩔 수가 없어. 다다음 주 이후로는 내가 시간이 안나거든.”
그때가 본격적으로 컴백 준비를 시작할 때다.
결혼식만 올리고 끝이 아니라 나름 신혼 여행도 보내야 하는데, 다다음주부터는 하루 통째로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부득이하게 결혼식을 완전히 앞당겨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뒤로 미루면 란나씨 결혼이 기다려서….’
그 전에 올려야 하는 스몰 웨딩이다 보니 이렇게 빡빡한 스케줄을 짤 수밖에 없더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안나에게 부탁을 해서 웨딩드레스를 미리 확보해놨다는 점이다.
“웨딩드레스는 진짜 예쁜 것들로 준비해놨으니까 가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갖고 싶어서 결혼식도 빨리 올리고 싶어질 걸?”
조안나는 그동안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면서 인맥 관리도 열심히 해온 것 같았다.
웨딩드레스를 구매해야 한다는 내 사정을 말하니 흔쾌히 자기 인맥과 연결을 해주었고, 덕분에 퀄리티 높은 웨딩드레스를 구매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살도 좀 빼고, 피부 관리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거기서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해? 남들이 들으면 기만한다고 할 걸. 어디가서 빠지는 몸매들이 아니잖아. 당장 모델로 데뷔해도 될 사람들이면서.”
평소 운동을 좋아해서 몸매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복순 누나는 말할 것도 없고, 여배우인 주아 누나도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었다.
그럼 정화씨는?
정화씨는 쌍둥이를 임신했으므로 빡세게 관리를 할 수 없는 몸이니 패스해야 한다.
솔직히 굳이 관리할 필요도 없는 몸매이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쏟아내는 칭찬과 웨딩드레스라는 당근에 촉박한 일정을 잡은 것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휴~다행이계획대로 됐구나.’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쉰 나는 조안나에게 카톡 사진으로 받아 놓은 웨딩 드레스 사진들을 여자들에게 보여주며 화제를 전환시켰다.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앞에서 분노 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아니나 다를까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운 자태에 관심이 확 기울어졌다.
덕분에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여자들의 분노에서 해방 되었다.
이제 나도 여자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노하우가 생긴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뿌듯하다면, 유부남이 될 준비는 끝마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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