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6화 〉 #64. 웨딩 (5)
* * *
안녕! 반가워요. 세상에, 이 여자 예뻐!
주아 누나와의 첫 만남에서 조안나는 마이웨이 같은 모습을 변함없이 보여주었다.
“이,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영어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지만, 조안나 특유의 빠르고 호들갑스러운 영어는 리스닝이 익숙하지 않은 주아 누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기는 이런 보물을 숨겨두고 소개도 안 시켜준 거야? 너무해.
“누나 예쁘다고 난리야.”
“내가 예쁘다고? 뜬금없이?”
“패션 업계 쪽에서 일해서 그런지 예쁜 거에 환장하는 스타일이거든.”
조안나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내가 그녀의 뮤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뮤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내 외모가 큰 영향을 줬을 테고 말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조안나에게 주아 누나는 맛있는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먹잇감은 영감을 주는 뮤즈를 뜻한다.
당신이 입어줬으면 하는 옷들이 잔뜩 생각났어. 역시 자기 가족은 자기만큼이나 특별하구나. 빨리 아이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내가 선물 준비했는데 잘 맞을지 모르겠네.
조안나가 잔뜩 흥분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줄줄 뱉어낸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짐을 뒤적이면서 주아 누나에게 쇼핑백을 건넨다.
“이게 뭐야? 갑자기 이런 걸 왜 줘?”
“선물이라는데? 그냥 받아 둬. 나한테도 옷 못 줘서 안달이 난 사람이거든.”
하지만 선물도 적당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래도 그냥 받으라고?”
“…좀 선을 넘긴 했네.”
조안나가 선물이라며 꺼내는 선물들이 한 두 개가 아니게 되자 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심시 불편함을 표시하는 걸 본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말했다.
조안나, 너무 많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야?
미안미안! 이제 안 꺼낼 게. 이게 마지막이야.
이걸 다 받을 순 없어. 누나가 부담스러워해.
왜? 내 옷이 마음에 안 든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너무 많다니까?
으우웅…그냥 받아주면 안 되는 거야? 예쁜 여자 보면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난 벌써 저 미인한테 어울릴 옷이 떠올랐다고. 내가 준 옷들 입은 모습을 꼭 확인하고 싶은데….
지금 모델 보러 온 거 아니잖아.
주아 누나가 예상 외로 조안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바람에 첫 만남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서 빨리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해야만 한다.
주아 누나도 슬슬 영어가 귀에 익기 시작했는지 조안나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귀를 쫑긋쫑긋 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나가 너무 예뻐서 반해버렸대. 그래서 자기가 가져 온 옷을 입어줬으면 하나 봐. 직업병 알지, 누나?”
“응? 직업병? 그게 지금 왜 나와?”
“누나가 예뻐서 직업병이 도진 거야. 누나 어떤 일 하냐고. 혹시 모델이면 자기네 회사 모델 할 생각 없냐고 난리가 났어, 지금.”
“뜬금없이 모델이라니….”
주아 누나는 자기가 예뻐서 호들갑을 떤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인상을 쓸 수가 없었는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가 예뻐서 저런다는데 이해는 할게. 근데 적당히 하라고 해. 지금 우리 놀려고 만난 거 아니잖아.”
나야 조안나가 얼마나 천재인지 알고 있고, 그 성향이 나오기 시작하면 얼마나 마이웨이가 되는지 알아서 이해가 되는 거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조안나의 이런 태도가 불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중간에서 두 사람이 혹여 오해로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 돼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거 받으면 잘 봐달라고 뇌물 주는 거잖아. 찜찜해서 싫어. 내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뇌물이라기보단 자기만족이 더 클 걸?”
조안나가 그런 계산이 깔린 채로 옷을 가져왔을 리가 없다.
그렇게 계산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도 봐라.
우리나라 말을 전혀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녀를 쳐다봐서 그런지 얌전히 기다리던 조안나가 입을 열었다.
뭐래? 내 옷 마음에 안 든대?
그럴 리가. 선물을 너무 많이 가져와서 그래.
얼굴 표정 보니까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어떡하지? 입은 거 꼭 보고 싶었는데….
어지간히 주아 누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말하는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조안나였다.
누나를 모델로 삼고 싶으면 소속사에 제안 넣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제 옷 얘기 그만하자.
소속사? 모델이야?
모델 말고 배우.
배우?! 어쩜! 너무 잘 어울려! 역시 저 얼굴로 일반인일 리 없지!
“배우? 너 내 얘기 한 거지? 왜 네가 말해? 내가 직접 대화할 거야.”
“알았어. 일단 이 옷들 좀 치우고 시작하자.”
정신없는 상황을 정리하고자 조안나가 가져 온 선물들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여서 만나는 장소를 우리 집으로 하길 잘했다.
“일단 두 사람을 위해서 이걸 준비했어.”
언어알약이라는 아이템이다.
조안나가 우리 가족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언어’였다.
언어가 해결이 되어야 대화가 가능해지고, 그래야 친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거 아니겠나?
“이게 뭐야?”
“누나는 영어를, 조안나는 우리나라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알약이야. 효과는 일주일이니까 이곳에 있을 때 적어도 대화가 안 통하는 일은 없을 걸.”
“또 돈 썼어?”
“이런 거는 안 비싸.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조안나에게도 같은 설명으로 아이템을 섭취하게 했다.
“아아? 안녕하세요?”
어…반가워요. 진주아에요. 이거 정말 신기하네.
능숙하게 상대방의 언어로 소개를 한 두 사람은 신기함에 눈을 반짝이다가 하나의 언어로 정착했다.
“해솔이는 대단해요!”
“이만큼 대단하니까 조안나씨 같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거죠. 언어는 편하게 우리 말로 해도 될까요?”
“응, 좋아요. 다른 언어를 능숙하게 쓴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요.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2개 국어를 하다니! 해솔, 나 이거 너무 좋아!”
“필요하면 얘기해.”
일회용 언어 알약은 생각보다 가격이 얼마 안 나가서 얼마든지 구매해줄 수 있었다.
“당신 정말 멋있어.”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안나가 내 팔에 답싹 안겼다.
눈빛을 보니 나와 키스하고 싶은 눈치다.
주아 누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조안나와 진한 키스를 나눌 수는 없었기에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주는 것으로 열기를 억눌렀다.
“해솔이를 처음 봤을 때 단번에 홀려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뮤즈가 되어 달라고 했죠. 그리고 당신도 대단해요. 해솔이를 만났을 때 느꼈던 충격을 똑같이 느꼈으니까요. 아름다운 미인은 언제나 디자이너에게 치명적인 유혹이죠.”
조안나는 주아 누나를 꼬시려는 남자처럼 그윽하게 바라봤다.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하는지 고민 되는 가운데 조안나가 이어서 말했다.
“다시 얘기 꺼내서 미안한데, 당신을 보고 영감 받아서 만든 옷을 선물해도 될까요? 사실 미리 준비한 옷들을 선물하려고 했던 건 경솔했던 일이 맞는 것 같아요. 주아씨한테 가장 잘 어울릴 옷으로 선물을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언어알약을 선물해준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는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주아 누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주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는지 누나를 살피는 조안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 받아도 되는 거 맞아?”
주아 누나가 나에게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조안나씨한테는 제일 즐거운 일이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아도 돼. 입은 거 보여주는 걸로 조안나는 넘치도록 좋아할 걸?”
“맞아. 내가 만든 옷을 입은 해솔이는 사랑스러워. 가끔은 벗겨버리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야한 농담에 풋! 하고 주아 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해솔이한테 얼마 전에 우리 존재를 들었다고 들었어요.”
“네! 해솔이 아이, 꼭 보고 싶어요. 일부러 사진도 안 보고 왔어요. 작은 뮤즈를 만나길 엄청 고대하고 왔거든요. 오늘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없어서 실망했어요.”
“태양이는 학원에 가서 못 만날 거에요. 나중에 소개시켜줄게요.”
한참 하고 싶은 거 많은 나이.
어릴 때는 성별을 속여서 바깥에 데리고 나갔지만, 이젠 나이를 먹어서 슬슬 남자아이 태가 나기 시작해서 속이는 게 불가능했다.
때문에 태양이가 어딘가를 가려면 누군가가 항상 동행해야 했고, 한참 하고 싶은 거 많은 나이인 태양이 때문에 정화씨가 무척 바빴다.
배가 슬슬 불러오기 시작하면 태양이를 봐주기 어려워지니 주아 누나가 태양이를 돌보게 될 텐데….
‘안경은 필수겠어.’
아니면 아예 주아 누나 전용으로 안경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 아이템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아쉬워요. 정말 예쁠 텐데….”
“우리 태양이가 예쁘긴 하죠.”
“엄마랑 아빠를 닮았으면 천사 그 자체일 거에요!”
자식 칭찬을 받으면서 기분 나빠 할 부모가 몇이나 될까?
주아 누나는 결국 무장해제 된 상태로 조안나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조안나는 내 다른 여자들도 주아 누나처럼 예쁜 건지 물어봤고, 주아 누나는 조안나가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 주아씨가 모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배우라고 해서 되게 기뻤고요. 회사에 가면 정식으로 제안을 넣을 생각이에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설마 지금 메인 모델 제안 한 거에요?”
“응! 맞아요.”
“혹시 뇌물인 건 아니죠? 아까 선물도 그렇고, 왜 자꾸 나한테 뭘 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 제안을 해도 당신한테 특혜를 주진 않을 거에요.”
“특혜? 무슨 특혜요?”
특혜라는 말에 조안나가 순수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주아 누나도 특혜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입이 꾹 닫혔다.
누나가 그런 걸 주겠다고 한들 당장 생각나는 혜택들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그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딱히 특혜를 줄 것도 없겠네요. 근데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바라는 게 없는데 옷을 선물하고, 메인 모델 자리를 주겠다고 하는 게.”
“주아씨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 맞아요. 특혜 같은 것보단 주아씨가 내 세컨드 뮤즈가 되어줬으면 좋겠어서에요.”
“세컨드 뮤즈? 그럼 퍼스트 뮤즈는 나겠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슬쩍 끼어들었다.
“응! 맞아. 해솔이가 퍼스트.”
“주아 누나는 세컨드고.”
“그러고 싶어. 해줬으면 좋겠는데….”
“누나가 엄청난 미인이긴 하지.”
민영 누나를 보면 써드 뮤즈가 되어 달라고 하려나?
민영 누나의 얼굴은 내가 직접 깎아낸 얼굴이다 보니, 그 얼굴에 관련해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편이다.
내 완벽한 이상형으로 만들어놨기에 다른 사람들이 민영 누나를 예쁘다고 하면 자연스레 흐뭇해지는 것이다.
“나를 정말 뮤즈로 생각한다고요? 우리 방금 만났는데요?”
“해솔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바로 뮤즈가 되어달라고 했는 걸요? 시간은 상관없어요.”
“…당장은 결정 못할 것 같아요. 회사로 제안서가 오면 생각해볼게요. 그 정도는 배려해줄 거죠?”
“그럼요!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조건으로 제안 넣을게요!”
조안나가 주아 누나에겐 보자마자 뮤즈가 되어달라고 한 걸로 뮤즈를 쉽게 정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나 이외의 뮤즈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아이템으로 관리를 하면서 가뜩이나 본판이 뛰어난 주아 누나의 미모는 여배우 중 원탑이라 불릴 만큼의 위치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나와 주아 누나를 콕 짚어서 뮤즈로 삼는 걸 보면 조안나의 안목은 오히려 까다로운 편인 거였다.
그렇게 뮤즈 문제가 일단락 되고….
우리는 간단하게 미리 차려 둔 밥을 먹은 후, 디저트를 앞에 두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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