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460화 (460/849)

〈 460화 〉 #68. 비비안 로랑 (1)

* * *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비비안 로랑이 다급하게 내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비비안씨? 무슨 일이세요.

­어디가시는 거에요?

­촬영한 거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비행기를 예약해둬서요.

­비행기를요? 시간이 촉박한가요?

­아뇨,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그게….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영 말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촬영하는 내내 집중하지 못했던 게 따로 할 말이 있어서였나 보다.

나는 어서 말하라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 옷을 잡고 있었기에 뿌리치고 가버릴 수도 없었다.

아직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존재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정말 죄송한데 저한테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을요?

­제가 사실 해솔씨한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비비안씨가 나한테 부탁을 한다고?

뭘 부탁하려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비비안씨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많이 고민 되는지 연신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었다.

­어떤 부탁이시죠?

­그게....

그게?

­사, 사인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인이요? 하, 전 또 뭐라고. 물론 해드려야죠.

한참 뜸을 들인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쉬운 부탁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허탈해진 나는 정말 이걸 부탁하려고 그렇게 어려워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정말 그게 부탁인 건가요?

­네….

고작 싸인 부탁하자고 머뭇거렸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부탁 받은 사인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종이와 팬이 없다는 거다.

­제 차에 있어요! 여기서 많이 안 먼데,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뭐 그러죠.

매니저와 함께 비비안씨의 차량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확실히 우릴 지켜보는 시선이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비비안에게 말했다.

­아까 사람들 때문에 말을 못하신 것 같던데, 정말 사인만 하고 가도 되는 건가요?

­아! 눈치 채셨군요. 제가 좀 이상했죠?

­적어도 사인을 부탁하려고 한 게 아닌 건 알겠던데요.

그녀가 머쓱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도 부탁드릴 것 중의 하나이긴 했어요.

다만 부탁의 경중에서 사인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제대로 된 부탁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래야 들어줄지 말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내 매니저를 힐끔 바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한테 조카가 있어요. 그 조카가 해솔씨를 정말 좋아해요. 콘서트도 자주 갈 정도로요.

­…감사한 일이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로 대화의 운을 띄웠다.

­그래서 제 조카랑 통화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영상 통화요.

­그게 부탁이에요?

­네. 사실 이번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을 따지자면 조카가 원인이에요.

그렇게 시작 된 비비안의 고백.

에어플레인 중에서 나를 최애로 유난히 좋아하는 그녀의 조카.

비비안은 조카가 굉장히 좋아하는 나와 작업을 함께 하게 되자 사인이라도 받아줄까 싶어서 의향을 물어봤고, 그때부터 조카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우리 아이가 굉장히 얌전한 애거든요.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숙기가 없어서 친구도 잘 못 사귀는 아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의욕이 좀 과다하게 들어갔나 봐요.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라지 않은가?

자신이 친해져서 아이를 위해 영상통화를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뷰 때 제가 이상형이라고 한 거에요?

­네…. 제가 의도한대로 되진 않았지만요.

시무룩해져선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오히려 그날 일이 엉뚱하게 튀는 바람에 나와 친해지는 커녕 거리가 더 벌어져서 부탁도 못하고 촬영 내내 전전긍긍한 것 같다.

­조카가 정말 많이 기대하고 있거든요. 정말 실례라는 걸 알지만, 제가 꼭 영상통화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놔서….

­조카분이랑 많이 친하시나보네요.

­네!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에요.

­올해 몇 살이에요?

­10살이요.

생각한 것보다 더 나이가 어리다.

­이름은요?

­미미 로랑.

­좋아요. 연결해주세요.

­감사해요!

­이런 부탁은 굳이 친분이 없어도 상관없었을 거에요. 팬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니까요.

비비안은 내 허락에 한껏 기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 통화를 연결하려다가 깜빡 했다는 듯 아! 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 전화하기 전에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음, 미미는 남들과 달리 좀 특별한 아이에요.

­…네.

그녀가 말하는 특별함이 애석하게도 긍정적인 부류가 아님을 단 번에 눈치 챘다.

­아이한테 부정적인 얘기보단 긍정적인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민폐만 잔뜩 끼쳐놓고 이런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나라 예의를 어디서 배워왔는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를 한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올리면서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팬을 서운하게 만들 리 없잖아요.

내 어깨 토닥임을 받고서야 겨우 진정한 비비안이 전화를 연결했다.

그쪽에서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굉장히 빠르게 통화가 연결 됐다.

­응. 미미, 뭐하고 있었어? 이모가 약속했잖아. 전화 통화 하게 해준다고. 지금 미미랑 통화하려고 기다리고 있어. 촬영은 이미 끝났지. 그리고 목소리만 듣는 거 아니고 영상 통화로 할 거야. 정말이지, 그럼. 예쁘게 세수했어?

희미하게 통화음 속으로 귀여운 여자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하는 비비안의 얼굴을 본 나는 문득 익숙한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아 누나나 정화씨로부터 자주 보는 얼굴.

두 사람이 태양이를 볼 때 짓는 표정이기도 했다.

‘흐음.’

어쩐지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다.

­여기, 전화요.

­네. 안녕? 미미야.

­꺄악!! 진!!!

영상 안에 있는 여자 아이는 10살이라고 들었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런 소녀가 병원복을 입은 채로 잔뜩 흥분해서 발갛게 볼이 달아올라 있었는데, 주변에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걱정어린 말을 했다.

­미미!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싫어! 이것도 못하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 진진! 보고 싶었어요. 나 콘서트에는 갔었는데, 팬 사인회는 당첨 되고 못 갔어.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났어.

­오, 이런. 팬 사인회에 못 왔구나. 미미가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콘서트는 어땠어? 재밌게 즐겼니?

­응! 내 생애 최고로 행복했어. 나도 무대 위로 올라가서 함께 노래하고 싶어질 정도로.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비비안은 미미의 반응에 일희일비했다.

미미가 행복해 하면 비비안도 행복해하고, 미미가 아쉬워하면 비비안도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그 반응에서 눈치 채지 못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상 안에 보이는 미미와 비비안은 닮은 곳이 너무 많았다.

조카라는 걸 핑계로 대기엔 말이다.

‘역시 딸인 거겠지?’

비비안은 서른이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얽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를 이상형으로 꼽은 것에 난리가 난 거다.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는 여자가 왜 남자와 거리를 두는지 의아했는데, 이건 이유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딸이 저렇게 아프니 남자를 만날 생각도 안 나는 게 당연했다.

“비행기 시간 늦겠어. 이제 가야 돼. 차 빼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전화도 끊고. 알았지?”

매니저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을 할 때까지 미미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다.

미미도 너무 오랫동안 통화를 해서 그만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서로에게 시기적절한 순간이었다.

­안 돼! 아직 못한 말이 많아요!

다만 내가 전화를 끊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단번에 끊을 수 있지는 않았다.

미미가 너무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고집을 부릴 거라는 걸 눈치 챘는지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비안이 나섰다.

­

­미미, 진씨가 가야한다고 하셨잖아. 전화하기 전에 엄, 나한테 약속한 게 뭐였지?

방금 말실수할 뻔한 비비안이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시치미를 뚝 뗐다.

배우라서 그런지 실수를 했음에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고집 피우지 않는 거요.

­맞아. 근데 지금 미미 고집 부리고 있잖아.

­맞아요. 죄송해요.

­그렇지? 미미가 부탁해서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비비안은 미미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집을 부릴 생각이 만만하던 미미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지며 고집을 꺾었다.

­전화 끊어도 울지 않을 거지, 미미?

­네에….

­그래, 바로 미미한테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간호사 말 잘 듣고. 이건 미미가 약속한 거야.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진, 안녕. 만나서 반가웠어.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작고 귀여운 아이가 울먹이면서 내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모습이 심장에 콱! 하고 박혔다.

­그래, 미미. 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 시간이 나면 미미 만나러 갈게.

­정말? 나 보러 올 거야?

비비안이 내 말에 깜짝 놀라선 고개를 저었다.

지키기 어려워 보이는 무리한 약속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미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기에 약속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응. 근데 미미 엄마가 허락을 해줘야 가능해. 미미가 할 일은 내가 미미를 만나러 가는 걸 허락 받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물론이야!!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미미가 성공하면 비비안씨를 통해서 연락해줘. 그럼 미미를 만나러 갈게.

뚝!

응?

나와의 약속 덕분에 한껏 고무 된 미미가 언제 고집을 부렸냐는 듯 깔끔하게 통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작별 인사도 없이 말이다.

“하하하! 귀여워.”

­그런 약속을 해버리면 어떡해요? 우리 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 사소한 약속도 전부 기억해요. 분명 실망할 텐데….

처음에는 다소 화가 났는지 강한 어조로 말하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그 얼굴이 미미가 짓던 표정과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 모르는 게 이상할 지경인데. 애초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부탁한 것도 아닌 것 같고….”

­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연락처 알려주세요. 그리고 미미가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으면 연락해줘요. 그럼 만나러 갈게요.

­정말 미미를 만나러 오시겠다는 거에요?

­물론이죠. 여기 번호 찍어주세요.

내가 핸드폰을 내밀기까지 하니 비비안은 그제야 정말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감동 받은 얼굴이 됐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배려해줄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비비안씨를 위해서라기보단 미미가 마음에 쓰여서가 커요. 그러니까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안 돼요. 가뜩이나 오늘 고집을 부렸는데…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솔직히 눈치 못 채는 게 더 어렵던데요? 두 사람 많이 닮았어요.

비비안이 예상했던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숨기는 건 불가능했군요.

­제가 눈치가 빠른 것도 있어요.

­예상하신 것처럼 미미는 제 딸이 맞아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갖게 된 아이였고, 책임지고 싶어서 낳았어요. 다만 집안에서는 제가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게 창피하다면서 철저하게 아이의 존재를 숨겼어요.

사회적으로 대단히 명예로운 명문 집안.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서 훈장도 여럿 받은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걸 보면 정상인 집안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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