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0화 〉 #68. 비비안 로랑 (1)
* * *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비비안 로랑이 다급하게 내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솔직히 많이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비비안씨? 무슨 일이세요.
어디가시는 거에요?
촬영한 거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비행기를 예약해둬서요.
비행기를요? 시간이 촉박한가요?
아뇨,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그게….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영 말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촬영하는 내내 집중하지 못했던 게 따로 할 말이 있어서였나 보다.
나는 어서 말하라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 옷을 잡고 있었기에 뿌리치고 가버릴 수도 없었다.
아직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존재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정말 죄송한데 저한테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을요?
제가 사실 해솔씨한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비비안씨가 나한테 부탁을 한다고?
뭘 부탁하려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비비안씨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많이 고민 되는지 연신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었다.
어떤 부탁이시죠?
그게....
그게?
사, 사인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인이요? 하, 전 또 뭐라고. 물론 해드려야죠.
한참 뜸을 들인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쉬운 부탁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허탈해진 나는 정말 이걸 부탁하려고 그렇게 어려워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정말 그게 부탁인 건가요?
네….
고작 싸인 부탁하자고 머뭇거렸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 부탁 받은 사인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종이와 팬이 없다는 거다.
제 차에 있어요! 여기서 많이 안 먼데,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뭐 그러죠.
매니저와 함께 비비안씨의 차량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확실히 우릴 지켜보는 시선이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비비안에게 말했다.
아까 사람들 때문에 말을 못하신 것 같던데, 정말 사인만 하고 가도 되는 건가요?
아! 눈치 채셨군요. 제가 좀 이상했죠?
적어도 사인을 부탁하려고 한 게 아닌 건 알겠던데요.
그녀가 머쓱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도 부탁드릴 것 중의 하나이긴 했어요.
다만 부탁의 경중에서 사인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제대로 된 부탁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래야 들어줄지 말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내 매니저를 힐끔 바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한테 조카가 있어요. 그 조카가 해솔씨를 정말 좋아해요. 콘서트도 자주 갈 정도로요.
…감사한 일이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로 대화의 운을 띄웠다.
그래서 제 조카랑 통화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영상 통화요.
그게 부탁이에요?
네. 사실 이번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을 따지자면 조카가 원인이에요.
그렇게 시작 된 비비안의 고백.
에어플레인 중에서 나를 최애로 유난히 좋아하는 그녀의 조카.
비비안은 조카가 굉장히 좋아하는 나와 작업을 함께 하게 되자 사인이라도 받아줄까 싶어서 의향을 물어봤고, 그때부터 조카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우리 아이가 굉장히 얌전한 애거든요.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숙기가 없어서 친구도 잘 못 사귀는 아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의욕이 좀 과다하게 들어갔나 봐요.
아이가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라지 않은가?
자신이 친해져서 아이를 위해 영상통화를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뷰 때 제가 이상형이라고 한 거에요?
네…. 제가 의도한대로 되진 않았지만요.
시무룩해져선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오히려 그날 일이 엉뚱하게 튀는 바람에 나와 친해지는 커녕 거리가 더 벌어져서 부탁도 못하고 촬영 내내 전전긍긍한 것 같다.
조카가 정말 많이 기대하고 있거든요. 정말 실례라는 걸 알지만, 제가 꼭 영상통화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놔서….
조카분이랑 많이 친하시나보네요.
네!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에요.
올해 몇 살이에요?
10살이요.
생각한 것보다 더 나이가 어리다.
이름은요?
미미 로랑.
좋아요. 연결해주세요.
감사해요!
이런 부탁은 굳이 친분이 없어도 상관없었을 거에요. 팬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니까요.
비비안은 내 허락에 한껏 기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 통화를 연결하려다가 깜빡 했다는 듯 아! 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 전화하기 전에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음, 미미는 남들과 달리 좀 특별한 아이에요.
…네.
그녀가 말하는 특별함이 애석하게도 긍정적인 부류가 아님을 단 번에 눈치 챘다.
아이한테 부정적인 얘기보단 긍정적인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민폐만 잔뜩 끼쳐놓고 이런 부탁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나라 예의를 어디서 배워왔는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를 한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올리면서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팬을 서운하게 만들 리 없잖아요.
내 어깨 토닥임을 받고서야 겨우 진정한 비비안이 전화를 연결했다.
그쪽에서 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굉장히 빠르게 통화가 연결 됐다.
응. 미미, 뭐하고 있었어? 이모가 약속했잖아. 전화 통화 하게 해준다고. 지금 미미랑 통화하려고 기다리고 있어. 촬영은 이미 끝났지. 그리고 목소리만 듣는 거 아니고 영상 통화로 할 거야. 정말이지, 그럼. 예쁘게 세수했어?
희미하게 통화음 속으로 귀여운 여자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하는 비비안의 얼굴을 본 나는 문득 익숙한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아 누나나 정화씨로부터 자주 보는 얼굴.
두 사람이 태양이를 볼 때 짓는 표정이기도 했다.
‘흐음.’
어쩐지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다.
여기, 전화요.
네. 안녕? 미미야.
꺄악!! 진!!!
영상 안에 있는 여자 아이는 10살이라고 들었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런 소녀가 병원복을 입은 채로 잔뜩 흥분해서 발갛게 볼이 달아올라 있었는데, 주변에 간호사로 보이는 여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걱정어린 말을 했다.
미미!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싫어! 이것도 못하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 진진! 보고 싶었어요. 나 콘서트에는 갔었는데, 팬 사인회는 당첨 되고 못 갔어.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났어.
오, 이런. 팬 사인회에 못 왔구나. 미미가 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콘서트는 어땠어? 재밌게 즐겼니?
응! 내 생애 최고로 행복했어. 나도 무대 위로 올라가서 함께 노래하고 싶어질 정도로.
전화 통화를 하는 내내 비비안은 미미의 반응에 일희일비했다.
미미가 행복해 하면 비비안도 행복해하고, 미미가 아쉬워하면 비비안도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그 반응에서 눈치 채지 못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영상 안에 보이는 미미와 비비안은 닮은 곳이 너무 많았다.
조카라는 걸 핑계로 대기엔 말이다.
‘역시 딸인 거겠지?’
비비안은 서른이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얽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를 이상형으로 꼽은 것에 난리가 난 거다.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는 여자가 왜 남자와 거리를 두는지 의아했는데, 이건 이유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딸이 저렇게 아프니 남자를 만날 생각도 안 나는 게 당연했다.
“비행기 시간 늦겠어. 이제 가야 돼. 차 빼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전화도 끊고. 알았지?”
매니저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을 할 때까지 미미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다.
미미도 너무 오랫동안 통화를 해서 그만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서로에게 시기적절한 순간이었다.
안 돼! 아직 못한 말이 많아요!
다만 내가 전화를 끊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단번에 끊을 수 있지는 않았다.
미미가 너무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고집을 부릴 거라는 걸 눈치 챘는지 한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비안이 나섰다.
미미, 진씨가 가야한다고 하셨잖아. 전화하기 전에 엄, 나한테 약속한 게 뭐였지?
방금 말실수할 뻔한 비비안이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시치미를 뚝 뗐다.
배우라서 그런지 실수를 했음에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고집 피우지 않는 거요.
맞아. 근데 지금 미미 고집 부리고 있잖아.
맞아요. 죄송해요.
그렇지? 미미가 부탁해서 어렵게 만든 자리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비비안은 미미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집을 부릴 생각이 만만하던 미미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지며 고집을 꺾었다.
전화 끊어도 울지 않을 거지, 미미?
네에….
그래, 바로 미미한테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간호사 말 잘 듣고. 이건 미미가 약속한 거야.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진, 안녕. 만나서 반가웠어.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작고 귀여운 아이가 울먹이면서 내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모습이 심장에 콱! 하고 박혔다.
그래, 미미. 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 시간이 나면 미미 만나러 갈게.
정말? 나 보러 올 거야?
비비안이 내 말에 깜짝 놀라선 고개를 저었다.
지키기 어려워 보이는 무리한 약속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미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기에 약속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응. 근데 미미 엄마가 허락을 해줘야 가능해. 미미가 할 일은 내가 미미를 만나러 가는 걸 허락 받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물론이야!! 할 수 있어!
좋아. 그럼 미미가 성공하면 비비안씨를 통해서 연락해줘. 그럼 미미를 만나러 갈게.
뚝!
응?
나와의 약속 덕분에 한껏 고무 된 미미가 언제 고집을 부렸냐는 듯 깔끔하게 통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작별 인사도 없이 말이다.
“하하하! 귀여워.”
그런 약속을 해버리면 어떡해요? 우리 아이는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 사소한 약속도 전부 기억해요. 분명 실망할 텐데….
처음에는 다소 화가 났는지 강한 어조로 말하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그 얼굴이 미미가 짓던 표정과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 모르는 게 이상할 지경인데. 애초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부탁한 것도 아닌 것 같고….”
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연락처 알려주세요. 그리고 미미가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으면 연락해줘요. 그럼 만나러 갈게요.
정말 미미를 만나러 오시겠다는 거에요?
물론이죠. 여기 번호 찍어주세요.
내가 핸드폰을 내밀기까지 하니 비비안은 그제야 정말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감동 받은 얼굴이 됐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배려해줄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비비안씨를 위해서라기보단 미미가 마음에 쓰여서가 커요. 그러니까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안 돼요. 가뜩이나 오늘 고집을 부렸는데…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솔직히 눈치 못 채는 게 더 어렵던데요? 두 사람 많이 닮았어요.
비비안이 예상했던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숨기는 건 불가능했군요.
제가 눈치가 빠른 것도 있어요.
예상하신 것처럼 미미는 제 딸이 맞아요. 어릴 때 뭣도 모르고 갖게 된 아이였고, 책임지고 싶어서 낳았어요. 다만 집안에서는 제가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게 창피하다면서 철저하게 아이의 존재를 숨겼어요.
사회적으로 대단히 명예로운 명문 집안.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서 훈장도 여럿 받은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걸 보면 정상인 집안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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