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1화 〉 #68. 비비안 로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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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약하게 태어난 미미가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녀의 엄마에겐 돈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꾸준한 봉사활동과 기부로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로랑 가문은 돈이 아주 많은 집안이었다.
덕분에 미미는 아기 때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최고의 의료진이 미미를 보살핀 덕분이었다.
몸 상태가 좀 좋아지면 집에서 지내다가도 금방 또 상태가 안 좋아지면 병원에 입원하는 나날이 흘러갔다.
여러 차례 수술과 최고의 의료진의 관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미의 약한 몸은 건강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비비안의 피 말리는 시간이 흘렀다.
언제 죽을지 모를 아이를 부여잡고 산지 어느덧 10년.
미미가 9살이 되었을 무렵,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이가 먹으면서 자연스레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미 비비안도 각오하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니까 투정을 좀 부려도 뭐라 할 사람 없을 텐데, 아이가 너무 착했어요. 학교도 가보고 싶고, 놀러도 다니고 싶고 그랬을 텐데….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건 놀랍게도 진해솔이라는 타국의 남자 아이돌이었다.
딸아이의 남다르게 빠른 사랑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비비안은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평생소원이라며 콘서트에 가는 걸 허락해줄 정도로 말이다.
콘서트에 다녀 온 이후, 컨디션이 나빠져서 한동안 의사와 비비안이 마음고생을 해야 했지만, 아이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며 흐뭇했다.
에어플레인의 굿즈들을 모조리 웃돈 주고 구매해서 아이의 병실에 넣어주길 몇 번이나 했을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와 촬영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상황에 엄마가 가만히 있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가뜩이나 아이의 존재를 숨긴 채 배우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콘서트에 다녀왔을 때, 미미가 정말 행복해 했어요.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걸 여태까지 몰랐다는 사실에 몰래 많이 울기도 했었죠. 제게 큰 욕심이 있다면, 미미가 그때 보여줬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걸 다시 보는 거였어요.
우연히 만들어진 기회였지만, 다시 한 번 미미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가 행복하다면 자신의 비밀이 밝혀지는 위험을 무릅써도 상관없었다.
가문에서 아이의 존재를 숨기라고 강요했기에 억지로 숨기고 있었지만, 가뜩이나 아픈 아이인데 그 존재까지 숨겨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가 행동을 잘 했어야 했는데, 의욕이 앞섰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미미를 행복하게 해줘서 감사해요.
덤덤하게 늘어놓은 고백과 정중한 인사.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잠시 대답을 미루고 고민하다가 무겁게 대답했다.
저로 인해 팬이 행복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겁니다.
비비안씨의 사정을 들으니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고도 남았다.
그녀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미와 영상 통화를 하게 만들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가끔 자신의 거짓말이 아예 들통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버거워질 때면 말이다.
아마 비비안도 차라리 미미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아이의 존재를 밝히고 싶었던 건 아닐까?
미미에 관련 된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는 건데, 제가 한 약속은 꼭 지킬 겁니다. 그러니 괜히 미미를 실망시키지 말아주세요.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저한테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그럼 뭐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비비안씨한테 얻어갈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비비안씨를 위해서 한 약속이 아닙니다.
내 팬인 미미를 직접 만나서 용기를 주고 싶었다.
비비안이 나와 미미가 만날 수 있게 도움을 준 건 맞지만, 미미와의 약속에 비비안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빵!
“해솔아!”
그때, 차 경적소리가 울렸다.
매니저가 왔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고, 나중에 뵙죠.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서니 비비안도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중에 차에 올라타고서야 내가 사인을 하지 않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에 미미한테 직접 해주지, 뭐.’
미미의 의욕을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걸까?
비비안씨한테서 미미와의 약속에 관련 된 연락이 온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꽤 많은 기자가 나와 비비안의 촬영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진 곳은 없었다.
비비안과 내가 보여주는 딱딱한 거리감에 기자들도 텄다고 생각했나보다.
결국 기자들은 우리들이 촬영에 들어갔고, 케미가 좋았더라 라는 식으로 김빠진 기사만 낼 수밖에 없었다.
한 때 인터넷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던 스캔들도 후속 기사가 없으면 금방 시들해지는 게 요즘이지 않은가?
비비안과의 일이 무사히 수습이 되었기에 나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팬과의 약속을 고대할 수 있었다.
다만 미미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화끈한 성격이었는지, 비비안으로부터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이 왔다.
영상통화를 한지 고작 해봐야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어…당장이요?
아뇨아뇨! 당장 와달라는 게 아니에요. 스케줄로 바쁘시다는 걸 아는데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저희 쪽에서 시간을 맞추는 게 더 맞지 않나 싶어서요. 저는 당분간 아이한테 집중할 생각이에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백수라는 뜻이죠.
그럼 제가 시간이 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거군요.
네. 아이가 잠을 자야 하는 저녁 9시만 아니라면요.
설마 그 시간에 방문할까요.
미리 연락만 주세요. 사실 미미는 저녁 9시에 온다고 해도 당신을 기다릴 거에요.
그녀의 말에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물었다.
설마 벌써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죠? 저 아직 비행기표도 안 끊었는데요?
…….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갑자기 비비안 쪽에서 말이 없다.
정말이에요?
이건 뭐,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거야도 아니고.
지금부터 기다리는 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무리 공간의 이동에 자유로운 나라고 해도 빡빡하게 잡혀 있는 스케줄을 뒤로 하고 미미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스케줄 때문에 당장 병원에 방문하는 건 안 될 거라고 설득을 하긴 했어요. 근데 미련을 못 버리겠나봐요. 안 되는 이유를 납득했으면서도 전화라도 한 번 해보면 안 되냐고 하네요.
비비안은 자신의 이런 행동이 내게 큰 부담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내게 전화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가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이가 고집을 피울 때, 부모 입장에서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아이를 혼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작고 사랑스럽기만 한 아이에게 혼낼 때가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자신이 곤란해지고 마는 게 낫다.
내가 부모가 아니었다면 비비안의 행동에 큰 부담감을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빠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곤란함에도 충분히 공감이 됐기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며 허허 웃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할 때 연락주세요. 이건 정말 진심이에요. 미미도 당신한테 부담을 주면서까지 만나는 건 싫다고 했어요.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 크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비비안은 너무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벌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미에겐 안 된 일이지만, 며칠 내로 미미를 만나러 가는 건 정말 불가능했다.
‘아직 준비가 다 안 됐으니까.’
기왕 미미를 찾아가기로 한 거, 제대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피규어는 왜 또 만들어? 우리 주려는 거야?”
“설마 그러려고. 선물주려고 만드는 거야.”
“누구 선물? 여자?”
“음~ 여자 맞긴 하지. 근데 나이가 좀 어려.”
“몇 살인데?”
“10살.”
“공주님이네?”
“그렇지. 내 팬이래. 그래서 이번에 잠깐 시간 내서 찾아가려고. 근데 빈손으로 가기 뭐하잖아. 그래서 만드는 거야.”
나를 캐릭터화 해서 귀엽게 2등신으로 만든 피규어.
이건 이거대로 팬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형만 만드는 거야? 나는? 나도 만들어주면 안 돼?”
“나도 만들어주라. 형!”
“야, 왜 너까지 보태. 힘들어서 형이 다 안 만들어준다고 할 수도 있단 말이야.”
“싸우지 마라. 다 만들어줄 테니까.”
“오예! 이거 SNS에 올려도 돼요?”
“음, 아니.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맞아, 괜히 그거 올렸다가 팬들이 갖고 싶다고 하면 곤란해지잖아.”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
한 번 피규어 맛(?)을 본 팬들이 2등신 피규어도 탐을 낼 게 분명했다.
“그럼 내 침대 맡에 둬야겠다.”
멤버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피규어를 꿋꿋하게 제작해서 선물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박이 난 앨범에다가 정성껏 사인을 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정성을 들여?”
“특별한 팬이야. 응원을 해주고 싶어서.”
“팬?”
내가 자세히 말해주지 않자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멤버들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스케줄을 뛰고, 콘서트 준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시간이 점점 촉박해졌지만 미미에게 줄 선물 준비가 끝나자마자 비비안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렇게 빨리 시간을 내주실 줄 몰랐어요.
비비안은 내가 오늘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매우 감격했다.
사실 미미가 요즘 문을 매일 주시하고 있어요.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말해주겠다고 했는데도 말이에요.
미미가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운 말은 아니었다.
산타 할아버지처럼 깜짝 방문을 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미리 말을 해주고 가는 게 나을까요?
말을 안 해주면 미미가 많이 서운해 할 거에요. 아이한테 너무 과한 놀람은 좋지 않기도 하고요.
그럼 지금 바로 말해주세요. 제가 곧 찾아갈 거라고요.
오늘 당장이요?
비비안의 목소리에는 진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미미가 좋아할 걸 상상했는지 벌써부터 행복해 보였다.
그래요, 지금 당장. 얼마 안 남았어요.
오! 세상에, 미미!!!! 엄청난 소식이야!
내 대답에 비비안이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치는 소리가 통화음에 정확히 들려왔기에 웃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니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저렇게까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뿌듯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마 지금부터 날 목 빠져라 기다리겠지.’
나는 이미 여러 나라를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좌표를 따놓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미와 비비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알아둔 좌표와 병원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에 시간이 아예 안 걸리는 건 아니었다.
약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미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여권 없이 해외로 들어 온 것이기에 목격담이 뜨면 안 돼서 안경을 쓴 채로 이동했다.
남들에게 들켜서 좋을 것 없는 비공식 이벤트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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