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463화 (463/849)

〈 463화 〉 #68. 비비안 로랑 (4)

* * *

‘비비안은 정말 만나는 남자 없어?’

‘비비안은 좋겠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좋은 부모님 아래에서 호강하고 살잖아.’

‘비비안은 왜 배우를 하는 거야? 나 같으면 배우 말고 편하게 회사 이어 받아서 살 텐데.’

비비안은 남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살았다.

잘난 외모, 넘치는 재력,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부모님과 가문까지.

겉으로 보면 완벽하고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녀의 삶.

하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비비안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많은 재력은 삶의 단계를 몇 단계 내려주는 효과를 만들어냈지만, 그 배경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고난을 주었으니 위로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건 아니었다.

미미 로랑.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사랑하는 딸이자 그녀의 모든 것.

그 소중한 아이를 명문가라는 대단한 집안의 어르신 때문에 잃을 뻔 했으니 말이다.

비비안은 정말 어린 나이에 미미를 가졌다.

그녀의 나이 18살에 생긴 아이였다.

임신 사실을 최대한 숨기려 했으나 배가 점점 나오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에게 비밀로 할 수가 없었다.

평소 인자하시고, 봉사를 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계시는 부모님이기에 임신 사실을 알린다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우거라.’

‘집안의 수치다!’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니!!’

‘끔찍해.’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군.’

자신을 예뻐해주던 어르신도.

‘실망스럽구나, 비비안.’

‘뱃속의 아이가 정리되기 전까지 바깥 활동은 절대 하지 마렴. 대외적으로는 유학을 핑계로 대야겠어요. 어디로 보내놓는 게 좋을지 고민이네요.’

자신의 사정을 들으면 위로를 받고 응원을 해줄 거라 생각했던 부모님에게서 처음으로 받는 냉정한 시선이 비비안의 심장을 뚝 떨어트렸다.

더불어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정리’하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힘을 가진 부모님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임신 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빌고 또 빌어서 겨우 지킨 아이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다.

자신을 보듬어주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 미미에게 건강함을 주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그리고 아파하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까지.

비비안이 강해지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미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집안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자신의 자리였던 후계자 자리를 미미라는 존재 때문에 동생에게 넘겨야 했을 때도 비비안은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덕분에 하고 싶었던 여배우를 할 수 있게 됐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비비안에게 남은 건 미미밖에 없었다.

‘미미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미미가 건강하게 어른이 돼서 남들이 다 하는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비비안은 뭐든 희생할 수 있었다.

남자와 사적으로 얽히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슬슬 결혼해야지?”

“너한테 있는 흠결 때문에 이해해줄 상대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단다. 다행이 네 사정을 이해해줄 만큼 이해력이 있는 사람을 찾았단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미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이기만 하면 됐다.

남자에 대한 관심은 미미를 낳으면서 사라졌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이번에 특별한 일을 경험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아직 자신이 남자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느낄 수 있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건 미미 때문이었다.

남자를 만날 여력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미미한테 잘해주는 남자한테 매력을 느꼈던 걸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미에게 최선을 다 해주었던 남자.

미미가 너무도 사랑하는 남자.

그 남자에게 비비안이 관심을 안 갖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집안에서 결혼 할 남자를 붙여주지 않았다면 그 남자에게 호감을 표했을 것 같다.

‘그럼 미미도 좋아했을 텐데.’

아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미미가 그 사람을 받아들여줄지 모르겠네.’

제 딸아이의 눈이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아서 집안에서 붙여준 남자를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된 것이다.

집안에서 붙여준 남자는 그녀보다 9살이 많은 남자였다.

나이가 많아서 하자가 있는 자신과 연결 된 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첩에게서 아이를 많이 낳은 상태인데, 첩에게서 본 자식들이 전부 딸이었고, 이번에 그녀와 결혼하는 이유는 아들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팬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픈 딸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 비비안씨.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군요. 제가 정말 팬입니다.”

딸아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으로 생겼기를 바랐는데, 이미 너무 높은 기준의 얼굴을 봐서 그런 걸까?

평소였다면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 생각했을 얼굴을 봤는데도 영 마음에 차지가 않았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음식점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기업의 CEO.

그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가치가 대단한 건 아니고, 그도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라서 비비안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비비안씨한테 아이가 있다는 걸 듣고 많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비안씨의 첫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있어서 제게 기회가 온 걸 테니까요.”

미미를 언급하는 남자의 말에 비비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변한 기색을 알아보지 못한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아이를 좋아합니다. 제 자식들 육아는 제가 전부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죠. 비비안씨의 딸아이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할 생각입니다.”

“…제 딸은 교육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에요. 그 아이한테 짐을 얹어주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바라는 건 미미가 사랑 받고 자라는 거에요. 엄마 사랑도 받고, 아빠 사랑도 고루고루 받으면서요.”

“몸이 약한 아이이니 마음이 약해지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비비안씨 딸아이와 앞으로 생길 우리 아이를 차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별을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남자는 이미 비비안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 마냥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까지 불편하기만 한 적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한참 남자의 설레발을 받아주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비비안이 남자에게 물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하하, 슬슬 제가 궁금해지신 모양이네요. 얼마든지 하십시오. 비비안씨한테는 뭐든 전부 오픈마인드입니다.”

사실 아까부터 미미에게 과한 참견을 하려는 듯 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비비안이다.

미미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차별하기 싫어서 본인이 똑같이 교육을 하겠다는데, 마시고 있는 차를 얼굴에 끼얹고 싶을 지경이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아이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건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쫑내고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집안에 누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꾸역꾸역 분노를 참아내고 있었다.

‘이 남자는 안 되겠어.’

비비안은 너무 감정이 상하지 않게 남자를 거절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 남자가 바라는 것이 아들이라는 점을 떠올려 물었다.

“만약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낳는다면 어쩌실 건가요?”

“흐음, 무거운 주제를 질문하시는 군요. 제가 딸만 무려 일곱입니다. 아이를 임신시키는 능력이 뛰어나서 저를 애지중지하던 가문 어르신들도 너무 딸만 낳으니 슬슬 저에게 실망을 표하시더군요.”

가문의 남자들이 가장 많이 강요받는 것이 생식 능력이다.

많은 아이를 낳아서 이곳저곳에 팔아먹을 자식들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여자아이보단 비싸게 팔 수 있는 남자아이를 선호했다.

“저도 남자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증명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이미 아이를 많이 낳아서 그런지 여자한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비비안씨가 남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평소 비비안의 팬이었던 남자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문 어르신들에게 아들을 낳겠다는 걸 핑계로 비비안과 결혼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사실 몸이 약한 아이를 낳은 비비안씨와의 결혼을 가문 어르신들은 많이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비비안씨라면 아이를 더 낳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니 허락을 해주시더군요. 저도 가문 어르신들이 기뻐하는 걸 보고 싶긴 합니다만, 그게 비비안씨와의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 이유가 되진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자기가 그렇게 말을 하면 비비안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 하는 결혼이 아니라 그녀에게 매력을 느껴 남자아이를 핑계로 얽은 거라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얘기를 들은 비비안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들을 낳지 못할 것 같다는 핑계를 대고 남자를 거절하려 했는데 그 방법이 막혀버렸으니 말이다.

‘굳이 미미한테 보여주지 않아도 반응이 짐작 되는데 어쩌지?’

미미가 저 남자한테 앞으로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면 싫다며 경기를 일으킬 거다.

솔직히 비비안도 이젠 저 남자가 싫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일어나봐야겠어요.”

“예? 갑자기요?”

“네, 죄송해요. 미미가 절 찾아서요.”

미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거짓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 그럼 지금 따님에게 가시는 겁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따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할 텐데, 미리 만나서 친분을 쌓으면 서로한테 좋지 않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비비안은 연기톤으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아이가 아플 땐 관계자가 아니고선 출입이 금지 돼서요. 낯선 사람을 미미가 좋아하지도 않고요.”

“예?”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비비안은 남자가 붙잡지도 못하게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와 버렸다.

“자, 잠시 만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가셔야…!”

뒤에서 남자가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비비안은 듣지 못한 척 서둘러 걸어갔다.

미미에게 일이 생겨서 보러 가야 한다는 건 거짓말이긴 해도,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까지 거짓말 한 건 아니었다.

비비안은 선이 끝나자마자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미미한테 아빠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과연 집안에서 연결해주는 남자 중에 미미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줄 사람이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남자처럼 다정하길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이미 너무 완벽한 비교 대상이 존재하는지라, 비비안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더불어 선 자리를 내팽개치고 도망 온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도 걱정 되는 상황이었다.

미미를 자신의 흠결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부모님과 가문 어르신들에게 그 남자가 정말 별로였다는 걸 어떻게 설득 할 수 있을까?

비비안은 차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기 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앞날이 막막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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