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6화 〉 #68. 비비안 로랑 (7)
* * *
방관만 하고 있던 비비안의 일.
연주 누님과 대화를 하고 나서 끼어들자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지금까지 비비안이 당하고 있는 걸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안 좋았었다.
상황을 몰랐을 때도 상황이 거슬리고 신경 쓰였는데, 누군가로부터 해코지를 당해서 생긴 일이라는 걸 알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계속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할 바에야 도와주고 편해지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이후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떤 도움을 줄까’였다.
또한 도움을 준 것을 알릴지, 아니면 알리지 않고 도와줄지도 고려해야 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지금의 행동이었다.
기왕 도와주기로 한 거, 그녀가 진심으로 필요한 부분에 도움을 줄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비비안은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의 범위를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내 신분은 남자 아이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미미야, 이제 좀 괜찮아?
응, 와줘서 고마워.
다행이도 미미는 내 방문에 감격하는 흐뭇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제야 방문한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미미는 자신을 보자마자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혹여나 울다가 자신이 가버릴까 두려웠는지 내 옷깃을 꼭 쥔 채였다.
빠질 살도 없어 보였던 미미인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미미는 살이 더 빠진 듯 왜소해져 있었다.
몹쓸 어른으로 인해 아이가 피해를 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아이가 있다보니 더 화가 난다.
절절하게 끓었을 부모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눈이 퉁퉁 부어서 두 배가 됐다.
아앗!
미미가 베개에 얼굴을 푹하고 묻었다.
우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속에 감정을 너무 쌓아두는 건 좋지 않았다.
마음은 좀 괜찮니?
우니까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아.
속이 많이 상했나보구나.
나는 괜찮은데 엄마가 걱정 돼. 나 때문에 사람들이 엄마를 욕하잖아.
미미가 그런 생각 하면 엄마가 더 속상해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
미미를 만나기 전, 아이가 현재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걸 듣고 왔다.
비비안은 미미가 그런 못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다독여주길 바랐고, 나 또한 내 자식이 이런 일로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면 경악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한테 바라는 도움이 미미를 달래는 일이라는 건 좀 허탈한데.’
내가 그녀에게 필요한 도움을 말해달라고 하자 단숨에 미미를 달래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짓을 저지른 남자를 응징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허탈한 건 허탈한 것이고.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미보다 못하다는 건 인정해.’
미미를 달래는 일은 비비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임이 맞았다.
비비안이 센스있게 자리를 피해준 덕분에 미미는 마음 놓고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미미는 속마음을 털어놓기 전에 야무지게도 엄마한테 자기가 한 말을 전달하지 않는 걸 약속 받아냈다.
사실 미미를 위로하고 비비안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 말할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아직 아이라고 우습게 봤다가 큰 코 다칠 뻔 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미를 단순히 아이로 생각해서 어르고 달래는 걸로 일을 수습하지 않기로 했다.
비비안씨는 네가 모르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미미가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아도 충분히 견뎌낼 만큼 성숙한 상태라고 생각해.
참고로 아이에게 어른스럽다는 말만큼 기쁜 칭찬이 없는 법이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칭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미미의 표정이 풀어진다.
이번에 사람들이 엄마한테 화를 내는 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야.
알고 있어. 근데 엄마가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할머니가 숨기라고 해서 그런 거야. 엄마는 날 숨기고 싶지 않아 했어.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할머니한테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텐데….
미미는 외할머니를 마녀라며 거침없이 욕을 했다.
외할머니랑 사이가 안 좋니?
몰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걸. 만나서 대화라도 나눠봤어야 사이가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외할머니는 아픈 미미를 만나러 오지 않은지 오래라고 했다.
이런 일이 생겼는데도 가문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 걸 보며 사이가 안 좋구나 예상 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인 듯 했다.
미미를 달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비비안에게 도움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엄마가 너무 답답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외할머니가 강제로 숨기라고 했다고 말이야.
그럴 순 없었을 거야.
왜?
미미가 아직 아프지 않은가?
만약 그런 식으로 폭탄 발언을 했다가 미미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겠나?
비비안이 가문에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도 미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걸 미미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이번 일이 본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미미이지 않은가?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비비안씨가 결혼을 거절해서거든.
결혼?! 엄마 결혼해?
아니. 결혼을 거절해서 벌어진 일이야. 미미 때문이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미미는 이번 일의 피해자인 거고.
참고로 이 부분은 비비안씨가 말해줘도 된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내가 오늘 나타나지 않았다면 비비안이 미미에게 말했을 내용이라고 말이다.
마녀 짓이지?
어?
엄마 괴롭히는 건 마녀밖에 없어. 이번에도 마녀 짓일 거야.
이번 사건의 원인을 찾자면 그런 남자와 결혼을 주선하고 함부로 미미의 존재를 알린 비비안 어머니의 잘못이 40%쯤은 될 것이다.
나머지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약점으로 곤경에 빠트린 남자의 잘못일 것이고 말이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 나 때문에 항상 마녀한테 당하고만 살아. 내가 어떻게 해야 엄마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이대로 계속 좋지 못한 생각에 빠지다보면 정말 안 좋은 생각까지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미미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없어?
없어. 나는 병실에 갇혀서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걸?
미미가 있어서 비비안씨가 힘을 낼 수 있는 거야. 비비안씨가 살짝 귀띔해준 게 있는데, 이젠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래.
…엄마가 정말 그랬어?
변명도 하지 않고 가만히 당해주기만 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나도 곤욕스러웠다.
미미도 내 말에 희망을 봤는지 우울하던 낯빛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응.
마녀가 한 짓이라고 사람들한테 말할 거래?
글쎄다. 자세한 건 못 들었어. 아무튼 비비안씨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미미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도 비비안씨를 도울 생각이야.
진이 어떻게?
여러 방법이 있겠지?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해.
미미는 내가 비비안을 도울 생각이라고 하니 든든해졌는지 방실방실 웃음을 피워냈다.
나와 다시 재회를 하고 처음으로 짓는 웃음이었다
? ? ?
아이가 웃는 걸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어요.
미미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났음을 느끼고 비비안이 다시 병실로 찾아왔다.
비비안은 방실방실 웃고 있는 미미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손등으로 비비기까지 했다.
한바탕 울고 나와 대화를 나눴던 게 곤했는지 미미는 엄마가 왔다는 걸 알게 되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내가 아직 병실에 있었기에 자지 않으려고 잠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미미가 잠들고 나서 병실을 나와 복도에서 비비안씨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미미를 달래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한시름 덜은 얼굴이었다.
미미한테 미리 말씀 드렸던 얘기들 전부 말해줬어요.
아이 반응은 좀 어떻던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참 많은데 미미랑 약속을 해서 자세히는 말 못할 것 같아요.
???
속마음을 털어놓기 전에 엄마한테 말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미미의 깜찍한 짓에 비비안씨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미미도 오랜만에 웃는 거겠지만, 비비안씨도 오랜만에 웃으시는 것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아….
요즘 상황에서 웃을만한 이유가 없다 보니 미미처럼 자신이 웃어 본 게 오래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미미한테는 일이 잘 해결 될 거라며 허풍을 떨어놨는데,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인가요? 미미와 약속을 해놔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곤란해요. 미미한테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니까요.
기자 회견을 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부모님 말씀을 얌전히 듣고 지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미미를 잃는 것보다 두려운 게 없더라고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당해주다가 미미가 앓아눕고서야 후회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비비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기자회견을 열 거에요.
그리고요?
그동안 모아둔 증거가 있어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모아둔 증거인데, 결국 이걸 쓰게 되겠네요.
비비안은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아이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릴 생각이라고 했다.
그 남자는 어떻게 하시고요?
문제는 남자 쪽이다.
기자회견으로 여론이 달라진다 해도 남자가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같은 일이 반복 될 뿐이었다.
그 사람한테 쓸 약점도 구해놨어요. 다행히 멀쩡한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말로만 들어도 위험할 것 같은 해결방식이네요.
가뜩이나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가문과 척을 지게 될 텐데, 남자 쪽을 협박해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가뜩이나 남자는 이미 본인의 성정이 매우 치졸하다는 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게 전부거든요.
결국 그 남자와 관련 된 문제는 부작용이 많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억지로 끼워 맞춘 방법이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본격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남자 문제는 저한테 맡겨주면 안 될까요?
네?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굉장히 깔끔하게.
????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서도 비비안씨는 믿을 수가 없었는지 고개만 갸우뚱했다.
제가 대단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한 건 아니고, 아는 지인이 그쪽으로 힘이 좀 있거든요.
그 친구 힘을 빌리면 아마 찍소리도 못하고 쥐구멍에 들어갈 겁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거에요? 제 일 때문에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요. 미미를 위로해주신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비비안은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며 거절하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상황 아니었나요? 도와주겠다고 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라면서요.
…….
부담 돼서 싫으셔도 미미를 생각하면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요?
비비안이 미미의 얘기에 눈을 번쩍 떴다.
내 말을 듣고 뒤늦게 비비안이 자신의 상황을 다시 자각했다.
그러게요. 저도 참 바보 같이.
이기적으로 굴어요.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이 생기면 전부 다 챙기고요. 앞으로는 그래야 미미를 지킬 수 있을 거에요. 알고 있죠?
네, 맞아요. 이런 마음가짐으론 미미를 지키지 못할 거에요.
정신이 번쩍 든 비비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자,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그 남자 처리하는 거 저한테 맡겨볼래요?
…정말 해결해주실 수 있는 거죠?
비비안씨가 바라는 대로 될 거에요.
꿀꺽!
침을 크게 삼킨 그녀가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적신다.
그리고서 매우 어려운 말을 한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후환이 두렵기는 했어요. 약점이 잡혀서 대놓고 뭐라하진 못하겠지만, 뒤로는 얼마든지 보복이 가능한 사람이니까요. 그때쯤이면 저는 가문에서 내쫓겼을 거고 그 남자한테는 정말 손쉬운 먹잇감이 됐을 거에요.
다 알면서도 왜 거절한 거에요?
저랑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비비안은 그동안 여배우로써 명성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사람들이 그녀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괜히 자신과 얽혔다가 나까지 피해를 볼까 걱정을 했던 거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돕기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한테 도와달라고 매달려도 부족할 상황인데, 그 와중에도 날 걱정했다는 거잖아.’
비록 그녀가 집안과 척을 지게 될 예정이라 해도, 성품 하나는 그 집안사람 중 누구와 견주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성품이 좋은 여성을 고작 일찍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핍박하다니….
‘그렇게 남들 시선이 중요한가?’
가족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번 기회에 그쪽 사람들과 연을 끊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더 나은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녀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짙은 호감이 느껴서 살짝 곤란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긴 해.’
최고의 여배우가 보내오는 호감이다.
이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또한 그녀가 나한테 호감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사람이 가장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줬는데 호감이 안 가는 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미미가 있다 해도 그녀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여성이었다.
든든하게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가 고플 나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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