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8화 〉 #68. 비비안 로랑 (9)
* * *
남자의 회사가 난리가 나서 그녀를 괴롭힐 겨를이 나지 않았던 걸까?
그녀가 기자회견을 무사히 치르고 나서도 남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비비안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자회견 날이 밝았다.
[힘내요.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
기자 회견장으로 들어가기 전 진해솔로부터 온 응원 문자에 비비안은 축 늘어트렸던 어깨에 힘을 줬다.
몸이 펴지니 자신감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기자들이 회견장에 모여 있었다.
저 기자들 중에는 남자의 사주를 받은 이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 잡은 비비안이 등장하자 기자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서 그녀를 찍어댔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비비안 로랑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아직 꺾이지 않은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 기자 회견으로 여론이 단숨에 바뀌진 않겠지만 희망은 생길 것이다.
적어도 오해만큼은 꼭 풀고 싶었다.
미미를 학대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 않은가?
기자들이 좋지 않은 태도로 굴어도 그 부분은 확실하게 해명을 해서 기사로 나가기를 바랐다.
그것이 기자 회견을 하는 그녀의 목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목적이 부디 이뤄질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속에서 마이크를 들어올렸다.
? ? ?
비비안이 잔뜩 긴장한 채로 기자 회견장에 들어선다.
나는 비앙카과 그 모습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저거 기자들한테 손 써놓은 거지?”
“당연히 해놨죠. 그러니까 저렇게 협조적이고 예쁜 질문만 하는 거고요.”
비앙카가 손을 쓴 기자들은 이미 비비안의 해명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가 대답하고 싶어 하는 부분을 정확히 캐치해서 질문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아군일 순 없었기에 다소 엉뚱한 방향의 어그로를 끌려는 기자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곧 다른 기자가 질문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켜버렸다.
덕분에 비비안은 초반에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금방 차분한 기색을 되찾아 인터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해명을 잘하네. 사과할 부분은 확실하게 사과하고, 오해한 소문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고.”
“표정에서 진실함이 절절 묻어나오네요. 솔직히 애를 끌어들여서 추잡한 소문을 만든 건 너무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여론이 바뀔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티가 나는 법이 아니겠나?
남자가 만들어놓은 여론에 휘둘린 사람들도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됐다.
“기자들한테 기사도 잘 써달라고 해. 해명한 게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네엥~ 그럴게요.”
“요새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네.”
“헤헤. 이틀 후에 기사가 하나 터질 거거든요.”
“그 남자랑 관련 된 일이야?”
“네에~ 계속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대박인 게 하나 걸렸어요. 이 남자, 주가 조작으로 용돈을 좀 두둑하게 벌었더라고요. 돈 욕심이 정말 장난 아니에요. 숨겨둔 엄청날 거에요.”
마음 같아서는 그 돈까지 쏙쏙 발라 먹고 싶지만, 숨겨 둔 돈을 알아내는 건 비앙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회사를 무너트려도 이 남자가 고생하는 건 아닌 거네.”
“호호호! 아마 법적 공방도 그렇게 오래 진행 되지 않을 거에요. 솜방망이 처벌이 되겠죠.”
“해외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져? 거긴 처벌은 제대로 하지 않아?”
“물론 형량이 약하진 않겠지만, 그쪽은 화려한 변호사 군단이 있으니까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하게 때리는 건 맞지만, 판사의 판결에 따라서 솜방망이 처벌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다.
특히 돈으로 무장한 변호사 군단에 덤터기를 씌울 사람을 만드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제대로 보복을 못할 거란 걱정은 들지 않았따.
내가 아는 비앙카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빠져나오게 만들 거라는 거야?”
“그냥 말해드리면 김빠지니까, 미리 말하지 않을게요. 기대해주세요. 곧 알게 되실 거에요.”
비앙카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대로 얼마 후 남자의 소식이 기사에 떴다.
이틀간 비비안의 기자회견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된 것에 비해 남자의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 대표, 횡령 혐의 조사 중 실종.]
[○○○ 대표, 도피로 결론. 해외 도주 가능성 높아….]
[뒤늦은 출국 정지. 가족들은 실종이라며 수사요청.]
“이 기사, 잠적 했다는 거 진짜야?”
“설마 진짜려고요. 제가 먹잇감을 놓치는 거 보셨어요?”
“네가 데리고 있어?”
“넹! 그 남자를 법적으로 처벌해봤자 결국 몇 년 살다가 나와서 다시 떵떵거리고 살 거거든요. 제가 숨겨둔 돈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잡아왔어요.”
숨겨둔 돈이 있어봤자 뭐하겠는가?
그걸 쓸 수도 없는데.
오히려 그런 돈의 존재가 남자를 더 괴롭게 만들 것이다.
“가둬두고 뭘 할 건데?”
“혹시 영화중에 그거 보신 적 있으세요? 되게 명작이라 유명한 영화인데.”
영화?
“한 남자가 납치를 당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감금 된 채로 살아가는 내용이에요.”
세계선이 달라진 탓에 내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제목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도 내가 알고 있는 그 영화와 내용이 유사한 작품이 나와 있었다.
해외 유명한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대단한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을 만든 감독님이 바로 내게 작품을 제안한 적 있는 연화정 감독이었다.
“설마 그걸 재연이라도 하려고?”
“그렇게 오래 가둬두진 못하겠죠. 그래도 감옥에서 편하게 지내는 꼴을 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딱 그놈이 죗값을 받아야 하는 기간까지만 가둬둘 생각이에요. 그 이후로는 깔끔하게 놓아줄 거고요.”
하지만 감금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살긴 힘들 것이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보호 받으며 오냐오냐 살았을 남자가 견디기엔 힘든 시간이 될 테니 말이다.
“메뉴는 하나만 줄 거야?”
“네. 뭐로 할까요? 영화 따라서 단팥빵으로 할까요?”
단팥빵에 미지근한 물.
24시간 돌아가는 감시 카메라에 작은 TV 하나를 넣어줄 것이라고 한다.
“그 방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무인도에다가 감금시설을 만들 예정이거든요.”
과연 비앙카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하며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깔끔하게 감금당한 채로 지내는 게 나을까.
개인적으로 둘 다 최악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계획한 대로 실행해.”
나쁜 짓을 많이 한 놈이니 그렇게 당해도 싸다.
비비안이 미미를 보호해야 해서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으로 좋지 못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그녀를 몰아붙이는 여론이 엄청나게 과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이잉
기사가 뜬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비비안이 확인을 했는지 연락이 왔다.
“그 배우 아가씨에요?”
“아이가 있는데 아가씨는 아니지.”
“주인님한테 마음 있으신 것 같던데.”
“음, 아니라곤 못하겠네.”
“진전이 있는 관계에요?”
“아직 확신은 못해. 미미가 있다 보니까.”
이번 사건으로 내게 마음이 많이 움직인 것으로 보였는데, 미미가 과연 나를 엄마의 애인으로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날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반응이 예상 안 된다고나 할까.’
날 팬으로 좋아하는 것과 엄마의 애인으로 만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지 않은가?
“그럼 주인님은요. 전 주인님 마음이 너무 궁금해요.”
“나? 나는….”
비비안한테 매력을 느낀 건 사실.
나를 좋아해주는 미미가 마음에 쓰이는 것도 사실.
다만 비비안과 나는 이미 한 차례 스캔들에 휩싸여 있어서 좋은 관계를 다지기 위해 만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여자가 아닌 사람에게 안경의 효과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확실히 마음을 못 정한 상태야.”
“제가 아는 주인님이라면 여자가 한 분 더 늘어날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크흠.”
“여자 유혹에 약하시잖아요.”
“내가 철벽을 얼마나 잘 치는데?”
“후후후. 눈이 높으셔서 그렇죠.”
평소에 철벽을 잘 치긴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먹잇감을 사냥하는 육식동물 마냥 낚아챈다.
“지금으로 충분해서 더 늘릴 생각 없어.”
“흐응~ 글쎄요오~”
“얄밉게 자꾸 그럴래?”
“후후후, 제 도움 필요해지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그 여자 꼬시는 거 도와드릴 수 있어요.”
“내가 너한테 그걸 부탁하겠냐?”
나는 괜한 소리를 하는 비앙카를 뒤로하고 비비안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그녀도 기사를 봤는지 남자에 관련 된 메시지였다.
[괜찮아요? 기사 봤어요. 전 괜찮으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요. 시간 될 때 연락주세요.]
순진한 그녀는 남자의 실종을 해외 도피라고 생각했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 된 남자가 지금쯤 돈을 싸들고 해외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비앙카의 예상대로 말이다.
“비비안.”
비앙카에게 슬쩍 눈치를 주니 그녀가 찰떡같이 이해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혼자 남게 되자마자 나는 비비안에게 통화 연결을 했다.
네, 해솔씨.
“연락 받고 전화 드렸어요. 기사 보신 거죠?”
네, 봤어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회사가 더 심각한 상황이었나봐요. 그렇게 도망쳐버릴 줄 몰랐는데….
“미안해요. 좀 더 확실하게 처리해드리려고 했는데.”
전 괜찮아요. 해솔씨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신경 쓰고 계실까봐 연락드렸던 거에요. 저는 그때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만족해요. 그 남자를 해솔씨가 건드려준 덕분에 절 괴롭힐 시간이 안 났나 봐요. 여론도 기자 회견 이후로 저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정말 오랜만에 응원한다는 댓글을 봤거든요.
그녀는 여론이 조금씩 자신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고무되어 있었다.
순수하게 비비안의 기자회견으로 오해를 풀고 마음을 돌린 사람도 있지만, 비앙카가 손을 쓴 덕분에 여론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거에요? 이 일로 작품이 완전 끊겼잖아요.”
애석한 점은 여론이 바뀌었다고 해서 비비안의 피해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이미지가 훼손 된 비비안을 배우로 캐스팅하려는 관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계속 아무도 캐스팅을 하지 않게 된다면 비비안은 더 이상 여배우로 활동하지 못하게 될 거다.
남자가 남긴 피해로 비비안이 계속 고통 받을 걸 생각하니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일이 끊겼지만, 천천히 다시 회복하면 돼요. 저는 이번 일이 무사히 해결 된 걸로 만족해요. 미미가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기만 하면 되거든요.
“참, 미미는 좀 어때요?”
미미는 예전보다 훨씬 괜찮아졌어요.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면 부담 될까봐 많이 고민했는데….
비비안이 말끝을 흐렸는데, 나는 대충 상황을 눈치 챘다.
“미미가 절보고 싶어 하나요?”
미미가 날 보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