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화 〉 #71. 휴식 겸 충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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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하지만 저도 선물을 좀 준비했어요. 우리 정화씨랑 정말 친한 친구 분들이라고 들어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요.”
“세상에. 이게 다 뭐람.”
“정말 우리한테 주는 거에요?”
“이럴 필요 없는데….”
“대단한 건 아니고 향수에요.”
친구들이 향수라는 말에 눈을 반짝인다.
쇼핑백의 브랜드만 봐도 상당한 가격대의 향수임을 짐작한 것이다.
“열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선물 드린 건데.”
정화씨에게 말하지 않고 비밀로 준비한 건지라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친구분들이 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나를 더 이상 책망하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무리가 되는 선물도 아니고, 우리 그룹이 CF를 찍어서 공짜로 받은 상품을 깔끔하게 포장해서 가져 온 거였다.
그쪽에서도 지인들 선물하라는 의미로 쇼핑백까지 넘겨주었으니 선물로 드리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이거 에어플레인이 선전하는 거잖아. 고급스러워서 갖고 싶었는데 가격대가 좀 나가더라고. 그리고 요즘 애들이 쓰는 거라서 사기도 뭐했거든.”
“이거 사면 분명 딸내미가 훔쳐 갈 걸?”
“하하! 맞아. 그것들이 웬수가 따로 없다니깐. 나이를 먹어도 애야. 애.”
“향수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향기가 좋아서 잘 어울리실 겁니다.”
“고마워요.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모르겠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식사를 끝냈을 무렵에는 맥주를 마시기 전, 집 구경을 해줬다.
집이 크고 방이 많기는 하지만 정작 사용하는 방은 몇 개 되지 않아서 구경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쓰고 끝냈다.
“다른 방은 뭐로 쓰는 거야?”
“여기에 입주해서 집안일 봐주는 분들이 지내셔.”
“역시 가정부까지 있구나!”
“그나저나 연애 얘기 좀 해봐. 나 너무 궁금해.”
정화씨가 친구들과 좀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대화하는 내내 맞장구를 치는 식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우리 얘기를 듣고 싶어 하던 친구들도 조금씩 다른 화제를 꺼내면서 대화를 진행했다.
맥주가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올라왔다.
정화씨도 친구들과 만난 것이 기뻤는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어른스럽던 그녀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해서 얼굴을 붉힌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난 둘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너 창창한 앞날을 막았던 전 남편이랑은 전혀 딴판이잖아! 정화 네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다.”
흥에 겨웠는지 반희실씨가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말했다.
굳이 지금 상황에서 꺼낼 필요 없는 전 남편의 존재를 꺼내면서 말이다.
오혜영씨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반희실씨의 맥주잔을 뺏어버렸다.
“너 취했다. 그만 먹어.”
“아이, 왜에! 나는 궁금한 것도 못 물어봐? 그리고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렇다니깐.”
“옐로카드야, 너. 네 기분이 좋다고 해서 정화한테 무례하게 행동하는 걸 봐줘야 해?”
“이게 뭐가 무례한 거야! 나 칭찬한 거야!”
“너 그거 구분 안 되는 것 자체가 취했다는 뜻이야. 미안해. 얘 말은 그냥 무시해.”
“정말 내가 실수한 거야?”
반희실씨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삐진 티를 냈다.
“어. 네가 지금 좋던 분위기 다 망쳤어.”
“아무리 그래도 전 남편 얘기를 함부로 꺼낸 건 실례지.”
친구들의 눈총에 반희실씨가 어쩔 수 없었는지 사과를 해왔다.
“미안하다. 나는 정말 나쁜 마음 없이 기분 좋아서 한 말이었는데….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어.”
“아니야. 괜찮아. 애들이 걱정하는 마음에 뭐라고 한 거니까 너도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전남편 얘기도 물어봐도 돼. 깔끔하게 정리 된 관계라서 상관없어.”
정화씨가 쿨하게 전남편의 얘기를 해도 된다고 하자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정말 말해도 괜찮아? 우리 때문에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친구끼리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거잖아.”
“기분 안 나빠. 그 사람이랑 엄청 복잡하고 나쁜 일이 있어서 헤어진 게 아니거든.”
결국 아닌 척 해도 정화씨가 전 남편의 일을 꺼내자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 사람이랑 결혼생활을 오랫동안 한 것도 주아 때문이었지 감정이 남아 있어서 지속한 게 아니었어. 그쪽도 나한테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주아 때문에 잠깐씩 얼굴 보고 살았지.”
“사실 나도 그래.”
“나도 남편 얼굴 본 지가 몇 개월째인지 몰라. 이젠 얼굴도 잘 기억 안 나.”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래도 남자가 있는 게 어디니? 난 지금도 솔로거든?”
여자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젊었을 적의 미모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럼 남자는 더 젊고 능력 있는 여자를 찾아 떠나간다.
남겨진 여자는 그저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쓸쓸함을 달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이혼을 결심한 것도 이 사람을 만나게 돼서야. 해솔이가 없었으면 아직도 그냥 결혼한 채로 혼자 살았을 걸? 주아가 일 잘하고 있는 거 보면서 흐뭇해하는 것밖엔 낙이 없었을 거고.”
정화씨가 말을 하면서 내 손을 잡아왔다.
다른 손으로는 배를 만지는 걸 보면 쌍둥이의 존재를 느끼며 행복해 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너처럼 확 이혼해버릴까? 얼굴은 비추지도 않고, 생활비만 타가는 놈인데…. 여태까지 호적에 이름 올려져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끼고 살았나 몰라.”
“그래도 남들한테 소개시킬 아빠가 있는 게 어디야. 애들이 반대하지 않겠어? 정화처럼 애인이 있으면 몰라도.”
결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스펙이 되는 세상인지라 여자들은 남자에게 사랑을 받지 못해도 이혼을 하길 두려워했다.
정화씨의 경우처럼 다른 남자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먼저 나서서 이혼을 하겠다고 나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내 아이는 그래도 자기보다 더 잘 키우고 싶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일 테니 말이다.
“애들도 이제 다 크지 않았어? 애들 때문에 이혼하기 무섭다는 건 핑계지.”
“맞아. 정화처럼 우리도 자기 인생 살아야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평생 자식 새끼 키우다가 죽을 거야?”
“정화 너는 어떻게 용기를 낸 거야?”
“나는 원래 맺고 끊는 게 확실해서 어렵지 않았어. 나는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지만, 먼저 배신한 사람한테까지 매달리고 싶진 않았거든.”
가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있어봐야 비참해질 뿐이다.
정화씨의 말에 친구들이 솔깃했는지 표정이 진지해진다.
내 주변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이었다.
지금도 그저 정화씨가 너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부러움에 솔깃해진 것일 뿐.
실제로 이혼을 결심하긴 어려울 것이다.
“제가 전남편 얘기를 꺼내서 불편했죠? 미안해요.”
반희실씨는 시간이 좀 지나 술이 깼는지 정신을 되찾고 나한테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전 상관없습니다. 정화씨가 워낙 깔끔하게 일을 해결하셔서 제가 신경 쓸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요? 역시 정화가 똑부러지긴 해.”
“매력이 넘쳐흐르시죠.”
“호호호! 정화한테 정말 푹 빠지셨나 봐요. 정화 보는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여요.”
“네. 엄청 사랑합니다.”
“어머어머!”
네 난데없는 고백에 친구들이 꺄악꺄악 소녀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정화씨는 얼굴을 붉히며 내 옆구리를 또 쿡하고 찔렀다.
“아야.”
“애들 앞에서 왜 그래….”
“왜요?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사랑싸움 하는 거야? 어쩜. 나 막 속이 간질간질하다. 얘.”
“이렇게 핑크핑크한 분위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우! 그만 놀려!”
잠깐 흐트러질 뻔했던 분위기가 묻히고, 다시 화기애애해진다.
정화씨의 친구들은 다시 좋아진 분위기 속에서 수다를 떨다가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우리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만났다 보니 다들 할 얘기가 워낙 많았던 것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더 늦게까지 놀고 싶었으나 각자 가정이 있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미리 택시를 불러서 친구분들을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달라고 팁까지 주어 보냈다.
모두를 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정화씨가 식탁을 치우고 있었다.
“힘들 텐데 그걸 왜 정화씨가 치우고 있어요? 쉬고 있으라니까.”
바깥까지 가서 배웅하기엔 몸에 무리가 갈 것 같아서 굳이 집에 내버려두고 내가 나가 배웅을 했는데, 정작 정화씨는 집에서 쉬고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있었다니!
“애들은 다 갔어?”
“네. 정화씨도 이제 그만 쉬어요. 피곤하잖아요.”
정화씨의 손에 들린 접시를 잽싸게 빼앗아 싱크대에 집어넣었다.
“같이 치우자. 그럼 금방 치울 거야.”
“됐어요. 정화씨가 이러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제대로 청소 못한다고요.”
정화씨가 가지 않겠다며 버텼으나 움직이지 않으면 안아버리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내 말을 듣고 방으로 갔다.
나는 그녀가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
“절대 일어나면 안 돼요.”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씻는 것도 제가 다 치우고 해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꼼짝 말고 누워 계세요.”
완벽하게 퇴로까지 막고 난 나는 후다닥 아이템을 숨겨둔 곳으로 가서 물건들을 꺼내왔다.
깨끗하게 설거지를 해주는 아이템, 음식물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주는 아이템 등등.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많았다.
아이템을 이용하니 손님이 다녀간 흔적이 빠르게 지워지고 다시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싱크대에서 손을 닦은 후 위에 입고 있었던 니트를 벗으면서 정화씨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화씨?”
“으응….”
피곤했는지 어느새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조금 재우고 씻길까 하다가 마사지를 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사람이 낼 수 있는 힘의 상한치를 훨씬 넘긴 나는 쌍둥이와 정화씨 3명의 무게를 모두 감당해도 거뜬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정화씨는 임부복을 입고 있었기에 벗기는 게 무척 쉬웠다.
따듯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속옷까지 모두 벗긴 정화씨의 몸이 천천히 잠겨들어간다.
“으응? 해…솔이야…?”
물에 정신을 차렸는지 정화씨가 희미한 목소리로 묻는다.
내가 가끔 이런 식으로 그녀들을 씻겨주곤 했었기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네. 저에요. 편하게 계세요. 씻겨드릴 게요.”
“으웅…나…눈이…안 떠져….”
“역시 피곤하셨나봐요. 그래도 오늘 친구들이랑 재밌게 노셨죠?”
“응…스트레스가…확 풀렸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몸을 가누기 힘들어 바깥에서 만나지 못했지만, 나중에 아이를 낳은 이후에는 꾸준히 친구들과 놀러 다니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꼼꼼하게 씻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친구 분들이랑 수다 떠는 거 보니까 너무 좋았어요.”
학창시절 정화씨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이 됐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라면 주아 누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데, 그렇게 아름답고 풋풋했던 모습으로 친구들과 뛰어 놀았을 걸 생각하면 절로 아쉬워졌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흐응~”
정화씨가 반쯤 꿈의 경계에 잠겨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굳이 학창시절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데, 굳이 어릴 때를 아쉬워할 필요가 없지.’
쪽!
그녀의 볼에 진한 사랑을 담아 키스를 한 나는 부지런하게 손을 놀려 그녀의 몸에 붙은 더러움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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