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488화 (488/849)

〈 488화 〉 #73. 우놀 (1)

* * *

정화씨의 설득에 솔깃해지는 본인의 마음을 느낀 나는 솔직하게 그녀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곧바로 스케줄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생각난 아이들의 놀이터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세워놔야 했다.

나는 누구의 의견보다 아이들의 의견을 가장 먼저 물었다.

태양이는 슬슬 기계로 게임하는 것에 눈이 뜬 상태였다.

각종 게임 기기들이 놀이터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지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걸 좋아해서 영화관처럼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저번에 함께 영화관에서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경험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지현이의 의견도 곧바로 아이디어 종이에 적혔다.

마지막으로 현오.

현오는 각종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를 바랐다.

그렇게 애들의 의견을 한데 모으니 멜리사가 냉큼 내게서 그것을 낚아채갔다.

“놀이 공간 만드는 건 저한테 맡겨주세요! 제가 아이들이 환장할 공간으로 만들어드릴게요!”

그러면서 멜리사는 자신이 생각한 각종 아이디어를 추가로 건의했다.

“컨셉은 자연 친화적으로 했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아지트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원래 저 나이쯤 되면 친구들끼리만 아는 비밀 아지트가 갖고 싶어지기 마련이거든요.”

“맞아. 대부분 그렇지.”

친구들끼리 많은 비밀을 만들 나이.

그 비밀이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무겁지 않은 비밀이라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랜만에 의욕을 갖고 뭔가 해보려고 했다가 멜리사에게 홀랑 뺏겨버린 나는 닭 쫒던 개처럼 멍해져버렸다.

‘결국 내가 할 일은 스케줄인가.’

이건 뭐 활동을 하라고 하늘이 판을 깔아주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팬들이 날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적당한 스케줄을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넣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할 소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스케줄을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 목록이 보내졌다.

“이건 아예 여행을 가야 하는 거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하고 싶지 않다.

최소 하루 안에 끝날 수 있는 스케줄.

그도 안 된다면 최대 이틀에 끝낼 수 있는 스케줄을 골라야 했다.

“여긴 출연 해본 적 있는 프로그램이고….”

출연한 적 있는 프로그램이라 해도 시간이 지났기에 나를 섭외하고 싶다며 출연 제의를 넣은 모양이었다.

그땐 멤버들이랑 함께 출연했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서 출연하는 것도 다르다면 다른 점일 것이다.

“나 혼자…여기는 절대 못 나가지.”

다른 멤버들이면 몰라도 나는 절대 못 나간다.

혼자 살지 않으니까.

복작복작하게 가족들과 함께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화기애애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의 취지와 맞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에 들어 온 프로그램 하나.

“이건 정화씨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온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하루로 끝나지 않을 프로젝트 예능이라는 점이다.

‘우리랑 놀자’ 라는 프로그램인데, 홍윤아라는 MC가 맡아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게스트를 섭외해서 쉽게 접해보지 못할 목표를 정해 도전해보는 프로.

한 번 출연을 하면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재차 출연을 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말이다.

보통 때라면 바로 거절할 테지만 정화씨가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바로 거절하기 아쉬웠다.

사실 인터뷰식의 예능 출연은 좀 식상했다.

엄청나게 많은 인터뷰를 해왔고, 질문은 항상 비슷했으며, 내 대답도 당연히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활동적인 예능에 나가고 싶었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결국 그렇게 ‘우놀’을 따로 두고 고른 것은 라디오였다.

여태까지 멤버들과 함께 라디오에 출연했는데, 혼자서 라디오에 출연해보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더욱이 라디오는 내 얘기를 하기보단 시청자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경우여서 인터뷰에 대한 부담감도 훨씬 덜했다.

그렇게 라디오에서 몇 개 더 괜찮겠다 싶은 것을 고른 후, 목록을 정화씨 앞에 보여줬다.

“네가 출연하게 될 프로그램들이니?”

“이 중에 하나요. 정화씨가 나가라고 하는 거 나가려고요.”

“내가 선택을?”

뜻밖의 말이었는지 정화씨가 깜짝 놀란다.

“보통 그런 거 있잖아요. 저기에 나갔으면 좋을 것 같다는 거.”

팬들도 우리들이 어디에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을 자주한다.

그러니 정화씨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

“여기 있는 프로그램 중에 없으면 그냥 말로 해줘도 괜찮아요. 사실 여길 나간다고 저한테 크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나가도 크게 손해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기왕 나갈 거 정화씨가 나가줬으면 좋겠는 걸 나가려고요.”

“내가 원하는 거….”

정화씨가 단 번에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긴 했나보다.

“여기에 없어요? 정화씨가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있긴 하던데.”

“음….”

정화씨의 손가락이 멈추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

그녀가 꼬박꼬박 챙겨보는 프로그램에 내가 나오길 바란 적이 있긴 했나보다.

“그럼…여기 나가는 건 어떨 것 같니?”

“어? 우놀에요? 여긴 프로젝트 프로그램이라서 한 번 나가면 꽤 오랫동안 출연해야 할 텐데요.”

“아직 산달이 남기도 했고, 여기 MC분을 내가 너무 좋아해.”

“저도 다른 프로그램에서 뵌 적 있어요. 매너 있으시고 되게 젠틀하시더라고요. 여기 나가면 홍윤아 선배님 사인 받아줄게요.”

“정말?”

정화씨의 바램을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진도 찍어올게요.”

“그럼 너무 좋지!”

정화씨가 우놀을 재밌게 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나는 흥이나서 말했다.

“또 출연했으면 하는 프로그램 없어요?”

“어…그럼 혹시 삼대육은 없니?”

참고로 ‘3 VS 6’도 우놀과 마찬가지로 홍윤아 선배님이 출연하시는 프로그램이다.

가짜와 진짜를 찾는 간단한 포맷을 가진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진들의 톡톡 튀는 입담으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출연진은 5명의 고정과 게스트 1명이며 3가지 보기가 주어지고 그 중에 단 하나의 가짜를 찾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것도 연락 넣어볼게요.”

출연 제안이 오지 않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출연하고 싶다고 요청을 보내오면 거절할 리 없었다.

더욱이 이 프로그램은 부담 없이 출연할 수 있었다.

하루만 찍으면 끝나는 프로그램이니 말이다.

정화씨에게 컨펌(?)을 받은 두 개의 예능 프로그램이 회사 직원에게 전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두 프로그램 모두 제작진들이 너무 좋아하면서 오케이를 했다는 거다.

그리고 내가 출연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홍윤아 선배님에게서 따로 연락이 오기까지 했다.

­어~ 해솔아. 얘기 들었어. 이번에 우놀이랑 삼대육에 출연하기로 했다면서?

“예, 제 지인이 선배님이 하시는 프로그램을 너무 좋아해서요. 선배님 싸인을 꼭 받아오라면서 추천을 하더라고요. 저도 평소에 재밌게 보던 프로그램이라서 출연하고 싶다고 제안을 넣었어요.”

­그러게. 우놀은 제작진이 섭외를 한 건데, 삼대육은 네가 하고 싶다고 했다면서?

“예. 삼대육도 엄청 좋아해서요. 제가 되게 예리해서 진짜 가짜는 엄청 잘 찾을 겁니다.”

­우리 프로그램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아마 실제로 해보면 깜짝 놀랄 걸?

홍윤아 선배님의 너스레에 화기애애한 통화를 이어갔다.

­휴식기라는 소식을 듣긴 했어. 요즘 그래서 그런지 예능 작가들이 다 에어플레인 섭외해오겠다고 난리였거든. 휴식기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벌써부터 활동 시작해도 괜찮겠어?

가뜩이나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인지라 한 명 한 명 챙기기 힘들 거다.

솔직히 나는 그녀가 하는 프로그램에 몇 번 출연해서 만난 게 인연의 전부인지라 이렇게까지 세심한 배려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충분히 쉬었고, 완전히 활동을 시작하는 건 아니라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그래. 촬영하기 전에 밥 한 번 먹자. 내가 우리 프로그램 출연 팁 좀 줄게.

“예! 감사합니다.”

홍윤아 선배님과의 전화를 받고 나니 예능에 출연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아졌다.

이렇게 게스트를 배려해주시는 분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출연하다고 하니 시간을 오래 끌기 싫었는지 아주 빠르게 미팅이 잡혔다.

삼대육은 한 번의 미팅만으로도 출연이 가능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우놀은 장기 프로젝트를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여러 번의 사전 미팅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와~ 진해솔씨! 너무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뭐 마실래요? 커피? 녹차? 어머! 뭐 이런 걸 다….”

제작진이 마실 걸 묻는 사이, 매니저가 컵 캐리어를 들고 왔다.

“커피는 자주 드실 것 같아서 생과일로 가져왔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생과일 주스야 없어서 못 먹죠! 감사해요. 얘들아~ 하나씩 가져가.”

“와아~ 난 오렌지!”

“청포도 좋아하는데, 잘 마실게요.”

작가들이 주스를 하나씩 손에 들고 본격적으로 우놀의 미팅을 시작했다.

“시간을 너무 끄는 장기 프로젝트는 지양해달라고 하셔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해봤거든요. 확인해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저희 프로그램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접해보기 힘든 일을 시도해보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래서 익숙한 걸 고르시기보단 해보지 못한 낯선 목표를 정하시는 걸 추천해드려요. 이 프로그램은 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거든요.”

평소에 해보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해보지 못했던 것들.

혹은 이루지 못하고 접어버렸던 꿈같은 것들을 말해준다면 큰 도움이 된다면서 내게 의견을 구했다.

나는 작가님이 보여주는 것들을 확인하면서도 머리를 굴려서 해보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해봤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 뭔가 생각난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예리하시네요. 근데 이건 좀 어려울 것 같아서요.”

“어려운 거면 더 좋아요! 안 된다고 해도 일단 의견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뭐든 다 가능해요. 황당한 걸 말한다고 저희가 속으로 욕하고 그러진 않거든요.”

작가님의 너스레에 어쩔 수 없어져서 번뜩하고 떠올랐던 걸 말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제가 아이돌이 되지 않았으면 지금 하고 있었을 일을 생각해봤어요.”

“오! 괜찮네요. IF 굉장히 좋아요. 그래서 해솔씨는 아이돌이 되지 못했으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나요?”

“저라면 아마도….”

내 또 다른 인생.

이젠 존재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과거.

그게 갑자기 번뜩 떠오른 건 왜일까?

“회사원이 됐을 것 같아요.”

“네? 회사원이요?”

작가님들에겐 너무 말이 안 되는 말이었는지 반응이 썩 좋진 못했다.

“네. 회사원이 돼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일을 했을 거에요.”

“음, 일단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이돌이 안 됐다면 뭘 했을까. 근데 회사원은 솔직히 프로젝트를 만들기 어려운 소재에요. 협조를 구할 회사가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고, 해솔씨는 어릴 때부터 아이돌이 되려고 춤이랑 노래를 배우셨을 거잖아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이상 회사원이 된 나를 촬영한다고 해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어려울 거죠.”

작가가 차분하게 내 아이디어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만 저도 막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해솔씨 나이대에선 지금 딱 대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할 시기란 말이죠?”

“…그렇죠.”

“그럼 이건 어떨까요? 대학생이 되어보는 거요.”

대학생이 되본다고?

“대학교는 제가 지정해드리지 못해도 학과는 정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물론 연예계 쪽이랑 관련이 없어야 해요.”

괜히 잘 나가는 프로그램의 작가가 아닌 듯 아이디어가 쑥쑥 나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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