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0화 〉 #73. 우놀 (3)
* * *
내가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어 보인다는 걸 캐치한 피디님이 말했다.
“어…컨셉을 벌써 떠올리셨어요?”
“좀 더 생각해보긴 해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있긴 하네요.”
“지금 피디 좀 당황했는데? 아마 몇 가지 컨셉을 짜왔을 거야. 아예 맨 땅에 헤딩 시킬 리가 없으니까.”
“그럼 그것도 보여주세요. 아이디어로 참고할게요.”
“허허.”
작가님이 피디님 눈치를 슬며시 보더니 내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되게 꼼꼼하게 자료 조사를 다 해놓으셨네요.”
“윤아 언니가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분을 맨땅에 헤딩 시킬 순 없죠. 참고용으로 좋아 보이는 뮤직비디오 유티비 주소랑 현직 뮤비 감독님을 섭외해뒀어요. 그분에게 도움을 받아서 밑그림을 그리면 되거든요.”
뮤직비디오 제작에 가장 중요한 카메라 감독님도 내가 바라시는 분으로 최대한 섭외해보겠다며 제작진이 대단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 그럼 저희 뮤비 촬영 감독님 불러도 되나요?”
우리 데뷔 때부터 맡아서 해주신 분이라서 아마 해달라고 부탁하면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니 피디님 얼굴이 새하얗게 돼서는 다급하게 말했다.
“…너무 비싼 분은 안 돼요. 저희가 기부해야 할 금액도 있어서.”
“아~ 비싸긴 하시죠. 워낙 실력이 좋으신 분이시라서.”
우리 뮤직비디오 찍는 카메라 감독님이라는 게 업계에 소문이 돌면서 그분을 모셔가려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 분에게 예정에 없는 도움을 받으려면 업계에 맞는 보수 정도는 챙겨줘야 하는 법이었다.
“개인적으로 저희가 알고 있는 카메라 감독님도 실력이 참 좋으시거든요….”
피디님의 간곡한 부탁에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다가 내 개인자금으로 그분을 부르겠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세상을 살아가며 타협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음…혹시 제작비가 어느 정도 될까요?”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한 편 제작하는데 드는 비용은 천차만별이다.
얼마의 돈을 쓰느냐에 따라 뮤직비디오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내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피디님을 바라보자 불안하게도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말했다.
“제작비는 게임을 통해 직접 따내셔야 합니다.”
“아니, 기부하겠다고 1억을 준비해놓고 제작비를 우리 스스로 따내라고? 너무하잖아!”
“게임을 잘 하시면 엄청나게 많은 자본금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좋을 수 있어요?”
“최대 얼마인데.”
“1억!”
“1억?! 1억을 탈 수 있으면 완전 대박이긴 한데…. 너희들 진짜 돈 어디서 난 거냐?”
“협찬이 좀 많이 들어와서요. 대신 협찬 광고를 좀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 정도야 뭐 얼마든지 해야지! 그럼 최소는?”
최대 1억.
좋기야 하지만, 그걸 따낼 수 있을 때나 좋은 거고 최소가 제일 중요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둘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제공해드리는 금액은 1천입니다. 거기에 게임을 통해 추가적으로 돈을 벌어가시는 거죠.”
“에이이! 말도 안 돼, 1천이라니! 너무 짜다! 스태프 고용비로 다 나가겠어!”
“인건비, 식비 그리고 장비를 빌리는데 드는 비용은 저희 쪽에서 해결할 겁니다.”
“아~ 그래?”
그런 거라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게임을 통해 제작비를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어떻게든 발품을 팔아서 제작을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해보인다.
‘내가 원하는 컨셉은 영영 못하겠지만.’
블링블링한 아이돌 컨셉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
“저기, 지인들한테 물건을 빌려서 쓰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걸 막으면 안 되겠죠. 다만 빌리는데 비용이 들면 그건 제작비에서 차감하셔야 합니다.”
“공짜로 빌리는 건 괜찮다는 거죠?”
“네.”
그렇다면 확실히 일이 쉬워진다.
값비싼 보석은 재벌 딸인 메이드들이 흔쾌히 조달해줄 테니 말이다.
각종 명품들도 집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적당히 가져오면 됐다.
다만 그 명품의 출처를 어떻게 밝힐지가 고민 거리였다.
‘그냥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밝혀야 하나?’
뮤비 촬영 때 필요할 소품 걱정을 하는 사이.
홍윤아 선배님은 제작진을 좀 더 쪼아서 게임에 대한 힌트를 얻어가려고 했다.
“게임은 뭐로 할 건데?”
“그건 아직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진짜 이럴 거야? 진짜 1천으로 뮤비 제작시킬 생각인 건 아니잖아. 이렇게 귀한 친구 불러다가 고생시키면 우리 프로그램 망해요! 이 친구 팬이 몇 명인지 알지?”
“어휴, 저희가 설마 그렇게 어렵게 하겠습니까?”
“적은 제작비용으로 우리가 죽으려고 하는 거 찍을 생각이잖아. 아니야?”
“흠흠! 그렇게 팍팍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홍윤아 선배님의 말이 예리하게 상황을 꿰뚫었는지 당황스러워 하시는 피디님.
그러면서도 끝까지 게임에 대한 힌트는 주지 않았다.
“하…쉽지 않네, 쉽지 않아.”
결국 선배님도 포기하는 눈치였다.
게임을 해서 제작비를 따내야 하는 상황은 예능적으로 매우 익숙하고 재미를 주는 구도였지만, 나한테는 낯설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제작비를 따내야 하는 게임을 하기 앞서, 도대체 뭘 준비하고 가야 할지 막막했다.
‘뭘 알아야 사전에 준비라도 하고 갈 텐데….’
해서 나는 미팅이 끝나고 카메라가 꺼졌을 때 선배님에게 여쭤봤다.
“선배님, 게임은 어떤 걸 연습해야 할까요? 정말 미리 말씀 안 해주시나요?”
“여기 제작진들이 독해서 안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정말 안 가르쳐주거든. 그래도 대충 얘네들이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몇 개 알려줄게.”
“네!”
홍윤아 선배님의 속성 과외를 통해 제작진이 준비할 게임에 대한 대비를 해나갔다.
옛날 게임부터 시작해서 요즘 유행하는 게임 그리고 초성 게임 등등.
별의 별 게임들이 예로 제시가 되었다.
“연습해오겠습니다, 선배님!”
“그래그래.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와도 괜찮을 거야. 너무 어렵지 않게 낸다고 했어. 진짜 천만 원만 달랑 주고 뮤비 제작하라고 할 사람들은 아니야.”
내가 혹여나 부담을 가질까봐 걱정하며 다독여주신 덕분에 안도감이 들었다.
솔직히 천만 원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야 한다고 하면 예능적으로는 재밌겠으나, 내가 바라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바짝 긴장했는데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할 수 있겠어? 시간이 고작 일주일밖에 없는데. 만약 하다가 못할 것 같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 이미 작가들이 곡도 대충 준비를 해놨을 거야.”
“네, 선배님. 그래도 기왕 이렇게 직접 해볼 기회가 생겼는데 노력해보지도 않고 편하게 가기엔 아쉬워서요. 욕심이 나기도 하고요.”
“아휴, 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나도 슬슬 부담이 되려고 하네. 내가 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몸치거든. 알고 있지?”
“음, 선배님께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하여튼 센스있다니까. 그래그래. 나도 열심히 춤이랑 노래 연습 해올게.”
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반겨주었다.
“주인님 오셨어요!!”
“미팅 잘 하고 왔니?”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바깥에 나가서 일을 하고 오니 이런 맛이 있네.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칸나와 정화씨 그리고 실 유모님까지.
이건 직접 경험해 본 가장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이 빳빳해진다.
“맛있는 거 사왔어. 만두랑 찐빵.”
“와아! 맛있겠다!”
“칸나는 레몬에이드, 정화씨는 토마토주스 그리고 실 유모님은 커피에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
“레몬에이드! 제 취향을 어떻게 아시고….”
그녀들이 만두와 찐빵을 먹으면서 행복해한다.
나는 그걸 보면서 오늘 미팅 때 있었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신다고요?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는 건 좋은 일이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뮤직비디오가 뭔가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칸나가 핸드폰을 꺼내 우리 곡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여기 계신 분, 사장님 아니신가요?”
참고로 실 유모님이 날 부르는 호칭은 의뢰인님에서 사장님으로 바꾼 상태였다.
사장님이 의뢰인님보다는 훨씬 위화감 없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우리 주인님! 완전 멋있으시죠? 노래도 엄청 잘 부르세요. 아주아주 유~명한 가수시거든요. 혹시 가수가 뭔지 아세요?”
“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직업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장님께서 이렇게 화려하고…격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노래를 부르는 직업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이런 걸 하는 사람들은 지위가 낮은 편이라서요.”
“우리 세계에서도 사실 초반에는 썩 좋은 대우를 못 받았어요. 그러다가 신분제가 사라지고, 세상이 발전하면서 가수라는 직업이 사람들의 우상이 된 거죠. 지금은 대부분의 10대 학생들이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해요. 아니면 연예인을 동경하고 좋아해서 팬이 된다거나요.”
칸나의 설명에 실 유모님이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처음에는 눈이 너무 어지러웠는데, 계속 보다 보니 화려한 것이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습니다. 가사는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아무튼 이런 걸 사장님께서 제작하신다는 뜻이시죠?”
“네.”
“혹시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여기 보이는 마법만큼 대단한 경지는 아니지만, 공중에 띄우는 간단한 것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실 유모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CG와 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를 실제 모습 그대로 찍은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 세계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아요.”
“아!”
실 유모님의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잊었습니다. 마법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촬영하신 겁니까? 이것도 과학이라는 걸로 해낸 건가요? 믿을 수가 없네요. 어쩌면 과학이라는 게 마법보다 더 위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실제로 일어난 걸 찍은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초록색 크로마키에서 춤을 췄고, 배경은 전부 CG로 만들어낸 거죠.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서 거기에 붙여 넣은 거에요. 이렇게 말해도 잘 이해가 안 될 것 같긴 하겠네요.”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나중에 보면 주인님께서 나온 예능을 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작하는 걸 찍어서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리고 칸나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해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네? 그럼 되겠어.”
“하나하나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천천히 다 알려드릴게요!”
“후후, 유모님이 볼 테니까 촬영 열심히 해야겠네?”
“그러게요. 정말 열심히 해야겠어요.”
“TV에 사장님께서 나오신다는 거죠?”
“네.”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아보는데 TV만큼 도움이 되는 게 없는 법이다.
실 유모님이 TV에 관심을 갖자 정화씨와 칸나가 기회라는 듯 드라마를 소개시켜주었다.
‘드라마…. 완전 치트키인데?’
정화씨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실 유모님도 금방 우리나라 문화에 녹아들 것이다.
“그럼 저희가 뭐 도와드릴 건 없는 거에요?”
“아니,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제작비가 좀 빡빡할 것 같아.”
“엥? 제작비에 제한을 뒀어요?”
“예능이라서 그런 장치가 있어야 한데. 다행인 건 지인들한테 빌리는 것까지는 터치를 안 할 거라는 거지.”
“그럼…?”
“주아 누나랑 민영 누나한테 부탁하는 건 촬영을 할 거고, 나머지는 우리 메이드들 도움을 좀 받을까 하거든.”
“제 걸로!!! 제 걸로 하세요!! 저 명품 엄청 많아요!!!!!”
칸나의 눈에 오로라가 빠진 듯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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