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07화 (507/849)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더 그런 걸 수도 있을 거다.

“요즘 의지박약한 애들이 어디 한 둘이야? 형은 두 다리 못 뻗고 자고 있지만, 걔는 속이 시원해서 두 발 뻗고 코 골면서 자고 있을 걸?”

실제로 그러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하루 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식단 관리를 하고, 운동을 하는 등의 생활을 하다가 아무도 간섭없는 삶을 살아가니 얼마나 좋겠는가?

주아 누나도 그땐 살짝 살이 졌었다.

관리 하다가 관리 하지 않을 때 누리는 자유와 방종은 꽤나 달콤할 것이다.

“하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

“하여튼 이 형은 마음이 너무 약해.”

“덩치는 호랑이도 때려 잡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야아!”

“경태 형 말 들어보니까 심사도 쉽게 볼 게 아니네. 그럼 어떡해? 이거 거절해?”

“우리가 거절했다는 말 듣고 애들이 울면 어떡해?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아….”

리멤버 애들을 보면 마음이 좋지가 않다.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마땅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게 되어 더 그랬다.

이거라도 받아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멤버들이 다시 의견을 모아보기 시작했다.

“어려울 거 없잖아요. 작곡하는 제키 형이 있고, 프로듀싱 할 수 있는 해솔이 형도 있고, 심사 해본 적 있는 경태 형도 있는데. 너무 몸 사리는 거 아니에요? 도와주겠다고 애들한테 떵떵거려놓고선. 우리가 아예 손해를 안 보려고 하잖아요. 원래 도와주는 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막내 왜 이렇게 똑똑해졌어?”

멤버들이 막내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맞는 소리로 팩트 폭행을 해서 그렇다.

“근제 나랑 강준만 쏙 뺐네?”

남은규의 지적에 우연이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말했다.

“어…준이 형은 표정 연기 쪽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고…은규 형은…춤?”

“걔들 춤 잘 추잖아.”

“어….”

“네 무능함을 스스로 탓해야지, 왜 우연이한테 뭐라고 해?”

강준이 씨익 웃으면서 말하니 남은규가 발끈해서 둘이 투닥이기 시작했다.

“너도 할 일 없어서 우연이가 억지로 표정 연기 가르치라고 한 거잖아!”

나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준이와 은규에게 경고의 눈빛 한 번 보내주고 입을 열었다.

놀자고 모인 상황이 아니기에 분위기를 흐리는 일은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우연이 말처럼 찬성하는 쪽이야.”

내 말에 멤버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몰렸다.

“해솔이 너도 찬성이라고?”

“저 형이 말하니까 다들 집중하는 거봐. 에효. 막내 취급 너무하잖아.”

“너랑 해솔이가 같냐?”

“잡음 그만! 계속 말해봐.”

아무래도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내 의견을 듣는 편이었던 지라 멤버들이 내 의견을 듣는 태도가 시작부터 달랐다.

“애들이 그렇게 된 게 애들 문제만이 아닐 것 같다고 이미 예상을 했었잖아. 그리고 실제로 전담팀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확인이 됐고.”

“그렇지.”

“지금은 명예직만 수행하고 계시지만, 회사에 지분을 제일 많이 갖고 계신 사장님 친척이라 명분 없이는 함부로 자를 수도 없을 거고.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결국 말단 직원들만 잘려나가게 될 거야. 우리가 도우면 은혜를 입힐 수 있고, 외면하면 내부에 적을 만드는 꼴인 거지.”

괜히 나섰다가 일만 만든 꼴.

어차피 시작한 일이라면 깔끔하게 책임을 지는 게 맞다.

“이미 시작한 일인데 어중간하게 발 떼지 말자. 무슨 일이든 화끈하게! 할 땐 제대로! 그게 우리 모토 아니었어?”

“기왕 도와주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거지?”

“그렇지.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우리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프로듀싱한 후배님들이 잘 나가면 그 명예가 모두 우리에게 향하게 될 것이다.

원래

“대신 우리가 잘 해야 돼. 근데 나는 우리 실력을 믿거든. 실패의 원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였는지 확인까지 된 상태야. 이 정도라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니라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인 거잖아.”

실패의 원인이 낯가림 하나만 말하기에 찜찜했던 우리들은 전담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태다.

실패의 원인은 우리가 이 계획을 받아들이면 사라지게 된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실패 원인을 자연스럽게 제거함과 동시에 우리 실력을 좀 더 대중들한테 어필할 수 있겠네.”

“지금까지 아이돌이 프로듀싱으로 잘 나갔던 적이 없잖아. 이번 일은 우리한테 아티스트 이미지를 만들어줄 거야.”

알음알음 관계자들만 알던 것을 대중들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상승은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

이번 계획을 계기로 우리에게 정말 프로듀싱 부탁을 해오는 곳이 있을 수도 있다.

후배들을 조금 도와주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얘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반대를 못하겠어. 듣다 보면 홀려버리거든.”

“여태까지 결과가 다 좋았어서 더 그런 거야. 나도 마찬가지거든.”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멤버들이나 반대표를 이미 던졌던 경태 형까지도 내 말에 넘어간 눈치였다.

“하자.”

“그래! 나도 찬성할게. 애들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잘 하는데 못 할 거 없지.”

“다들 찬성하는 거야? 반대하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난 안 하는 게 맞다고 봐서.”

“반대하는 사람 없어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애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의 찬성을 받아낸 나는 본격적으로 어떻게 도울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몇 가지 결정해야 되는 게 있어.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울지 아니면 그쪽에서 마련해준 타협안으로 도와줄지.”

“기왕 도울 거 화끈하게 도우려는 거 아니었어? 시작할 거면 전부 다 손대야지. 남이 해준 걸 보고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제키가 가장 먼저 의견을 말해왔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우리는 앨범에 모두 손을 대서 제작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남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걸 안다.

“그럼 전부 손대는 걸로 하자. 그리고 제키랑 나는 괜찮은 곡이 있는지 확인해볼게. 우연이 너 스케줄이 어떻게 돼?”

나는 일단 애들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알아야 애들에게 뭘 할지 정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화보 촬영이랑 예능 촬영 있는데 크게 바쁘진 않아요.”

“그럼 여기서 네가 애들이랑 제일 친하니까 상의해서 어떤 컨셉을 하고 싶은지 알아와줘.”

“오~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아직 신인일 때부터 앨범에 자신들의 의견이 들어갈 수 있는 건 굉장한 특혜였다.

“경태 형도 지금 스케줄 때문에 바쁠 테니까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고 와. 스케줄 다 끝나면 할 일 말해줄게. 준이도 스케줄이 많이 바쁜가?”

준이는 연기 쪽으로 촬영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스케줄을 확신할 수 없었다.

“조금 바쁘긴 한데…. 아예 시간을 못 낼 정도는 아니야.”

“그럼 간간히 시간 날 때 애들한테 무대에서 지을 표정 연기 좀 조언해줘. 연습 때 보니까 그 부분이 살짝 부족한 것 같더라.”

“응.”

“그리고 은규는 스케줄 어때?”

“나 해외 스케줄이 좀 있어서 나갔다 와야 해.”

남은규는 솔직히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남은규가 개인 활동을 시작하니 해외에서 유난히 러브콜이 많이 왔었다.

저번에 들어본 바에 따르면 어떤 나라 유명 가수랑 콜라보 곡을 하나 낸다고 했었다.

그건 잘 녹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럼 너도 그 스케줄 뛰고 와.”

“나는 뭐 시킬 건데?”

“너는 넉살이 좋아서 낯선 사람들이랑도 잘 친해지잖아. 애들한테 그런 것 좀 가르쳐봐. 네가 제일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와~ 그걸 나 혼자 하라고?”

은규도 그 부분이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기겁을 한다.

“우연이랑 같이 해봐.”

우연이를 붙여주면 둘이서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태 형한테도 가끔 도와달라고 해. 특히 아직 애들이 어려서 그런지 사회생활 하는 게 많이 서툰 것 같더라.”

애들의 사회 생활 하는 법.

이 부분은 전담팀과 연결해서 제대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본다.

“여태까지 문제가 되지 않던 낯가림이 정말 뜬금없이 문제가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거 아니었어?”

남은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인다.

“에휴, 가르칠 애가 이런 상태인데 괜찮은 거 맞아?”

“우리가 신인 때 받았던 대우는 벌써 잊어버린 거야?”

다른 그룹에 비하면 심하지 않았고, 내가 사전에 막은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애들 머릿속에 벌써 잊힌 모양이다.

내가 언급을 하니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아! 하고 소리를 친다.

“그래, 얘들이라고 그런 대우를 안 받았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자꾸 위축 되고 낯가림이 심해진 거라고.”

“와~ 이걸 몰랐네.”

“멍청아, 여기서 그거 모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너는 알았다고?”

“당연하지.”

“와~ 이걸 진짜 나만 몰랐나 보네. 어쩐지 형이 걔네들을 계속 칭찬하더라!!”

“자존감이 낮아져 있어서 원래대로 복귀시키려고 열심히 칭찬해줬지. 칭찬을 되게 좋아해서 해주는 보람도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실력이 좋기도 했잖아.”

칭찬을 해주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들이 워낙 잘했으니까.

그걸 알기에 이번에도 베팅을 해보자고 한 거였다.

실력이 부족하면 몰라도 실력도 있고, 확실한 컨셉 이미지도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근데 애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까? 문득 우리끼리만 신나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리고 꽤 치명적인 지적이 날아왔다.

‘대충 곡 멜로디도 생각해뒀는데….’

당사자들이 싫다고 하면 우리가 도와줄 이유가 사라진다.

나는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리멤버 애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깨달았다.

♧ ♧ ♧

리멤버(remember)

‘기억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그룹이 되겠다는 포부를 담은 그룹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청난 포부로 지어놓은 그룹명과는 달리 현실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런 리멤버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아직 리멤버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소속사의 태도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리멤버가 잘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직원들의 고초를 잘 알기에 리멤버 애들은 마냥 좌절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요즘에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웠을 존재인 에어플레인 선배님이 리멤버에게 관심을 주며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두 팔을 걷어 부친 상태라는 것까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어떡하냐?”

“뭐 어떻게 해. 열심히 해야지.”

“몸을 갈자 넣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무서워.”

“아이고, 또 울려고 하는 거야?”

막내 아이스는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데, 요즘들어 더 자주 눈물을 보였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가 견디기엔 힘든 일들이기에 멤버들도 울적한 속을 억누르며 막내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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