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어떤 느낌이었어요? 정말 답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어디 부족한 사람인 것 같긴 하더라.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었어. 그리고 별명을 참 잘 지은 것 같더라. 꼰대에 무능력에 욕심 많은 돼지의 조합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이니?”
엄청난 혹평이다.
하지만 사이다 같은 솔직한 발언이기도 했다.
“저 사람을 계속 회사에 둬야 하는 거에요? 갑자기 회사 걱정을 해야 하나 싶네요.”
“사장님 친척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아마 시간이 지나면 계속 승진해서 이사 되고, 지금 대표님이 물러나면 저 인간이 회사를 물려받게 될 수도 있…겠네?”
말을 하면서 깨달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표정이 썩어갔다.
“그거 되게 끔찍한데요.”
“어. 진짜 끔찍하다. 회사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얘들아 우리 너희한테 인생 베팅한 거 알지? 우리 꼭 데리고 나가줘야 한다?”
“그럼요. 근데 사장님은 왜 저런 사람을 회사에 보낸 걸까요? 자식은 없는 거에요?”
왜 친척을 회사에 보냈을까?
연주 누님에게 회사를 흔쾌히 넘긴 사람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였다.
“아…그건 다 이유가 있어.”
사장님에게도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전담팀 누나가 조심스럽게 사정을 말해줬다.
“사장님한테 따님이 한 분 있으셨어. 근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그런 일이….”
이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 전혀 예상 못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물려 줄 자식이 없으신 거지. 지금 대표님한테 선뜻 대표직을 넘긴 이유도 되고. 자식이 있었으면 아무래도 상황이 좀 달라졌겠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장님은 따님이 그렇게 된 이후부터 회사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아. 완전히 흥미를 잃으신 모습이었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
어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 것이다.
“따님이 그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되게 열정저긍로 일하시던 분이었어.”
“제가 봤던 사장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잘 상상이 안 가네요.”
“사장님이랑 지금 대표님이랑 같이 열정적으로 회사를 키웠지. 일에 몰두해서 사느라 따님이 아픈 줄도 모르셨고. 그게 한이 되셨나봐. 이후로는 일에 집중을 못하셨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후회하고 슬펐을까.
“아무튼 사장님이 돌아가시면 친척이 그 재산을 상속 받게 되는데, 트롤러가 바로 그 대상 중 하나인 거지. 우리 사장님이 개인 재산이 참 많으시거든. 아직 사장님이 살아 계신데도 지들끼리 사장님 재산을 두고 어떻게 갈라 먹을지 회의를 한 것 같아. 그리고 회사도 그냥 내버려두기엔 아까우니까 뒤늦게 사장님을 구슬려서 낙하산으로 들어오게 된 거고.”
회사에 관심이 식어버린 사장님은 알아서 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회사 일에 신경을 쓸수록 괴로움은 더 해질 테니 말이다.
‘회사 때문에 내 딸을 방치하다가 죽었다면 오히려 회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어.’
애정한 존재를 증오하게 되면 애증이 되는 법.
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충분했다.
“그럼 대표님은 저 사람을 어떻게 하실 거래요? 뭐 알고 계신 거 없어요?”
이건 내가 직접 연주 누님에게 물어봐도 되는 일이긴 했지만, 연주 누님에게 허니 엔터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기에 조심하자는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물어본 거였다.
“그런 예민한 문제를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말씀하시진 않으시지. 그래도 다들 믿고는 있어. 뭔가 수를 써주실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이런 깊은 얘기는 누구와도 상의를 하지 않았는지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아직까지 연주 누님을 믿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누님이 회사가 망가지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다고 말이다.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네. 진작 말을 해줬으면 같이 상의라도 했을 텐데….’
연주 누님은 도통 남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문제다.
허니 엔터의 일은 나도 영향이 있는 곳이니 충분히 함께 상의해서 일을 해결하려 해도 되는 거 아니었을까?
“직원들도 대표님을 믿고 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잖아. 저 트롤러한테 시달려도 탈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거든. 쟤 트롤짓하는 거 무능력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일부러 저러는 것도 있을 거야.”
연주 누님이 대표로 일할 때 허니 엔터가 삐끗해야 트롤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지 않겠는가?
그런 걸 생각해보면 또 마냥 멍청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대표님이라면 절대 저 새끼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거든? 분명 준비 중이실 거야.”
직원들이 누님에 대한 확실하고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니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연주 누님이 그래도 회사를 허투루 맡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나는 이 소식을 전달해줄 겸, 그 트롤의 일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물어볼 겸 연주 누님이 있을 대표실로 움직였다.
♧ ♧ ♧
“안녕하세요.”
“아…어서오세요.”
“대표…!”
-정말 그게 끝입니까?! 징계를 주지도 않는다고요? 날 무시하는 겁니까, 지금?!
“!!”
조용했어야 할 허니 엔터 대표실에서 시끄럽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낯선 목소리이기도 하고, 꽤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라서 순간 누님이 위협이라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뭐에요?”
“그…손님이 안에 계셔서요.”
“손님인데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 될 정도인데요?”
허니 엔터의 대표인 연주 누님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누굽니까? 사람이 엄청 무례하네요. 목소리도 크고.”
“그…아실지 모르겠지만 리멤버 전담팀 실장님이세요.”
대표실에 좀 드나든 적이 있어서 그런지 비서님이 협조적으로 나와주었다.
순순히 밝힌 상대방의 정체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실장 직급의 사람이 지금 대표님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네요.”
“…그렇죠.”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네. 대표님한테 쫄지도 않고.”
그때, 내 말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뾰족해진 목소리가 울렸다.
-지, 지, 지금 절 혀, 협박하시는 겁니까?!
간덩이가 크다 싶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연주 누님의 포스에 기가 눌린 것 같았다.
이미 쫄았는데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를 이렇게 무시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까? 아무리 당신이 이 회사 대표라고 해도 고모님이 주식을 훨씬 많이 갖고 계신다고요!
전담팀 누나한테는 보자마자 반말부터 박았다던데, 그래도 연주 누님에게까지 같은 짓을 하진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지금 상황에 괜히 대표실로 들어가서 문제를 만들기보단 지켜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누님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뭐, 뭐요? 아니! 잠깐! 고모님은 왜…!
트롤러로 예상 되는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다급해진다.
기세가 많이 죽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상황.
걱정이 가득하던 비서님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진다.
어느덧 내 청각이 좋지 않았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변했을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살집이 좀 있는 여성이 씩씩대면서 분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대표실을 나섰다.
누님의 비서가 황급히 일어나봤으나 그 여자는 비서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음….”
“저 사람이구나. 요즘 회사를 떠들썩거리게 만든 장본인.”
“상황이 별로인 것 같은데 나중에 오시는 건 어떨까요?”
“아뇨. 괜찮을 거에요.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비서님이 내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었는지 순순히 대표실로 들어갔다.
비서님이 계실 때는 나도 절차에 따르면서 방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서님이 곧장 바깥으로 나와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주었다.
“대표님.”
대표실 안에 들어가니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연주 누님이 보인다.
꼴에 손님이라고 차도 마시고 갔는지 비서님이 찻잔을 수거하고 차를 내왔다.
“곧 점심시간이네. 좀 일찍이지만, 밥 먹고 와요.”
“네, 대표님.”
연주 누님이 비서님에게 다소 일찍 점심시간을 가지라며 내보냈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은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방금 왔던 사람이 요즘 회사를 떠들썩거리게 만드는 그 사람이라면서요?”
“그걸 너까지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워낙 화려하게 해대고 있어서 소문이 안 들릴 수가 없더라고요. 근데 사람이 굉장히 무례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누님이 대표인데.”
“무례한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지. 나는 괜찮다. 특별할 것도 없어.”
“사장님 친척이라고 들었어요. 많이 곤란하신 거에요?”
“곧 그분을 뵈러 갈 생각이야.”
“아~ 그럼 그때 결론이 나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그때까지 회사가 좀 소란스러워도 참아줬으면 하는데 괜찮겠니?”
“물론이죠. 그리고 제가 저 사람 때문에 곤란해질 일은 없죠. 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원들만 힘든 거죠.”
내가 예상한 대로 연주 누님에게 트롤러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대상으로 보였다.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는 존재인 듯 무심하면서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누님에게 물었다.
“혹시 사장님이 갖고 계신 주식을 전부 매입할 생각이세요?”
“날카롭구나.”
“진짜요? 제가 맞췄어요?”
“그래, 저 치가 아직 상속 받지도 못한 주식으로 같잖게 굴기에 믿을 구석을 없앨 생각이다.”
“와~ 대단하다. 우리 누님.”
그렇게 되면 정말 허니 엔터는 누님의 회사가 되는 거다.
이건 나도 찬성할 만한 일이었다.
“근데 그 주식 구매하려면 돈이 많이 들지 않아요?”
현재 허니 엔터는 엄청나게 덩치를 키운 상태다.
우리 그룹이 해외에서 크게 성장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다만 그렇기에 사장님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전부 구매하는 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모두 인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하실 생각이에요?”
“어떻게든 구해봐야지.”
그게 끝입니까, 누님?
“저한테 하실 말 없어요?”
“너한테?”
연주 누님이 잠시 생각하다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리멤버 애들을 돕는 일이 복잡해졌다는 건 방금 들었다. 저 치가 그 프로젝트에 훼방 놓지 않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제가 그걸 듣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잖아요. 저도 돈 많아요.”
“돈? 설마 너한테 돈이라도 빌리라는 거니? 너한테 빌릴 바에야 차라리 관이한테 빌리는 게 낫지.”
조직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 처제.
그녀와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가끔 만날 때마다 화끈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는 하다.
내 여자인 것은 맞지만 내 가족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문제가 되는 건 처제가 조직을 이끄는 조폭 보스라는 것.
“저보다 처제한테 빌리는 게 낫다고요? 정말 그쪽 자금을 쓰실 거에요?”
처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녀가 쓰는 자금은 조직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일명 검은 돈.
지금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검은 돈이 엔터계에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돈이 찝찝하다는 게 아니라 투자를 핑계로 그들이 회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찜찜한 거다.
물론 처제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지만….
“그런 돈 싫어하시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가출한 거 아닌가.
“못할 건 없지. 그 아이한테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리 없으니까.”
처제는 항상 누님을 깍듯하게 생각하는 편이니 정말 누님이 부탁할 생각이 있다면 냉큼 알겠다고 할 사람이기는 하다.
문제는 누님이 처제한테 진짜 돈을 빌릴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누님이 처제한테 돈을 빌릴 사람이에요? 서로 다 아는 건데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회사 주가 총액이 1조가 넘어가는데 그걸 누님 혼자 어떻게 해결하시려고요. 그냥 저한테 빌리세요.”
“구매해야 하는 지분이 31%야. 금액으로만 봐도 사천 억에 가까운 금액이고. 네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진 않아.”
누님이 갖고 있는 지분은 20%라고 알고 있다.
사장님이 31%를 갖고 있으니 누님과 합쳐서 51%의 주식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사장님의 지분인 31%를 인수한다면 누님은 51%를 갖게 되며 회사를 지배할 수 있다.
현금으로 4천억이 넘어가는 금액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다.
솔직히 나도 천 억대의 돈은 감히 상상도 못할 수준의 금액이 맞았다.
내가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다 해도 이백 억대 이상을 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멜리사가 투자를 잘 해주고 있긴 한데, 그 돈이 당장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었다.
“가족 뒀다가 뭐에 써요. 물론 처제도 가족이지만, 돈 문제는 돈 많은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어떨까요?”
쓰기 껄끄러운 돈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내 말에 연주 누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돈 많은 사람?”
“잊으셨어요? 우리 집 메이드들이 전부 재벌 딸들이라는 걸요.”
우리 집에는 치트키 수준의 괴물들이 메이드복을 입고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