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귀하지 않게 태어난 이가 없다는 건 알지만, 재벌 출신은 아무래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특별한 집안의 피를 타고 난 재벌 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집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허드렛일을 진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메이드 컨셉은 즐기는 편이었다.
어쩌면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보다 더 말이다.
처음에 내가 그녀들을 메이드 그룹으로 묶어버린 이유는 얼떨결에 모아놓고 보니 재벌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과 동시에 비앙카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얕보이면 잡아먹어 버리는 성격.’
언제든 내 머리 끝에 오르려고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이들을 내 여자들과 같은 위치에 뒀다가 큰일이 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메이드라는 위치로 만든 거였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안전장치랄까?
이런 내 의도와 달리 본인들은 메이드라는 위치를 꽤나 야하게 이용해 먹고 있었다.
이처럼 앙큼한 메이드 비앙카와 멜리사를 불렀고, 그녀들은 흔쾌히 내 부름에 응했다.
난 그녀들을 데려다놓고 상황 설명을 했다.
연주 누님이 허니 엔터 주식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허니 엔터 주식을 그만큼이나 확보할 수 있는 기회라면 얼마든지 빌려드려야죠.”
멜리사는 단번에 모든 금액을 융통해주겠다며 통 큰 결정을 했다.
비앙카는 그녀답게 욕심을 드러냈다.
“차라리 저희 쪽에서 어느 정도 인수하는 건 안 될까요? 돈도 물론 빌려드릴 건데, 굳이 부채를 과하게 짊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인수하게 되면 무조건적인 우호 세력이 되어 드릴게요. 허니 엔터는 투자하기 매우 긍정적인 회사에요. 기회가 될 때 꼭 잡고 싶네요.”
“일단 둘 다 긍정적이라는 거지?”
“물론이죠.”
“네, 주인님. 저희 재산이 주인님 거잖아요. 굳이 이렇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사용하셔도 괜찮아요.”
비앙카의 노련한 아부에 멜리사가 욱했는지 말했다.
“앞으로 주인님이 맡기신 금액의 투자를 좀 더 공격적으로 할게요. 주인님께서 위험하게 불리지 말라고 하셔서 그동안은 자재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이런 일에 불편함을 겪으시지 않아도 될 정도는 벌어둬야겠어요.”
멜리사가 내 투자금을 꾸준하게 손해 없이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다.
돈을 맡기기만 해도 알아서 조금씩 이익을 봐주고 있는데 멜리사한테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이런 일로 자신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본인 탓이라도 되는 것 마냥 분해했다.
“이번 일이 예정에 없던 일이라 그렇지 내가 평소에 돈 쓸 일이 어딨어.”
허니 엔터를 인수하는데 들어가는 돈.
웬만하면 연주 누님이 온전히 그 지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보다 허니 엔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니 말이다.
연주 누님이 회사를 계속 맡는다면 회사가 레이블 지분을 가져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제가 사모님이랑 따로 연락해서 해결할게요.”
“욕심 많은 언니한테 맡겼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아? 주인님, 저한테 맡겨주세요.”
두 사람이 오랜만에 한 판 붙으려는 것인지 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누님한테 물어보는 게 먼저니까 다들 나서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연주 누님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선택지를 선택할지에 따라 나설 사람이 달라질 것이다.
그녀들이 내 설명을 듣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멜리사야 언니한테 당한 게 있으니 저런 태도가 이해가 가는데, 비앙카는 왜 동생을 놀리지 못해 안달을 내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도 멜리사가 경쟁심을 보이자 재밌다는 듯 빙긋 웃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선뜻 빌려주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그녀들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멜리사와 비앙카는 무엇이든 선뜻 나서서 도움을 주곤 했다.
아무래도 당연하다는 듯이 누려왔던 일인지라 감사 인사를 인색하게 한 것이 마음에 남았다.
“주인님….”
멜리사는 내 감사 인사에 감동을 받은 눈치였고, 비앙카는 새초롬하게 나를 바라봤다.
“저희가 주인님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인 걸요.”
“그래, 둘 다 고마워.”
이번 일도 비앙카와 멜리사가 없었다면 많이 곤란했을 것이다.
특히 연주 누님은 무리하게 주식을 구매하느라 그때 말했던 것처럼 처제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처제는 믿어도 그쪽 돈은 못 믿지. 처제가 조직 전체를 다 장악한 것도 아니고.’
연주 누님에겐 허니 엔터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아예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허나 한편으로는 조폭의 검은 돈이 엔터에 흘러들어와 있다는 점이 불편해서 어떻게든 빨리 갚으려고 했을 거다.
능력 있는 사람이니 빌린 돈을 갚을 능력이 있었겠으나, 그러기 위해 연주 누님이 얼마나 무리해야 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건강은 한 번 잃으면 되돌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누님을 도울 수 있는 지인이 주변에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초반에는 내 골치를 썩게 했던 메이드들이 이젠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흡족했다.
나는 곧장 비앙카와 멜리사에게 받은 답변을 연주 누님에게 전달했다.
연주 누님은 일단 알겠다며 사장님과 결판을 내러 가겠다고 했다.
비앙카든 멜리사든, 두 사람에게 돈을 빌리려면 사장님이 주식을 팔겠다고 말을 해야 가능한 거였다.
♧ ♧ ♧
“주름이 많아졌지? 일을 쉬니까 부쩍 늙었어.”
“언니는 좀 더 현역에서 뛰어도 됐을 거야. 너무 일찍 은퇴했어.”
회사에서는 서로 존댓말을 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사실 두 사람은 사적인 자리에서 말을 놓고 편하게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다.
어쩌면 평생 같은 목표로 회사를 운영해 온 동업자이니 친척들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 친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때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한 거야. 나는 젊었을 때 갖고 있던 모든 감정이 마모 됐거든.”
“…여전히 애 사진 부여 잡고 지내는 거에요?”
“웃긴 거 얘기해줄까? 나 요즘 절 다닌다.”
“언니가?”
한 평생 무교였던 그녀의 변화에 연주가 허탈한 한숨을 터트렸다.
“웃기지? 근데 이러면 먼저 간 아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안 갈 수가 없더라. 내가 조금이라도 더 베풀고 가야 그 선행이 아이를 편하게 해줄 거라고 본 거야.”
“봉사 활동 다니는 거야?”
“응. 요즘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우리 애를 위한 일 뿐이야. 회사는 미안하지만 네가 잘 좀 운영해줘. 너한테는 정말 많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하고 있기는 한 거야? 관심이 사라진 게 아니라 회사를 원망하게 된 건 아니고?”
“…너는 참 말을 아프게 한다. 예전이고 지금이고.”
“언니가 약점이 많아진 거야. 예전이었으면 언니는 내 말에 끄떡도 안 했을 걸.”
“좀 진정하자. 오랜만에 만난 건데 좋은 얘기 나눠야지.”
조연주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언니에게 차마 더 뾰족하게 말을 할 수 없어서 격해진 숨을 가라 앉혔다.
힘들었어도 반짝반짝 빛나던 언니의 눈동자를 기억하기에 완전히 죽어버린 눈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답답해졌다.
“언니한테 돌아와 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아.”
“…….”
“그래서 오늘 좀 많이 아픈 얘기를 하러 왔어.”
“네 표정 보니까 오늘 단단히 화낼 생각인가 보네. 혼날 각오 해야겠구나.”
“아파도 그냥 참고 들어. 나도 언니만큼 아프면 아팠지, 덜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래. 말해.”
“회사에 대한 어줍지도 않은 미련들 전부 버려 줘. 계속 붙잡고 있으면 언니만 힘들어져.”
“이미 자리도 너한테 넘기고 나왔는데 미련은 무슨 미련. 나 그런 거 없어.”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눈이 다 죽었어도 여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구나 싶다.
“언니,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끼리 뻔한 걸로 말씨름 그만하자. 언니가 회사에 대한 미련이 없었으면 조카를 보냈을 리가 없잖아.”
“…너무 아픈데.”
죽은 딸아이에게 미안해서 회사 일을 더 이상 할 수는 없겠는데, 그렇다고 회사에 대한 미련이 전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못 이기는 척, 조카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 척 한 거다.
“그만 미련 버려. 미련을 못 버리겠으면 다시 복귀하던지. 언니는 오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선택해야 해.”
“왜 이렇게 잔인하니?”
“나는 지금도 언니가 마음을 바꿔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면 바로 대표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어.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언니만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언니는 내가 언니한테 한 행동만 생각하고, 언니가 나한테 한 행동은 생각 안 하는 거야?”
“…….”
“그만하자. 빛나지 못할망정 추해지지는 말아야지.”
진심을 담은 호소였고, 젊을 적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해온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였던 존재는 아픈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미련을 털어냈다.
“언니 주식은 내가 전부 구매할게.”
“이 많은 주식을 네가 전부?”
“나 그 정도 능력은 있어. 회사에 나쁜 영향 갈까봐 그동안 주식은 잘 팔지도 못했잖아.”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 찾아 온 아이들을 시궁창에 쳐박지는 말아야 한다며 돈이 부족할 때도 꾸역꾸역 주식을 쥐고 놓지 않았던 그녀이다.
“이제 정말 편히 쉬어, 언니. 그걸 그 아이도 바랄 거야. 언니가 바라는 대로 이 돈으로 착한 일도 많이 하면서 덕 쌓아. 언니가 그러지 않아도 수애가 워낙 착해서 이미 좋은 곳으로 갔겠지만, 나중에…아주 나중에 언니가 그 옆에 오면 수애가 좋아하겠지.”
아이의 얘기가 나와서일까?
애증이 되어버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언니의 눈빛이 맑아지고 울음기가 섞인다.
“회사 걱정도 하지 말고, 내 걱정도 하지 마. 나 잘 살고 있어. 사실 숨겨둔 남자도 있고, 애도 있거든.”
“뭐어?!”
이건 좀 많이 놀랄 소식이었는지 눈물이 쏙 들어간 듯 언니의 표정이 굳는다.
조연주는 대형 폭탄을 던져놓고도 그런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이제 회사도 내 거가 될 테니, 신난 일만 남았네.”
“누구야? 아니, 애까지 있다고? 어떻게? 내가 아무리 정신 놓고 살았다고 해도 그걸 몰랐다고? 임신을 언제 한 거야? 남자는 어떤 사람이야? 지금도 만나는 거 맞아? 결혼은?”
“뭐 이렇게 질문이 많아. 그냥 잘 살고 있다고만 알고 있어.”
가족의 일로 상처를 받은 사람 앞에서 남편 자랑, 자식 자랑을 할 순 없었기에 조연주는 덤덤하게 알려만 주고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기어코 아이와 남편을 소개시켜주지 않으면 주식을 넘기지 않겠다는 똥고집을 피운 것이다.
한 고집 하는 조연주와 그런 조연주의 언니로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 온 사람과의 대립.
“늙고 병든 언니가 마지막 소원으로 비는 건데 안 들어줄 거니?”
하지만 이 말에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한 조연주가 백기를 들었다.
‘현오 때문에라도 해솔이 존재를 숨길 순 없겠지. 언니한테 거짓말 하는 것도 안 될 일이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가족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섣부른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해솔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주식 거래를 하기 위해 현오와 그를 데리고 언니의 집에 방문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