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다.
나를 부른 이유는 내가 연주 누님과 아이까지 낳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란다.
“누님….”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뭐라 할 순 없는데, 많이 당황스럽기는 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언니한테 소개를 한 번쯤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야.”
“소개 받아야 하는 분이 사장님이라는 게 좀 당황한 거에요. 누님이 가족처럼 여기시는 분인데 당연히 소개 받아야죠.”
“언니가 좀 짓궂게 굴 거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사장님이 저한테 장난을요? 상상이 안 되는데.”
내가 사장님을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을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사장님은 누군가에게 장난을 칠만큼 편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주 누님과 오랫동안 붙어 있으셔서 그런지 다소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겼던 것이다.
“은퇴하고 쉬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더라.”
“그래요?”
“그리고 회사에서야 체면을 지켜야 하니까 어느 정도 몸가짐에 주의할 수밖에 없지. 지금은 사적인 자리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거다.”
“어째 누님한테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걱정만 늘어나고 있어요.”
사장님이 평범한 사람처럼 나한테 말을 건다고?
“너는 곤란하지 않을 정도의 질문에만 대답해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하마. 뭐든 다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현오 잘 챙기고.”
“넵.”
사장님을 뵈러 갈 때 데려갈 사람은 우리 둘만이 아니었다.
현오도 데려오라고 했다더라고.
‘현오가 있으면 내 부담이 훨씬 덜하긴 하지. 사람들 관심이 자연스레 애한테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사장님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되고 며칠 후.
꼬마 정장을 입은 현오와 연주 누님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이 함께 사장님 집으로 이동했다.
“현오야, 인사 잘 하고 아빠 옆에 꼭 붙어 있어. 알았지?”
“아빠! 꺽정하디마! 내가 아라서 하께!”
요즘 부쩍 독립심이 늘은 현오의 앙큼한 대답.
말도 많이 늘었다.
혀가 오동통하니 짧아서 그런지 발음은 영 시원찮았지만 말이다.
적어도 알아듣는 말을 한다는 점에서 애가 좀 더 사람(?)다워진 상태였다.
“현오, 지금 어디에 온 건지 알아?”
“알아.”
“여기가 어딘데?”
“집이야.”
“우리 현오 똑똑하네. 그치. 집이지.”
그냥 집도 아니고 으리으리한 저택이다.
“현오, 오늘 엄마 가족을 소개 받게 될 거야.”
“이모?”
“아니, 관이 이모 말고.”
엄마 가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최관일 수밖에 없긴 하다.
외할머니보다 많이 보고 친해진 사람이 최관 이모이니 말이다.
자기 아들처럼 현오를 챙기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근데 현오가 사장님을 뭐라고 불러야 해요? 호칭이 좀 복잡할 것 같은데.”
“…현오가 언니를 부르는 호칭이라.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사장님을 할머니!?
그 정도 나이대이긴 하시다만, 이미지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보다는 이모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양심이 있지. 그 나이에 현오한테 이모라고 불리는 게 말이 돼? 관이가 서운해 할 거다. 차라리 이모보다는 할머니를 더 좋아할 거야.”
누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현오에게 지금 만날 사람을 ‘할머니’라고 부르라고 가르쳤다.
“할모니 만나러 와썽?”
현오가 순진하게도 외할머니를 떠올렸는지 눈이 댕그래진다.
외할머니를 좋아하는 현오이니 금방 얼굴이 기대감으로 가득해진다.
“외할머니 말고 그냥 할머니 만나러 온 거야.”
“할모니 아냐?”
“응. 근데 현오를 많이 예뻐해줄 분이니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지?”
“응. 할모니가 현오 예뻐해.”
할머니가 날 예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듯 거들먹거린다.
꼬맹이 주제에.
지가 귀여운 건 알아가지고.
“그래그래. 이쁨 받으면서 아빠 좀 지켜줘.”
사장님의 관심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응! 내가 지켜주께. 꺽정 하지 마.”
“진짜? 현오가 아빠 지켜줄 거야?”
“웅.”
엄마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배짱을 갖고 있더니, 커갈수록 용감함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처제가 이런 현오의 성격을 유난히 좋아했다.
내가 생각해도 얘는 범상치가 않긴 하더라.
막 엄청 장난꾸러기인 것도 아닌데 애들이랑 몰려다니면 항상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애들이 현오를 유난히 잘 따르기도 하고 말이다.
‘평범해도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텐데….’
하필 현오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 장모님이 현오를 볼 때마다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모른다.
얘는 내 후계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는데 누님이 그걸 막았다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얘는 장모님 후계자가 됐어도 잘 하긴 했을 것 같다.
‘이런 생각 했다는 걸 누님한테 들키면 엄청 꼬집히겠지. 그나저나 집이 엄청 으리으리하네. 돈을 많이 벌긴 하셨나봐.’
우리의 성공도 성공이지만, 앞서서 선배님들이 꾸준히 성공해서 회사에 두둑한 캐시카우가 되어 준 걸로 안다.
그러니 이 정도 재력을 갖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 넓은 집에 혼자 지내시는 거에요?”
우리 집도 엇비슷한 크기이긴 한데, 지내는 사람이 많아서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님 집은 보자마자 혼자서 지내기엔 너무 넓지 않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뿐만 아니라 잘 관리 되지 않은 정원과 담벼락 이곳저곳에 넝쿨이 자라나고 있었다.
“집안 돌보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이 정도도 사용인을 고용해서 유지하는 걸 거다.”
바깥일 하는 사람이니 집에 무관심 한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외로우시겠어요.”
“마음에 가뭄이 들었으니 뭔들 부족하지 않겠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사람이야.”
아무래도 오늘 현오가 해야 할 일이 막중한 것 같다.
우리 중에 사장님에게 배짱 좋게 애교를 부릴 수 있는 건 현오 뿐이었다.
누님은 주식 거래를 위해 온 자리인지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내는 게 불가능했고, 나는 연주 누님의 가족 같은 언니를 소개 받는 자리인지라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현오야. 너 오늘 할머니 만나면 애교 좀 많이 부려. 알겠지?”
“현오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예뻐할 거다. 애가 그런 말을 알아 들을 리도 없고.”
“에이, 얘가 얼마나 똑똑한대요? 다 알아들어요. 이런 거 시키면 잘 하기도 하고. 자기가 예쁜 걸 알거든요. 그렇지, 현오야?”
“응! 할 수 이써. 내가 하께. 현오 애교 백만 애교!”
백만불짜리 애교라는 말을 어설프게 알았는지 백만 애교라고 한다.
그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긴장도 좀 풀린 것 같았다.
귀엽도 똑똑한 현오의 귀여움에 참지 못하고 녀석을 번쩍 들어올려 통통한 볼따구에 입술을 냅다 찍어버렸다.
쪽쪽쪽쪽쪽!
“끄응!”
“여휴~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귀여운 거야?”
“조연주 아들!”
조건반사처럼 현오가 냅다 외친다.
근데 듣는 아빠 서운하게 엄마 이름만 외친다.
연주 누님이나 나나 현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인데 왜 엄마 아들이라고 할까?
“뭐야, 그럼 아빠는? 현오 아빠 아들 아니야?”
“어…그럼 아빠 아들도 해주까?”
“얘가 이걸로 선심을 쓰네? 인마, 아빠 아들 해주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아빠 아들이지!”
순수한 아기가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할 때마다 내 마음까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 아빠 아들이야?”
마치 몰랐던 일인 것 마냥 연기를 한다.
요 녀석이 벌써부터 연기에 재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게 고슴도치 자식 사랑인 걸까?
“그렇지. 엄마 아들이고, 아빠 아들이기도 하고.”
“그래! 그럼 나 다 하께.”
“고오맙다.”
현오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 팔 위에서 엉덩이를 덩실거리며 춤을 춘다.
내 끼를 이어 받았는지 흥도 많았다.
내 팔 위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현오를 둥가둥가 해주며 으리으리한 집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장님이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와요. 어서오렴. 세상에, 예뻐라. 안녕? 네가 현오구나?”
사장님의 관심은 나에서 연주 누님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현오에게 향했다.
“아녕하세여!!”
내가 미리 말을 해둔 게 있어서 그런지 현오의 인사가 유난히 우렁찼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아휴아휴. 엄마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얼굴에 두 사람이 전부 들어가 있어.”
“현오가 좋은 걸 많이 물려 받았어.”
“이쪽으로 앉으렴.”
사장님의 시선이 현오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현오에게 첫 눈에 반한 게 틀림없었다.
요 녀석이 사람 홀리는 걸 잘 한다는 걸 모르지 않은 나였기에 사장님의 행동을 십분 공감하고 있었다.
“할모니는 누구에여?”
그때 현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얘 정말 네가 낳은 애 맞니? 얼굴은 닮았는데 성격은 전혀 아닌 것 같아.”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애 맞아, 언니.”
“근데 이렇게 귀엽다고? 네가 낳은 아이는 너랑 똑같을 것 같았는데….”
“애 아빠가 있잖아.”
저요?
사장님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면서 몸에 힘이 꽉 들어간다.
그리고 이내 사장님이 나에게 말하셨다.
“자네가 큰일을 했군.”
“…감사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좀 당황스럽긴 한데, 현오를 칭찬하는 말이었기에 덤덤한 척 받아들였다.
“내가 직접 만든 요리는 아니지만 맛있게 먹게. 현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여러 가지 준비해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반찬 투정 안 해여! 누나는 시러시러 하는데 나는 안 그러거든여.”
현오가 반찬 투정 안 한다며 자기 자랑을 했다.
‘피망 당근 오이 안 먹는 것도 반찬 투정인데?’
허나 지현이보단 반찬 투정을 덜한다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냥 현오가 자랑하는 걸 내버려두기로 했다.
마성의 매력으로 사장님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여버린 현오는 사장님의 총애를 받으며 식사시간 내내 예쁨을 받았다.
사장님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아이 밥그릇에 반찬을 놔주며 본인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언니, 밥 먹어요. 애 혼자 밥 먹게 두고.”
“나는 이미 많이 먹었잖아. 요 조그마한 애기가 크겠다고 열심히 먹고 있는데 밥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갱차나여! 현오 혼자서 먹는데?”
현오는 자기가 얼마나 밥을 혼자서 잘 먹는지 자랑하겠다며 야무지게 숟가락을 놀렸다.
사장님이 준비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기용 숟가락 젓가락이 준비 되어 있어서 현오의 손노림은 더욱 현란했다.
“바바여.”
“그러네~ 정말 잘 하는구나.”
사장님의 눈빛이 촉촉해진다.
그걸 누님이 눈치 챘는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울면 다신 현오 안 데려올 거야.”
“…안 울어. 이 매정한 것아.”
“현오 보러 자주 놀러 올게.”
“사실 고아원이 가본 적이 있어. 봉사활동 때문에 방문한 거긴 하지만 다른 이유가 아예 없었다곤 못할 것 같아. 근데 그땐 아이들을 봐도 이런 느낌이 안 들었거든.”
죽은 딸이 그리워서 입양을 생각해본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이들을 봐도 딸아이처럼 마음에 와 닿은 아이는 없었단다.
“네가 낳은 아이라서 그런 걸까?”
“그냥 우리 현오가 매력적이라서 그런 거야. 우리 현오한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언니 한 명만 있는 게 아니거든.”
현오의 업적은 꽤 대단하다.
조폭 보스인 외할머니를 단숨에 꼬셨(?)고, 현직 조폭 보스인 최관이 현오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대장 노릇을 하는 현오인지라 많은 또래 아이들에게도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래, 충분히 그럴 만해. 현오는 지금도, 앞으로도 많이 사랑 받을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