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정 감독.
그녀 특유의 다크한 분위기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전개.
잔인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감독.
문제적인 작품을 만들어서 작품이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 만큼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감독.
그녀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은 배우들이 넘쳐나고,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는 그녀라고 해서 삶이 편하고 쉬운 건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상을 받고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언제나 불쑥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접어?”
“접죠. 어쩔 수 없습니다. 주연 배우가 안 구해지는데 어떡해요? CG로 만들어서 찍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너무 현실 가능성 없는 작품이었어요.”
“영화가 원래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세계야. 이 정도를 왜 못해?”
“남자가 액션이라니요. 남자 배우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걸 해요? 어떻게든 배우를 섭외했다고 해도 스턴트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 덩치 좋은 여자를 써도 남자랑 여자 신체 차이가 있는데 그걸 다 CG로 하실 겁니까?”
“못할 게 뭐가 있는데? 너 상남자가 뭔지 아냐?”
“상남자…요?”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상남자라는 게 인기를 끌고 있어. 일명 맨크러쉬! 남자의 액션을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거야. 나약하고 지킴 받는 남자는 지겹다는 거지.”
“그래서 도저히 포기 못할 것 같으세요?”
“응. 난 포기 못해. 이 작품. 꼭 제작해야겠다.”
조감독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각본이 잘 뽑히기는 했다.
이대로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쉬운 길은 존재한다.
이 각본을 버리지 않으면서 빠르게 크랭크인 준비를 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주인공의 성별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연화정 감독 특유의 고집이 발동했다.
그 고집이 연화정 감독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들었지만, 그 고집이 발동할 때마다 고생해야 하는 조감독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보여주는 맨크러쉬 액션이라니.
‘이게 정말 성공해버리면 어쩌지?’
성공할 것 같아서 무서운 건 왜일까?
“좀 더 폭 넓게 고려해보겠습니다. 배우가 아닌 사람이라도요.”
“그래, 연기는 내가 지도해주면 돼. 액션! 이번 영화는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니까 연기는 중요하지 않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저 액션이라는 말에 난색을 표하다가 해보겠다고 해놓고 제대로 된 발차기도 못하는 놈들만 주구장창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
연기를 잘 하면서 액션까지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달았기에 연화정 감독은 연기를 버리고 액션을 취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하, 진해솔이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진해솔이요? 그 친구가 운동 잘 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죠.”
“그래, 그 친구가 예능에 나왔을 때 힘을 꽤 쓰더라고. 그래서 이번 영화 계획 때 1순위로 캐스팅 하려고 했지.”
“아이돌을 1순위요?”
“자네 아이돌 편견 아직도 못 버렸나?”
“편견을 버리고 싶어도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서요.”
“연기 잘 하는 아이돌도 있네. 직업의 편견을 버려.”
“아무렴요. 지금도 그래야 할 판인데 안 버릴 순 없죠. 그 친구한테 다시 한 번 제안 넣어볼까요?”
진해솔이 거절을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구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거절당한 것을 굳이 설득할 필요성까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을 설득해서라도 캐스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천하의 연화정 감독님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군요.”
“아무렴. 내가 뭔데? 제대로 된 주연 배우를 캐스팅 할 수 있다면 못 할 게 없다고. 일단 그쪽 일은 내버려둬 봐. 천천히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으니까.”
“조사를 다시 해볼까요?”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자. 진해솔이 정말 액션을 잘 해낼 수 있을지부터 시작해보자고.”
처음부터 다시.
연화정 감독에게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해야만 했다.
♧ ♧ ♧
“성공!!!! 또 성공!!!!”
“우와아!!!”
2M를 너무 쉽게 성공해버렸다.
나는 서둘러 표정 관리를 하고 멤버들과 기뻐하면서 분위기를 맞췄다.
그리고 다음 도전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듯 완벽하게 실패해버렸다.
멤버들은 무척 아쉬워하면서도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보고 있었다.
2M 높이면 우리들 키보다 더 높지 않은가?
그렇게 높이뛰기가 끝나면서 촬영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1팀 2점! 2팀 0점! 3팀 2점! 2팀은 분발해주셔야겠습니다.”
“우우~~”
“자, 마지막 게임이에요. 집중해주세요!”
마지막 MC를 맡은 것은 나 혼자였다.
우리 팀이 다섯명이라서 한 명이 빠져야 했고, 그동안 유일하게 MC를 보지 않은 게 나였다.
내가 맡아서 해설할 게임은 장애물 이어 달리기.
운동장에 설치 된 각종 장애물들을 넘어서 다음 선수에게 바톤을 넘겨줘야 했다.
그리고 이 게임에는 무려 3점이 걸려 있었다.
결국 앞선 게임을 다 이겨놔도 이어달리기를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사실 친선 경기일 뿐이기에 누가 이겨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승리한 팀에게는 한 명 당 한우세트 하나를 드릴 겁니다. 맛있는 한우를 먹기 위해서는 이번 게임에서 반드시 이기셔야 합니다.”
“와아!!!”
“한우! 한우! 한우!”
한우라는 말에 환호하는 멤버들의 눈빛에 의지가 서린다.
“좋습니다. 의지 가득한 그 눈빛을 좋아요.”
이어달리기는 체육 대회의 마지막 피크.
각 팀끼리 순서를 정해서 이어달리기 준비를 끝냈다.
“장애물 이어 달리기의 장애물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장치들이 설치 되어 있는데요, 일단 첫 번째 관문은 인형탈 입고 달리기입니다. 여기 바닥에 있는 인형탈을 머리에 쓴 채로 달리시면 되는데요. 빠른 진행을 위해 선수들이 몸통은 미리 착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인형 몸통은 혼자서 빠르게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몸통을 착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바닥에 있는 인형탈을 주워 달리기 시작하면 된다.
다만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설치되어 있는 콘을 지그재그로 피해서 왔다갔다 하며 이달려야 했다.
인형 몸통의 뚠뚠함을 고려해보았을 때 꽤 웃긴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서 다음 타자에게 바톤을 넘겨주면 다음 타자는 설치되어 있는 뜀틀을 넘고 볼풀장 안에 뛰어들어서 공 사이를 해쳐 달려야 한다.
볼풀장에서 벗어나면 다음 타자로 바톤이 넘어가고, 세 번째 주자는 장난감 총을 이용해 풍선을 터트려서 총 10점을 얻어야 한다.
풍선은 거리와 위치에 따라 점수가 달라서 빨리 통과하고 싶으면 5점짜리 풍선을 노리면 된다.
10점을 얻고 달리면 바톤을 다음 타자로 넘길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바톤을 넘기 위해서는 줄넘기를 50번 넘어야 했다.
50번의 줄넘기를 해내면 그제야 마지막 주자에게도 바톤이 넘어간다.
마지막 주자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오로지 달리기 실력만으로 결승선에 도착해야 했다.
그렇게 1등을 한 사람이 이번 Honey 배 친선 체육 대회가 끝이 난다.
꽤나 화려한 마지막 피날레였다.
그리고 그 피날레를 응원해주고자 찾아 온 손님이 방금 막 체육관에 들어섰음을 제작진으로부터 전달 받게 됐다.
“아아- 경기에 들어가기 전,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우리 1팀, 2팀, 3팀을 응원하기 위해 바쁜 스케줄을 끝내고 방금 체육관에 도착한 응원단입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와아아!!
“선배님이다!!”
우리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사람들.
다름 아닌 허니 엔터 소속 선배 아이돌들이었다!
지금은 그룹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개인 활동을 통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님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에어플레인과 리멤버 애들 모두가 기립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허니 엔터가 지금의 자리에서 굳건할 수 있는 이유.
바로 이들이 든든하게 회사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체육대회의 마지막이 화끈하게 불 타올랐다.
♧♧♧
어떤 팀이 1등을 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날 촬영을 끝내고 전체 회식으로 한우를 먹으러 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우리들 모두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에 기뻤고, 리멤버 애들이 긴장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으며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장면이 뽑혔음에 흐뭇했다.
첫 촬영이 잘 끝났다는 게 회사에 금방 퍼져나갔다.
잘못 꿴 단추였던 리멤버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허니 엔터에는 이 소식을 듣고 인상을 찌푸린 사람이 한 명 존재했다.
“촬영이 잘 끝났다고?”
“네. 순조롭게 계획대로 진행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할 일이야?”
“…저번에 이 일을 보고 안 해서 뭐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진행 잘 되고 있다고 보고 드린 겁니다.”
직원의 말에 트롤러 아니, 박상주가 거침없이 짜증을 냈다.
“그땐 내가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끌어나가려고 했을 때고. 지금 내가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보고를 받지? 생각이 그렇게 없어?”
“하아~”
직원이 뻔뻔한 박상주의 태도에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에 어처구니가 없다며 박상주가 왈칵 화를 냈다.
“야!”
“악! 깜짝이야.”
“지금 내 앞에서 한숨 쉰 거야? 감히?”
이 자식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야?
직원은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않기로 했다.
누가 먼저 시작을 할지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걸 아무래도 그녀 본인이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어떻게 한숨을 안 쉬나요?”
“뭐? 지금 상사 앞에서 말대꾸 하는 거야?!”
“보고를 하랬다가 이젠 또 하지 말랬다가. 자꾸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시니까 제가 일을 못 하겠잖아요. 제발 일하는 사람 쓸데없는 일로 방해 좀 하지 마세요!”
저질러버렸다!
‘터졌구나!’
‘드디어!’
‘누구지? 누가 이런 기특한 짓을?!’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려왔던 일이 시작 되었으니 당연하다.
‘어우! 속 시원해.’
‘새끼, 고작 저 말 들었다고 저딴 표정을 짓는다고? 내가 더 속을 뒤집어놔야 하는데!’
‘지가 한 말은 생각 안 하고 당하니까 엄청 억울한 척 하네. 어우! 재수없어.’
당한 것에 비하면 정말 별 거 아닌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직원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짜릿하고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너, 너 미쳤어?”
박상주 입장에선 상대할 가치도 없던 대상이 갑자기 하극상을 한 거였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말을 더듬으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 앞에 직원이 아나운서처럼 따박따박 말을 이었다.
“아뇨? 안 미쳤는데요. 근데 곧 미칠 것 같기도 해요. 일하러 회사에 온 건데, 일 안 하는 사람이 자꾸 뭘 시키니까 미치고 팔짝 뛰고 싶어지거든요!! 가뜩이나 리멤버 애들 다음 앨범 준비해야 돼서 바빠 죽겠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 시킬 거면 본인 스스로 하세요! 남한테 시키지 마시구요!! 일을 못한다고 그렇게 혀를 쯧쯧 차실 거면 본인이 직접 하시라는 말입니다!”
일처리 하는 게 답답하다면서 왜 자꾸 일을 시키냔 말이다.
그렇게 잘 할 수 있으면 제발 본인 능력 좀 보여주길 바란다.
“그렇게 자알~ 하신다는 본인이 직접 하셔서 답답해하지 마시고요.”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쓰레기통에 처박힐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그녀가 쓴 시간이 얼마인가?
이걸 할 시간에 리멤버 애들을 위해 일을 했어야 했다.
그녀는 시작을 알리는 폭죽을 쏘았으니 이 정도에 그치기로 했다.
앞으로 박상주의 앞날에 먹구름만 끼어 있을 테니,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회사에 나오지 않는 불상사는 막아야 했다.
‘어딜 도망치냐고. 우리가 당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당하고 나가야지!’
직원이 흥! 하고 콧방퀴를 끼고 책상 위에 있는 보고서를 낚아채서 유유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박상주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선뜻 정리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직원들 모두가 은밀하게 곁눈질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