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는 요즘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봐.”
“…….”
“이봐요, 내 말 안 들립니까?”
“아…저요?”
뻔히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하지를 않나.
“내가 분명 오라고 했는데 왜 여태 안 오고 여기 앉아 있는 겁니까?”
“일하는 중이잖아요.”
불러도 오지 않는다거나.
“내가 시킬 일이 있어서 그런 거잖습니까! 급한 일이었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도 충분히 급한 일이어서요. 뭘 시키시려고 하셨는데요?”
“그…!”
“지금 딱히 맡고 계신 일 없지 않으세요?”
“아니, 나는 뭐 일 안 하는 줄 압니까?!”
일?
당연히 하는 게 없다.
물론 지위가 있다 보니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기는 한데, 그걸 그녀가 신경 쓴 적은 없었다.
그녀가 보고서에 신경을 쓰는 순간은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누군가를 꼽주고 싶을 때였다.
괜히 잘 진행 되고 있는 보고서에 꼬투리를 잡아서 의미없이 뺑뺑이를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괴롭히고 나면 박상주는 어느새 나빠졌던 기분이 나아짐을 느끼곤 했다.
저것보단 내가 훨씬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시발, 저것들도 학창시절엔 전교에서 공부 잘하면서 콧대 높이고 다녔겠지. 그럼 뭐해? 지금 내 앞에 고개 숙이고 쩔쩔매는데.’
못 생기고 공부도 못했던 날백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었던 그녀가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용기있고 지혜있는 선택 덕분이었다.
집안사람들 모두 고모님의 자수성가 덕을 봤지만, 그럼에도 고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본 적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만이 유일하게 고모님을 위해 허니엔터에 취직을 했다.
‘고모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거였는데…!’
고모님이 주식을 정리했단다.
처음에는 그 소문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해 코웃음을 쳤다.
그럼에도 찜찜함 때문에 고모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박상주는 배신을 당했다.
‘여기 대표가 문제야….’
고모님은 은퇴 이후 조용히 봉사를 하면서 지내고 계셨다.
그런 고모님을 꼬득여서 주식을 싼값에 인수했단다.
그걸 왜 팔았냐고 화를 냈지만, 언짢아하는 고모님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주식을 싸게 팔아버린 건 짜증났지만 그 금액을 떠올려보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까지 절대 쥐고 안 놓을 줄 알았던 주식이었는데…. 그걸 팔고 현금으로 쥐고 있단 말이지.’
차라리 그 현금을 어떻게든 받아내서 창업을 하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허니 엔터의 명성이 아쉽긴 했지만 주식을 팔아 얻은 돈을 투자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사업을 하든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시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문제는 어떤 업종을 창업하느냐였다.
그리고 박상주는 고민 끝에 고모님의 의지를 이어받아 엔터 회사를 창업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접 일해보니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표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직원들이 알아서 잘 했지. 대충 애들한테 방향을 잡아주고 연습생들 뽑아서 키워서 데뷔시키면 되는 거잖아.’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애들은 바닥에 치일 정도로 많다.
그들을 모두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그 중에 될 만한 애만 쏙쏙 뽑으면 되는 거다.
공짜로 가르쳐주는 건 너무 손해 같으니 연습생에게 돈을 받으면 큰 손해도 안 날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퇴직을 뒤로 미뤘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회사를 운영하려면 일 잘 하는 직원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허니 엔터에는 일 잘 하는 직원이 많았다.
‘직원들을 빼가자!’
유능한 직원들을 빼서 자신의 회사에 들인다면 허니 엔터의 노하우를 쏙 빼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모님의 회사였으니 그런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퇴사하지 않고 회사에 계속 다녔다.
돈을 많이 주겠다고 하면 당장 지금의 회사를 배신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뭐, 뭐지? 뭔가 이상한데.’
회사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아니, 좀 이상한 게 아니라 엄청 이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직원이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하극상이었다!
“내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오라고 전달을 했는데도 안 왔네요?”
“아~ 그땐 점심시간이었잖아요. 밥 먹고 왔습니다. 바쁜 일 아닌 것 같아서 막 가려고 했었고요.”
점심시간이든 뭐든 상사가 불렀으면 와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직원에게 점심을 사주며 슬슬 꼬득여보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이 엉망이 됐다.
‘시발! 내가 좋은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자기 발로 차? 넌 탈락이다!’
왈칵 짜증을 내려다가 다른 직원들의 눈치가 보였기에 꾹 눌러 참기로 했다.
여기엔 아직 그녀가 함께 데리고 나갈 직원이 있었다.
“그래서 왜 부르셨어요?”
“됐어! 나가! 필요 없어졌으니까.”
나름 대우를 해주겠다는 의미에서 존댓말을 썼던 그녀였으나 이제 스카웃 할 대상에서 제외 되었으니 대우를 해줄 이유가 없어졌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직원 입장에선 이번에도 박상주가 자신을 똥개 훈련 시켰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박상주가 또 똥개 훈련 시켰어요. 다들 나처럼 당하지 말고 최대한 못 들은 척 해요. 알겠지?”
“네.”
“와~ 쟤는 이제 믿을 구석도 없으면서 끝까지 뻔뻔하네.”
“쉿쉿! 아직 상사야. 상사.”
“시한부 상사죠.”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지. 우리도 당한 거 복수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어?”
“우리가 당한 걸 복수한다고요?”
“지영씨는 착해서 그런 생각 안 해본 것 같은데, 지금 직원들 사이에서 어떻게 복수할까 머리 굴리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오늘 하시는 거 보고 속이 시원했어요. 엄청 잘 하시던데요? 저도 깜빡 속았잖아요.”
“호호호! 그치? 나 연기 잘 하지?”
오랜만에 리멤버 전담팀 사무실에 웃음꽃이 폈다.
박상주가 팀에 들어오면서 사라지게 된 웃음꽃이었다.
“이제야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네.”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흙탕물로 만들었으나 그 미꾸라지가 통발에 걸렸다.
미꾸라지에게 남은 것은 통발 주인이 나타나 가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그 전에 속 시원하게 복수를 해내야만 했다.
♧ ♧ ♧
첫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체육의 후유증으로 멤버들에게 며칠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 사이에 나는 전담팀 누나들에게 부탁했던 일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직원들을 만나러 다닌대. 놀랍게도 걔 회사 나가서 창업을 할 생각인가 봐. 자본금이 천 억이 넘는다더라. 근데 과연 그 무능한 것이 그 큰 돈을 어디서 구했을까?”
“설마…대표님이 지분 인수하면서 드렸던 돈은 아니겠죠?”
“빙고-! 우리가 보기에 그 돈일 것 같거든.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는 거야. 거머리도 아니고, 그 돈이 지 돈도 아닌데 애들한테 공수표를 남발하고 있대.”
허니 엔터 직원을 빼가려는 시도는 확실히 추잡하지만 성공한다면 회사에 꽤 치명적인 일이 됐을 것이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하니 혹하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같이 빠져나가주는 게 더 좋아. 한 치 앞도 못 보고 현재만 보는 거잖아. 그런 무능한 놈이 운영하는 회사가 오래 가겠냐고.”
“그렇죠.”
“쉬쉬하고 있는 중이지만, 누가 저 지뢰를 밟을지 지켜보고 있는 중이야. 아무도 안 밟았으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 자식이 제시하는 돈이 제법이라더라. 눈 돌아갈 정도는 된대.”
“정말 끝까지 회사에 민폐를 끼치고 나가려나 보네요.”
“그러니깐 말이야. 그래도 직원들이 슬슬 복수를 시작했어.”
“복수요? 어떻게요? 재밌는 일화 없어요?”
직원들이 하는 복수라니!
매우 흥미진진하고 궁금한 소식이었다.
“근데 다들 독하질 못해서 심하게 하는 건 없더라고.”
다소 힘 빠지게 만드는 시작이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우리 전담팀 기가 어마어마하게 빡센 편이고, 다른 직원들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우리 팀원들의 독한 기준이 너무 높다는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이번에 직원들을 한 명씩 꼬시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다들 눈에 독기가 서리더라. 요즘 걔 일 다니기 싫을 걸?”
“어떻게 하는데요?”
“일 시키기.”
“일 시키기?”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일 없이 놀고만 있는데 그 꼴이 보기가 싫다는 거지. 그래서 애들이 꾀를 내서 그 사람한테 일을 시키고 있는 중이야.”
“그 사람 일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못하지. 그래서 재밌는 거야.”
일을 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바쁘긴 해. 리멤버 애들 컴백 준비 시켜야 하니까. 그 자식은 입만 털면 애들이 야근해가면서 뚝딱 해오니까 쉬운 줄 알았을 거야.”
“일을 시키면 하기는 해요?”
“원래 그 자식이었으면 안 했겠지. 내가 이걸 왜 하냐면서. 근데 걔네들이 제법 머리를 썼어.”
일이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가 했더니 직원들이 트롤러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는 척 하면서 트롤러가 새로 만들 회사가 잘 운영 될지 확신을 얻고자 능력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와~ 그런 거에 넘어가요?”
“넘어 갔으니까 걔네들이 신나게 시키고 있는 거겠지? 아마 지금쯤 직원들이 따라가겠다고 해서 희희낙락할 걸? 전부 뻥치는 건데.”
“그 사람은 꿈에 젖어 있겠네요.”
“애들 다 빼서 회사 차려서 허니 엔터처럼 큰 회사를 운영한다! 참 말로는 쉬워. 그치?”
“그러게요. 말로 하면 참 쉽네요.”
사장님과 연주 누님의 인생을 갈아 넣어서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회사이다.
별 것도 아닌 사람이 우리 회사를 우습게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직원들이 알아서 복수를 하고 있다니 직접 나서진 않겠지만, 자기가 저지른 만큼 후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할 수 있는 걸 해볼까?’
연주 누님에게 사장님을 정식으로 소개 받았기에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회사에서 볼 일을 끝내고 나온 나는 사장님에게 연락을 넣었다.
지금 회사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사장님에게 돈이 있고, 그 돈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과연 자기가 믿고 있는 것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때 만났던 사장님은 친척들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듯 했다.
“현오가 사장님을 보고 싶어 해서요.”
-현오가?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 없어도 낼 테니 꼭 오렴.
사장님은 나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았다.
“현오랑 저희 둘만 가도 될까요?”
연주 누님에게 이 상황을 말한다면 분명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사장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보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따님이 먼저 떠나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사장님이다.
그런 분에게 친척에게마저 등을 돌려달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을 할 생각이었다.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해서 오로지 돈을 노린 채로 다가오는 상대를 가족이라고 봐도 괜찮은 걸까?
그런 사람들을 가족이라며 부여잡고 있는 건 너무 안타깝다.
연주 누님이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을 방치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고 싶어 하셨었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 주변이 부촌이 되어 있었는데, 그 전에 미리 비앙카와 멜리사가 주변 땅을 많이 사둬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집을 마련해드릴 수가 있었다.
사장님이 우리 집 근처에 이사 오는 걸 누님이 막은 이유는 내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다.
내가 사둔 아이템이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다 보니 그녀가 드나들었다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사장님을 옆집에 모시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사장님이 우리 집에 오는 게 아니라 현오와 우리가 사장님 집에 놀러가는 식으로 생활한다면 말이다.
핑계거리는 무척 간단했다.
우리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자가 누님 혼자만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서 양해를 구하는 거다.
그 사실을 알고도 사장님은 함부로 우리 집에 드나들 리가 없다.
‘사장님을 우리 옆집에 모시자.’
그럼 연주 누님의 가족도 챙기게 된 것이고, 현오에겐 든든한 할머니가 한 분 더 생기는 것이며, 회사에 피해를 끼쳤던 트롤러에 대한 복수까지 된다.
일석삼조인데 이걸 안 해?
'무조건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