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19화 (519/849)

“박상주.”

“예, 고모님.”

“내가 언제까지 널 봐줘야 하는 거니?”

“예?”

“그래, 솔직히 네가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겠다는 말에 기특한 마음이 들긴 했었다. 네가 회사에 잘 적응해서 일해준다면 나도 마음이 든든할 테니까.”

“제가 일 때문에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 못해 이러시는 거에요? 앞으로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내가 너한테 지금 구걸하고 있는 거니? 나 만나러 와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리?”

“에이, 고모니임~ 왜 이렇게 까칠하세요? 제가 서운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스케줄이 제 마음대로 안 되네요. 에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박상주는 자신이 느끼는 부당한 일만 고모에게 고자질했다.

“이젠 회사 직원들이 절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대표가 절 견제하고 있어요. 제가 고모님을 통해서 회사에 들어온 게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해요. 이게 다 고모님이 주식을 파셔서…에휴~ 이 얘기는 더 안 하겠습니다. 정말 아쉽네요. 저랑 조금이라도 상의를 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 재산을 벌써부터 네 것처럼 말하는구나.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상의해야 하는 거냐?”

“아! 아뇨. 제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시끄럽다!!”

쾅!

아무리 은퇴를 했다고 해도 왕년의 카리스마가 사라지진 않는다.

박상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잽싸게 무릎을 꿇었다.

할 줄 아는 것 없는 그녀가 유일하게 잘 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거였다.

납작 엎드려야 할 때는 제대로 엎드릴 줄 아는 것.

“아이고! 고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저넘은 말을 했죠?”

“아는 애가 그런 소릴 하니? 그리고 너 도대체 회사에서 뭐하고 다니는 거야? 회사 사람들이 무시를 한다고? 내 회사에서는 일 못하는 무능한 상사는 무시당해도 된다! 네가 제대로 능력을 보여줬으면 직원들이 널 무시하지 않았겠지!”

“고모님까지 저한테 매정하시면 회사에서 제가 어떻게 버팁니까? 예? 제가 배우고 싶어도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아요. 제가 오라고 부르면 일이 바빠서 못 왔다고 하고, 밥 먹고 가려고 했다고 변명하고 이럽니다!”

“…하아.”

한숨이 나오는 조카의 변명에 결국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이 아이한테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친족 중 누군가 한 명이라도 회사에서 일하며 허니 엔터와의 끈을 이어주길 바랐을 뿐이다.

이젠 그 소소한 바램도 바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그만하고 퇴직해. 거기 계속 남아 있어봤자 좋은 일 없을 거다.”

“알죠. 저도. 근데 이대로 그냥 나오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허니 엔터는 고모님의 인생이 담긴 곳이에요!”

“그래서. 계속 거길 다니겠다는 거냐? 내 손에 한 주도 들려 있지 않은데?”

“고모님이 왜 그 여자한테 주식을 다 넘겼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감히 짐작할 수도, 짐작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아쉬움이 계속 남네요. 저도 고모님의 뒤를 따르고 싶었거든요.”

“네가 내 뒤를 따른다고?”

“예, 거기 대표가 절 계속 주시하고 있어서 버티고 있을 수가 없으니 퇴직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이대로 제가 꿈을 접어야 한다는 게 슬프네요. 나름 저 혼자서라도 계획을 다 짜고 있었거든요.”

“계획?”

그녀는 조카의 말에 아는 바가 있었으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제가 지금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어도 대표가 쫓아낼 게 분명합니다. 거기 직원들도 대표한테 들은 말이 있는지 저를 괴롭히고 있고요. 고모님이 퇴직한 사이에 그 사람은 허니 엔터를 자기 걸로 완전히 만들어버렸어요. 고모님의 흔적을 전부 지웠다고요! 고모님은 이런 상황이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화가 나지도 않으시냐고요.”

“별로 억울하지 않은데. 그런 상황을 다 고려해서 주식을 넘긴 거다. 그 아이라면 회사를 잘 운영해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전 화가 납니다! 고모님이 이뤄낸 업적을 자기 걸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허이구, 지랄 똥을 싼다.

“고모님, 제가 고모님의 의지를 이어받아 엔터 회사를 차리겠습니다! 제가 거기서 뜻 있는 직원들 몇몇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 친구들도 회사에 불만이 많더라고요. 고모님이 퇴직하시고 회사가 점점 이상해지더랍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귀가 썩을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정신 못 차리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구나!! 그 회사 차릴 돈이 어디 있어서 회사를 차리겠다는 거냐? 결국 내 돈 쓰겠다는 거 아냐!!”

“고모님! 이 정도도 조카를 위해 지원해주지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고모님의 꿈을 이어가겠다는데도요?!”

“너희들은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 그래야 내 재산을 이리떼처럼 이리저리 뜯어먹을 테니까. 살아 있는 지금도 어떻게든 내 돈을 가져가려고 난리를 치니, 앞날이 뻔히 보이는구나.”

“서운합니다! 저만큼 고모님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다들 고모님한테 지원 받은 돈을 쓰면서 놀고먹기 바쁩니다. 근데 전 고모님이 한이 생기실까 걱정 돼서 회사에 입사하겠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 나도 처음에는 그래서 기특한 마음에 꽤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했었다.

이 아이도 돈을 목적으로 보고 이런 행동을 한 거겠지만, 받아먹기만 하던 다른 친척들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한심하구나. 한심해….”

“예? 저요?”

“아니, 내가 너무 한심하다. 도대체 너한테 뭘 기대한 건지…. 그만하자, 상주야. 퇴직하고 나오거라.”

“…당장 회사를 나오란 말씀이세요?”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오렴.”

“제가 말씀드렸지만, 정말 잘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시간을 주시면 자세한 사업 계획서를 가져와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한테 사업할 돈 줄 일 없다!! 정 그렇게 사업을 하고 싶으면 네가 벌어서 마련한 돈으로 해! 아니면 네 손으로 날 죽여서 일찍 상속이라도 받던가!!”

“아니, 고모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잠시만요, 제 말을 들어보세…!”

“나가!! 1분 안에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을 거다.”

섬뜩한 경고에 경악한 박상주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계속 버티고 있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다, 다음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차분히 다시 들으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박상주!!!”

“헉! 나, 나 갑니다. 나가요!”

후다닥 꽁무니를 빼는 박상주를 보며 사장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하지 않았던 탓에 박상주에 대해 몰랐고, 좋은 면만 보여주었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이 모든 상황이 미련한 그녀의 후회로 벌어진 일이었으니 제대로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미련을 버렸어야 했는데…. 연주를 볼 낯이 없구나.’

그래놓고 주식 조금 싸게 거래해준 걸로 생색이나 내려고 했다니.

연주의 남편인 진해솔이 솔직하게 상황을 털어놔주지 않았다면 입 무거운 연주 녀석이 혼자서 이 짐을 다 짊어지려고 했을 것이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건가.”

누구보다 조연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녀이기에 남편으로 데려 온 사람이 회사 소속 아이돌인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가.

아이돌을 하는 남자를 평생의 짝으로 삼은 것에 얘가 일을 하다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의심까지 했던 그녀이다.

그런데 역시 조연주는 조연주였던 걸까?

계속 진해솔이라는 남자를 경험하고 보니 염려한 것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연주를 위해 불편할 게 뻔한 자신을 만나러 와서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회사 사정을 밝혀준 것이다.

박상주가 에어플레인 멤버인 진해솔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자신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한 것이 조연주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기 여자를 위해 불편한 사람을 선뜻 만나는 남자라….’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남자가 조연주의 남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애가 일하던 노하우가 있어서 그런지 사람을 잘 본다니까.’

괜찮은 사람이니 회사 소속 아이돌임에도 연인 관계가 된 걸 테지.

자신이 회사에서 물러나면 혼자서 회사를 키우다가 늙어죽을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참 다행이었다.

이제 회사 걱정은 완전히 내려놓고 말년 인생을 즐기면 될 것 같았다.

‘내가 불러들인 문제 거리는 확실하게 처리하고 나서 말이야.’

♧ ♧ ♧

체육 대회가 끝났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리멤버와 함께 진행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실 얘네들 데뷔 앨범을 들어보면 수록곡에 좀 이상한 게 있긴 한데, 타이틀곡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어.”

“나쁘지 않다는 게 좋다는 것도 아니지 않아?”

“맞아, 바로 그거야. 얘네들 데뷔 앨범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매력적이라고 보기에도 힘든 곡이었어. 컨셉은 잘 잡았는데 그걸 살릴만큼 노래가 신나질 않았거든.”

제키와 나는 현재 애들한테 어울릴만한 곡을 상의하고 있었다.

얘네들에게 잘 어울리는 곡은 솔직히 우리가 자주 쓰는 느낌의 곡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 쓸 것도 없었기에 함께 상의해서 하나 작곡을 하기로 했다.

“내가 얘네들이랑 좀 생활을 했잖아? 그때 영감을 받은 게 있어.”

“만들어왔어?”

“응. 만들어 왔지.”

“잘 됐네, 바로 들려줘. 타이틀곡 하면 되겠다.”

들어보지도 않고 타이틀곡으로 하면 되겠다는 제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한 소리겠지만 보통 내가 영감을 받았다고 하면 타이틀 곡을 삼아도 될 만큼의 멜로디이긴 했다.

그걸 자주 작업을 해본 제키가 모를 수가 없었다.

“일단 들어보고 말해.”

그래도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으니 적당히 겸손하게 말하고 노래를 틀었다.

♪♪♩♬♪♬~

통통 튀고 경쾌한 리듬.

나이가 어린 아이들로 이뤄진 그룹이었기에 이 정도 상큼함은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진짜 발랄하네.”

“내 안의 모든 발랄 상큼을 다 담아봤어.”

“잘 어울린다. 들으니까 리멤버 애들 얼굴이 확 떠올랐어. 얘네들이 이걸로 노래 부르면 진짜 신나겠는데?”

“다행이네, 내가 그걸 의도했거든. 신나서 춤을 출 수밖에 없게. 춤 난이도는 대중들이 따라 출 수 있을 만큼 쉬운 걸로 하고 싶어. 화려한 퍼포먼스는 애들이 얼굴을 좀 더 알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보거든.”

이 발랄하면서도 반복 되는 리듬에 맞춰 간단하면서도 중독적인 댄스를 추는 거다.

“컨셉은 진짜 확실하네.”

“시작부터 이미지를 확실하게 잡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애들 얘기도 들어봐야겠지만 난 좋은 것 같아. 이건 형이 좀 더 만져볼래?”

“내가 여기서 더? 네가 편곡 안 하고?”

“여기선 내가 괜히 손대면 곡이 쓸데없이 화려해질 것 같아. 난 이런 스타일의 곡을 만들라고 하면 못할 것 같거든.”

“그럼 이건 내가 끝까지 만들어볼게.”

“형은 곡을 벌써 하나 만들었는데, 나는 이제 어쩌지?”

“내 곡 하나만 들려주려고? 애들도 선택할 수 있게 몇 곡 정도는 써와야지. 나도 당분간은 시간 날 때마다 애들 곡 만들어 볼 생각이야.”

아현이가 유학 일로 바쁘지만 않았어도 이번 일에 그녀도 한 손 거둬달라고 부탁을 했을 거다.

이런 통통 튀는 상큼한 음악은 누구보다 아현이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으로 바쁜 상황이다 보니 다른 곳에 신경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곡을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 나올 자신이 없는데.”

“뭐야, 갑자기 왜 약한 소리야? 이래놓고 곡 써온 거 들어보면 나보다 더 잘할 거면서.”

“이번엔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이런 스타일의 곡을 써본 적이 거의 없거든. 우리랑 스타일이 너무 다르잖아.”

“그건 그렇지. 나도 애들이랑 자주 놀다보니까 떠오른 거지, 아니었으면 절대 못 썼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 100%다.

애들이랑 놀고 있을 때 우연히 터진 영감이 아니었다면 나도 제키처럼 헤매고 있었을 거다.

내가 만든 곡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걸 더 써달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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