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을 가족이라고 감싸주면 어떻게 되는지 누님도 아시잖아요.”
현오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내 장모님께서는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망나니인 둘째 처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바람에 생긴 일들을 말이다.
내가 낳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을 당하는데, 돈 때문에 접근한 친척이라고 나을까.
그런 가족 같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농락당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누님이 가족처럼 여기시는 분이잖아요. 그걸 왜 두고 봐야 해요?”
“이번 일로 친척들이랑 완전히 틀어진 것 같더라. 핏줄이라고는 친척들밖에 없는 사람이야. 언니를 챙겨줄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이번 일로 그쪽 사람들한테 완전히 마음이 닫혀버린 것 같더라. 이러면 결국 외로워지는 건 그 언니야.”
“왜 외로워요? 우리가 가족이 되어주면 되잖아요.”
“…….”
“옆집 공사할 거에요. 사장님을 거기에 모셔서 가족처럼 지낼 거고요. 봉사 활동 바쁘게 다니신다고 자주 만나 뵙진 못하겠지만 집이 가까우니까 지금보단 훨씬 자주 만나겠죠.”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어. 너한테 짐을 주려고 언니를 소개시킨 게 아니야.”
누님의 말은 본인의 행동은 고려하지 못한 말이었다.
“누님도 노력해주셨잖아요. 제 가족들이랑 잘 지내려고요.”
회사 일밖에 몰랐던 여자가 내 가족들과 여행을 흔쾌히 가줬다.
거기서 혼자 있지 않고 어느 정도 어울려주기까지 했다.
누님의 본래 생활과 동 떨어져 있는 행동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각오를 해준 것이었다.
“누님도 제 가족들을 위해 노력해주셨는데, 저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사장님이 대하기 힘든 분도 아니잖아요. 현오를 얼마나 아껴주시는데요. 현오한테 든든한 가족이 한 명 더 생기는 일이라서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장모님과 사장님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두 분이서 의외로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 드는 걸까?
내가 말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연주 누님이 말이 없었다.
“사장님이 옆집으로 이사 오는 거 싫으세요?”
“네가 곤란해 할 거라고 생각했다. 옆집이면 네 비밀을 들킬 위험이 있잖니.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면 남일 뿐인데, 네가 그렇게까지 배려 해줄 필요가 없어.”
“저희 집에만 안 오시게 하면 되잖아요. 저희가 사장님 집에 놀러 가면 되죠. 그리고 저한텐 남이지만 누님한테는 가족같은 사람이잖아요. 저한텐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럴 이유가 돼요.”
“…….”
두 사람 모두 가족 같지도 않은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고, 입을 뻔 했다.
친한 두 사람이 왜 이런 것까지 닮은 건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제 말대로 할 거죠?”
“네가 정말 괜찮다고 한다면.”
“그럼 된 거네요! 사장님 옆집으로 모시는 걸로 해요! 근데 누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좀 충격 받아서 그래. 그걸로 내가 그동안 고통 받아왔었는데, 왜 언니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수 있죠. 제가 신경 썼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고맙다.”
충격 받은 건 충격 받은 거고.
연주 누님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해왔다.
“저도 감사해요. 제가 고집 부렸는데 받아주셔서.”
“날 위해서 한 행동인데 어떻게 화를 내겠니?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치들을 봐줄 필요가 없어지는구나.”
“그치들이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몰라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사장님의 친척들을 말하는 거지 않은가?
“그 사람들이 누님을 따로 찾아와서 괴롭혔어요?”
“몇 번 찾아온 적이 있긴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식을 넘긴 걸로 사기꾼 취급을 했지. 소송을 한다고도 하던데.”
“와~ 진짜 그 사람들 심하네. 자기들 것도 아닌데 소송을 한다고요? 그런 무례한 사람들을 여태껏 봐줬던 거에요?”
이런 것도 싹 다 일렀어야 했는데.
“어차피 아무것도 못할 놈들이야. 짖는 것만 요란할 뿐이지.”
“그래도 기분 나쁘셨을 거잖아요. 회사에서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 뭐였는지 들으셨죠? 끝까지 회사에 피해를 끼치려고 했어요.”
“되도 않은 창업을 해보겠다고 직원들한테 바람을 넣었다는 건 들었다.”
“한 명도 따라가지 않았어요. 그만큼 그 사람이 회사에 끼친 피해가 크다는 거거든요.”
연주 누님이 누군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다.
사장님의 친척만 아니었어도 회사에 그런 사람이 다니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거다.
더불어 그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깽판을 쳐도 참은 건 사장님 때문이었고, 그 이유가 사라진 지금 연주 누님은 본래의 성격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절대 봐주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누님한테 함부로 대하게 하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그럴 이유가 사라졌는데 봐줄 필요도 없지.”
“만나주지도 마세요.”
“그치들이 안 만나겠다고 해도 순순히 알겠다고 할 이들이 아니라서. 네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나머지는 내가 해결하는 게 맞겠지. 앞으로 이 일은 신경 쓰지 마렴. 그것들을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
연주 누님의 목소리가 오싹하다.
내가 그 사람들이었으면 절대 연주 누님에게 갑질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넵. 이제 그 사람들 신경 안 쓸게요. 저는 그럼 사장님 옆집에 모시는 것만 신경 쓰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연주 누님이 치워줄 거다.
연주 누님의 허락도 받았겠다, 옆집 공사 일정을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하기로 했다.
사장님께서 잘 지내실 수 있도록 크게 공사하는 김에 제대로 꾸밀 생각이었다.
그래서 친척들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할 것이다.
♧ ♧ ♧
옆집이 공사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에 리멤버와 함께 찍는 프로그램도 꽤 많이 진전 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타이틀곡과 안무가 나왔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연습 그리고 또 연습 뿐.
더불어 우리가 리멤버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애들이 잘해야 돼.”
“그럼 우리는 슬슬 빠져주면 되는 건가?”
첫 시작은 우리가 메인이었지만 조금씩 애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래도 아예 안 나오면 좀 그러니까 애들 연습하는 거 찾아가는 장면 찍는대.”
“애들 연습은 우리가 봐주긴 해야지. 그리고 또 뭐 찍는대?”
“컴백해서 애들 첫 무대 서는 거.”
“그게 끝이야?”
“응.”
언제까지 프로그램을 촬영할 순 없는 법.
이 프로그램도 끝은 존재하고 애들이 무사히 컴백해서 무대에 서는 것이 마지막 촬영이 된다.
“이 프로그램 끝나면 이제 우리 어떻게 하냐?”
그때, 경태 형이 예민한 문제를 슬그머니 꺼내들었다.
“음….”
“…….”
“개인 활동 계속 하는 거 아니었어요?”
“언제까지 개인 활동만 하는데? 애들 챙기느라 정작 우리는 미래는 생각을 하나도 못했잖아. 나 솔직히 이번에 애들 앨범 작업하면서 이게 우리 앨범 작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 생각은 좀 들더라. 우리 언제 다음 앨범 낼 수 있어?”
“다음 앨범 내려면 재계약을 해야 돼.”
“그건 그렇지.”
“재계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계약에 관련 된 내용은 모두와 상의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내가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게 맞기도 하다.
“회사에선 이번에 리멤버가 잘 되면 레이블에 관련 된 내용을 긍정적으로 봐줄 것 같아.”
이건 애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긴하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가 촬영한 게 리멤버 애들한테 큰 도움이 돼서 좋게 보셨는지, 애들이 잘 안 되도 우리 계약은 긍정적으로 진행 될 거라고 확답을 받았어.”
“헉!”
“진짜? 회사가 그런 말을 했어?”
“전담팀이 다 같이 빠져나가는 것도 허락을 해주겠대.”
사실 레이블을 차리는 건 우리끼리 뭉치면 가능하다.
하지만 전담팀은 사정이 달랐다.
우리 팀원들이 모두 따라올 수 있을지는 회사가 정말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팀원들이 일당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다른 곳에 보낸다?
회사 입장에선 큰 출혈이었다.
반면 우리는 팀원을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데려가고 싶었다.
“그럼 진짜 잘 된 거네?”
“응. 잘 된 거지.”
“그럼 슬슬 우리도 컴백 준비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멤버들이 드디어 컴백이냐며 눈을 반짝인다.
나는 해맑게 웃고 있는 애들과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얘들도 슬슬 내가 터트릴 폭탄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이 타이밍인가?’
이미 주아 누나와 내가 연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깊게 파고드는 질문을 해본 적 없는 애들이다.
나를 배려해서 자세히 묻지 않았음을 안다.
주아 누나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조금만 조사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애들에게 이미 한 번 배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들에게 한 번 더 폭탄을 던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지금 안 하고 또 미뤄? 그럼 언제 말할 수 있는데.’
우연히 얻게 된 타이밍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컴백에 대한 의지로 의욕이 샘솟고 있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먼저 말해서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멤버들 모두가 모이게 되는 순간이 자주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다음 기회로 미루면 시간이 꽤 오래 지나 있을 것이다.
연주 누님과 계획한 일정을 떠올려보면 그때쯤은 너무 촉박할 것 같았다.
‘촉박하게 알리는 것보단 미리 알리는 게 맞지.’
결국 결심을 한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멤버들에게 결연하게 말했다.
“얘들아, 잠깐만.”
“응?”
“나 너희들한테 말할 게 있어.”
“말할 거? 뭔데.”
“왜 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빡 들어갔대.”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일인데, 얘기를 들으면 좀 화가 날 거야.”
“화? 우리가 화를 낸다고?”
“어, 그래서 오늘은 얼마든지 나 때려도 된다고 미리 말할게. 각오하고 있어.”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여.”
“장난치려는 거지? 몰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애들이 장난이냐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내가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를 하니 점점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어느새 조용해진 주변.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 사실 가족이 있어.”
“…??”
“가족이 있다는 게 고백이라고?”
“설마 형한테 친엄마라고 나타난 사람이라도 있었어?”
내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알고 있는 애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추리를 했다.
“그게 아니야.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내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살아 계시지 않은 사람이 튀어나왔는데 그게 진짜일 리 없잖아.”
“!!”
“미, 미안. 그런 줄 몰랐어.”
“괜찮아. 나한테 크게 상처 되는 일도 아니고, 의미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 형이 말한 가족은 누구야? 헉! 설마 주아 누님이랑 결혼해??”
“아마 그렇게 될 거야. 근데 결혼을 할 사람이 좀 많아. 너희가 알고 있는 주아 누나뿐만 아니라 여럿이야.”
“어?”
“여럿…? 여자?!”
일부다처제가 당연한 세상.
하지만 세상은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지 부작용에 각종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형 설마…아니지? 그래서 탈퇴 하겠다는 거야?”
제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글이글하게 불 타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봤다.
“탈퇴하겠다고 한 적 없어.”
“그럼 뭔데? 여자가 많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처럼 그냥 들키지 않고 지내면 되잖아.”
“나도 여태까지는 그렇게 지냈는데, 아이가 있어서 불가능할 것 같아.”
“아이면 주아 누님 아이를 말하는 거야? 그 아이 아빠가 너였어?!”
“응.”
역시 얘네들도 주아 누나의 아이 아빠가 누구일지 궁금하긴 했었나 보다.
아이 얘기가 나오니 바로 튀어나온다.
“슬슬 아빠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재계약을 하면 태양이는 학교에 들어가고 한참 예민할 시기까지 아빠 정체를 숨겨야 하거든.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인데, 아이한테 부담을 짊어지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룹을 생각해보면 이기적인 선택이 맞다.
아이에게 아빠 노릇 해야 해서 그룹에 손해를 보는 행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