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이해가 가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버려서 우울한 것도 있어요!”
“촬영 끝나면 보통 후련하지 않나?”
카메라가 뒤를 쫓아다니는 거, 굉장히 불편하다.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전부 신경 써서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 리멤버 애들은 촬영이 끝난 게 서운한 모양이다.
“카메라가 없어지는 건 상관없지만, 이제 형들을 자주 못 볼 거 아니에요. 그게 너무 슬퍼요.”
“가끔 연락은 드려도 될까요? 도움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형들이랑 그냥 연락을 하고 지내고 싶어서요….”
뭐야, 우울해 한 이유가 우리랑 연락 못할까봐 그런 거였어?
“야, 우리가 프로그램 끝났다고 연락 안 하고 절교 할 줄 알았던 거야?”
“헙!”
“혀, 형들이 귀찮아하실 수도 있으니까 물어 본 거에요. 우린 연락 막 계속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형들은 바쁘시니까….”
“절대 그럴 일 없어. 꼬박꼬박 연락하고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해라.”
“헤헤헤.”
리멤버 애들과 이미 정이 들어버렸는데 프로그램 끝났다고 냉정하게 연락을 끊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얘들도 우리랑 친하게 지내는 게 활동할 때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이다.
“명절에 꼬박꼬박 안부 인사 보내야 돼. 너희들이 우리 호강시켜준다고 한 거 기억하고 있다고.”
당연하지만 이 말을 싫어하는 애들은 없었다.
이후로 리멤버 애들의 활동은 당연히 이랬어야 했다는 것처럼 탄탄대로였다.
데뷔 앨범 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트롤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한 거였다.
그런 매력을 가진 애들이면 데뷔 앨범이 폭망한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명불허전 허니 엔터 ㅋㅋ
-데뷔 앨범 지금 다시 보니까 나쁘지 않던데, 왜 폭망한 거임?
-몰?루
-귀여워! 리멤버! 귀여워! 리멤버! 귀여워! 리멤버!
-벌써 악귀들이 생긴 거야? 이야…심상치 않네.
-과연 허니 엔터!
-에어플레인 이용해서 띄워준다고 욕 하던 년들 다 어디갔냐 ㅋㅋㅋ
-몰?루
특히 우리나라와 이웃하고 있는 나라에선 귀여운 스타일의 리멤버 애들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고 한다.
애들은 벌써부터 국내 활동 이후 해외 쪽으로 넘어가는 스케줄이 잡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0위와 11위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해외에서 뻥 터져서 거기서 1위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정말 애들이 활동하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남은 건 하나.
‘우리 활동이지.’
컴백과 홍보에 관련 된 골치 아픈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소식이 전달 되었다.
♧ ♧ ♧
“섭외요?”
“저번에 연화정 감독이랑 섭외 관련해서 얘기한 적 있지?”
“네. 근데 그때 거절했었어요. 그쪽에서도 별로 미련 없어 보였고요.”
아까운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기가 나와 맞지 않아서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 그랬었는데 그 캐스팅이 다시 들어왔네?”
“그쪽이 저한테 미련이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요.”
재차 고려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중하게 거절을 하니, 그쪽에서도 살짝 아쉬워도 깔끔하게 물러났었다.
전혀 아쉬워 할 이유가 없는 입장이어서 나도 완전히 기억 속에 묻어둔 일이었는데….
“연화정 감독이 제작하려는 영화가 좀 달라졌어. 액션이 살짝 들어간 영화가 아니라 완전히 액션 영화를 찍으려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런지 제대로 사람이 안 구해지고 있는 거고. 아마 그래서 너한테 다시 제안을 넣은 게 아닌가 싶다.”
“액션이요? 액션이 왜요?”
“남자 배우에게 액션을 요구하고 있으니까 문제인 거다.”
응?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깨달았다.
여기선 영화를 자주 보지 않아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여긴 액션을 거의 대부분 여자가 했었지?’
남자가 나오는 경우는 여자에게 보호를 받을 역할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있다면 달리기 같은 것 정도?
남자의 액션.
옛날 흑백 영화에서나 있었을 일이었다.
‘액션은 진짜 잘할 자신 있긴 한데….’
쓸데없이 성능이 좋은 몸뚱아리.
액션에 최적화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나는 살짝 액션뽕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빈이 형님이 날렸던 명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 한 발 남았다. 크~’
나라고 명대사 한 번 날릴 수 있는 거 아닌가?
특히 이 세계는 남성의 액션에 익숙하지 않으니, 내가 제대로 액션을 보여주면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내가 보기에 너라면 액션은 가뿐히 해낼 것 같은데.”
“당연히 할 수 있죠.”
“연화정 감독이라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거다. 저번에도 아쉬운 거절이었어.”
연주 누님이 이렇게 재차 권유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 큰 도움이 될 일이라는 의미였다.
나도 두 번이나 제안이 왔다는 점에서 예전보단 더 솔깃하기도 했고.
“근데 저 이제 바빠지잖아요. 컴백도 해야 하고, 곧 난리가 날 텐데….”
그때 좋았던 기회를 이유 없이 거절한 게 아니었다.
“그 부분은 네게 모두 맞춰주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연주 누님이 연화정 감독의 영화가 어떻게 진행 되고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남자가 주인공인 액션을 찍고 싶었던 연화정 감독은 기존의 유명 배우들과 더불어 신인들에게까지 기꺼이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하겠다고 온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제대로 액션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던 거다.”
“그래서 돌고 돌다가 다시 저한테까지 기회가 온 거군요.”
“이번에 리멤버 애들이랑 같이 했던 프로그램에서 네가 활약하는 걸 본 모양이더라.”
체육대회?
“그게 그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네요.”
“연화정 감독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야. 웬만한 조건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어쩌면 네 사정을 들어도 괜찮다고 할 수도 있을 거다. 네 몸놀림을 보고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이 거기까지라는 거겠지.”
연주 누님은 내 신체 능력이 보통의 범위에서 넘어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액션 촬영을 하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다.
유명한 감독인 연화정 감독이 자신 있게 시도하는 영화이니 망할 리도 없을 터.
“어때? 할 생각 있니? 네가 싫다면 강요하진 않을게.”
“음, 그쪽에서 제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거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해요. 스케줄도 배려 받을 수 있다는데 뺄 이유가 없죠.”
더군다나 해외에서 상을 받는 감독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스캔들로 까먹었던 이미지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에 스캔들로 네 이미지가 손상 될 텐데 그걸 무마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다.”
연주 누님도 이 사실을 짚으셨다.
“역시 그렇죠?”
“만약 이번에 찍으려고 하는 시나리오 주인공이 남자만 아니었어도 네게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을 거야. 그 감독한테 찍히고 싶어 하는 배우들은 항상 넘쳐나니까.”
“제가 캐스팅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바로 캐스팅이 되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다. 그 감독도 최소한 확인은 해야지. 대충 타협을 봐도 될 일을 지금까지 계속 끌고 온 사람 아니니.”
기준이 굉장히 까다로울 거라는 뜻이었지만,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절 봤는데도 만족을 못한다면 그 감독님 기준이 이상한 거죠.”
물론 기술을 배워둔 게 없어서 감독님한테 보여줄 것들이 신체 능력밖에 없었지만, 감독님의 기준에 부족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당장 보자고 해주세요.”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쪽에서도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는지 누님에게 소식을 듣고 이틀이 지나고서 바로 약속이 잡혔다.
연주 누님이 직접 전달했던 연화정 감독의 일은 자연스럽게 우리 전담팀에게 맡겨졌다.
덕분에 팀원 누나가 약속이 잡혔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달했다.
“꼭 됐으면 좋겠다.”
“잘 하고 올게요.”
“연화정 감독님 작품에 들어가기만 하면 진짜 큰일 하는 거야. 꼭 성공하고 와!”
“자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연화정 감독님은 내 몸놀림을 보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담아 만나는 약속 장소를 잡았다.
바로 스턴트 전용의 체육관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제대로 액션을 수행 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해볼 생각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한테야 쫄릴 수 있는 장소지만, 나는 거리낄 게 없는지라 오히려 환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으압!!”
“하앗!!!”
쿵!!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체육관의 위용에 속으로 놀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움직여야 하니 편하게 입고 오라고 해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싶었다.
괜히 외모를 생각해서 불편한 옷을 입고 왔으면 나한테 쏟아질 시선이 감당 못할 수준이었을 것이다.
“음….”
내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째 아는 척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거의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 여성들은 각자의 운동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한 쪽에서는 낙법을 가르치고 있는 듯 하고, 한 쪽에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액션 스턴트를 연습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그리고 냄새가…엄청나고.’
진한 땀 냄새가 코끝을 찌릿하게 파고들었다.
여자들도 이런 냄새가 날 수 있구나….
내 여자들은 아이템 향수로 체향이 바뀐 터라 낯선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땀냄새가 쉬이 적응 되지 않았다.
“어? 사범님, 저기 누구 왔습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손님 온다고 했었는데….”
“안녕하세요.”
“오늘 오시기로 한 배우님 맞으시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범이라고 불렸던 여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만 교육생인 듯한 여성은 나를 알아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오늘 오디션을 여기서 본다고요.”
“네.”
“연화정 감독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으니 잠시 쉬면서 기다리십시오. 아니면 몸을 움직여야 하니 미리 스트레칭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스트레칭 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네가 좀 알려드려라.”
“헉! 제가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새삼스럽게 호들갑은. 적당히 하고 스트레칭 똑바로 가르쳐드려.”
스턴트가 아무래도 배우들과 자주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사범님 덤덤한 표정이었는데, 내 정체를 아는 듯한 교육생은 영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네, 네네엡! 여, 영광입니다!”
교육생은 말을 버벅이면서도 착실하게 스트레칭 시범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난이도 있는 스트레칭도 했는데, 워낙 사기적인 몸을 갖고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어우~”
“미쳤다. 오늘 잠 다 잤다.”
“이름이 뭐라고? 해솔? 씨바, 몸매 죽이네.”
“쉿쉿-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무식한 년아.”
“어우, 뒤태 근육 소름이다. 몸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 있지?”
한참 스트레칭에 집중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이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여자들이 나를 훔쳐보면서 내는 소리였다.
“다들 뭐하고 있는 거야!? 여기가 놀이터야!?”
그러다가 사범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으악! 하고 순식간에 시선이 흩어졌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아닙니다. 저보단 해솔씨한테 사과드리는 게 맞는 것 같네요.”
“해솔씨, 미안해요. 원래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애들이 아닌데….”
“괜찮습니다. 익숙해서요.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어~ 해솔씨. 다시 만나니까 참 반갑네요. 내 제안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훈훈한 인사를 나눴다.
“아까 스트레칭하는 거 얼핏 봤는데, 몸이 굉장히 유연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춤을 추다보니 유연한 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해솔씨가 체육대회 하는 걸 봤어요.”
“이번에 방영 된 프로그램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평소에도 체육을 잘 했나요?”
“곧잘 하는 편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육체 관련 된 일로 남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2M를 뛰었으니 제대로 배웠으면 대단했을 겁니다. 역시 그럼 액션도 자신 있는 거겠죠?”
액션영화의 주인공을 구하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으니 내게 거는 기대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