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30화 (530/849)

“적임자를 제대로 찾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

내 대답에 연화정 감독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나라지만, 지금은 겸손보단 자신감을 표현하는 걸 더 좋아할 거라 생각했고,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시작부터 느낌이 정말 좋네요. 아, 먼저 통성명 했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하루 우리를 도와 줄 사범 홍주은씨에요. 해솔씨한테 스턴트가 뭔지 알려주고, 가능성을 봐줄 분이시죠. 더불어 우리 영화 액션 감독도 맡아주실 분입니다.”

“아! 액션 감독님이셨군요. 몰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고생을 많이 하시게 될 겁니다. 너무 원망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몸매 관리로 하던 운동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각오 단단히 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가르쳐주세요. 약한 소리 안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두 사람 모두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생각이 바뀌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내 육체 능력을 생각해보면 저 두 사람은 오늘 턱이 빠지지 않을지 걱정해야 한다.

“스트레칭은 다 하신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네!”

“우렁 찬 대답 매우 좋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해솔씨는 스턴트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스턴트.

특수한 스킬을 요하는, 일상적이지 않고 힘든 육체적 솜씨나 행동이며 텔레비전, 극장, 영화에 예술 목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들이 없다면 영화를 찍는 것이 불가능하며, 배우들에겐 자신의 몸이 다치지 않게 대신 수행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맞습니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전문가인 저희들조차도 액션을 할 때 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연습과 서로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서로 거리를 잘 맞추고, 속도도 너무 튀지 않게 맞춰야만 한다.

누군가가 합의를 비트는 순간, 부상이 생기고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상대방과 확실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우리는 계속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찰나의 순간 망설이면 큰 사고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걸 항상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죠. 일단 직접 해보기 전에 먼저 합이 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들 이리 와봐.”

““예엡!!””

연화정 감독님도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군기가 바짝 든 스턴트들이 후다닥 모였다.

홍사범의 신호에 맞춰 스턴트들이 액션이 화려하고 긴박한 액션을 시작했다.

마치 이곳이 영화 속인 것마냥 휙휙 사람이 나가떨어지고 바닥을 뒹굴었다.

“와!”

처음에는 저렇게 화려하게 나가 떨어지는데 다치지 않는 게 너무 신기했다.

“등 아플 것 같은데….”

“낙법을 써서 아프지 않습니다.”

연기를 몇 번 해보긴 했어도 액션을 경험해볼 기회가 없었던 탓에 스턴트 액션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스턴트는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그것들이었다.

묵직묵직한 것보다는 익스트림하고 화려하며 민첩한 액션이 주를 이룬 합이었다.

“어떠십니까?”

“빠르고 날렵하네요. 주먹을 휘두르는 분보다 맞고 날아가 주시는 분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잘 보셨습니다.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속도를 잘 맞춰야 하지만, 낙법만큼 중요한 게 없죠. 혹시 낙법을 배워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기는 한데, 저렇게 낙법을 제대로 쓰시는 분을 보니까 제가 제대로 배운 건지 확신이 안 드네요.”

“그럼 낙법부터 다시 점검해드릴까요?”

“네.”

액션을 할 때 넘어지는 게 참 중요하다.

먼저 낙법의 제대로 된 자세를 보여준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범을 보인 사람은 전혀 아프지 않은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바닥에 매트릭스가 깔려 있다지만, 저렇게 대범하게 넘어질 수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다.

액션의 기본이라 볼 수 있는 낙법부터 못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엄연히 액션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쿵!

“오, 굉장히 잘 하시네요?”

“괜찮게 했나요? 한 번 배운 적이 있어서….”

“아주 잘했어요. 낙법은 굳이 더 가르쳐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연화정 감독님도 칭찬을 받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직 이 정도로 감독님을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 없었다.

이보다 더 놀랄 일은 앞으로 더 많이 있을 테니 말이다.

♧ ♧ ♧

체육관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연예인 쳐다보러 왔냐면서 호되게 혼을 내던 사범들도 훈련생들이 한 쪽을 쳐다보는 것을 더 이상 혼내지 못했다.

그들조차도 바라보고 있는 것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스턴트를 해오면서 저렇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걸 저렇게 쉽게 한다고?”

“저게 되는 거야?”

“현주보다 더 능숙하게 잘하는 것 같은데? 쟤 오늘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까 홍사범이 낙법 가르치는 거 봤잖아.”

휘익~!

그런 초보가 날다람쥐처럼 몸이 휙휙 움직인다.

두 팔로 줄 하나에 의지해서 올라가기도 하고, 훌쩍 점프해서 철봉에 매달려 순식간에 움직이기도 한다.

그녀들도 모두 저 기구들로 운동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이건 완전 도장깨기 아니야?”

“힘도 좋은데 속도도 장난 아니야.”

“너 저렇게 할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 저 속도로는 불가능하지.”

체육관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시설들이 저 남자 한 명에 의해 그야 말로 파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정을, 다음으로는 감탄을, 그리고 잠깐 질투심도 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압도 되어 버렸다.

“미쳤네. 남자가 저게 가능하다고?”

“원래 남자가 신체 능력으론 여자보다 우월하잖아. 옛날에 남자가 군인이었던 거 몰라?”

“그 귀한 남자들이 군인이었다고?!”

“너도 참, 역사 시간에 졸았냐? 원래 남자가 여자보다 신체 능력이 더 뛰어나. 지금 남자들이 약한 건 너무 귀하게 커서 그런 거고.”

“험한 일은 여자가 해야지. 남자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귀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모습은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잘해도 너무 잘하잖아. 사람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사범님도 어? 이게 되네? 그럼 이건? 이것도 된다고? 그럼 이건? 이것도 저렇게 잘 해? 라며 계속해서 단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사범이 시킨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보이고 있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빠르고 강인할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 모인 여성들 모두 강인한 육체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그 로망을 고스란히 현실로 보여주는 남자의 등장에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만!!”

난데없이 그 황홀한 광경을 막는 존재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여기까지 하시죠.”

“예? 아니, 감독님. 아직 해솔씨가 할 게 많습니다!”

“안 됩니다. 무리하게 하다가 다치면 큰일 납니다. 그만하시죠, 사범님.”

놀라서 굳은 채로 지켜보고 있던 연화정 감독이 급하게 사범을 막아섰다.

남자의 범상치 않은 몸놀림에 홀딱 빠진 사범은 아직 시켜보지 못한 게 많았던지라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저마다 아쉬움에 탄성을 내질렀다.

“아~!”

“아쉬운데.”

“저거까지 하면 정말 대박인데.”

“스턴트 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하겠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걸 해. 얼굴 봐라. 빛나잖아.”

주변에서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연화정 감독은 더 이상 남자에게 험한 운동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남자 스턴트가 거의 전부하다시피 한 상황.

액션을 해줄 주인공이 연습 때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저 합격한 건가요?”

화려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남자, 진해솔이 연화정 감독에게 물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탓에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헐떡이는 숨이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화려한 액션 못지않게 빛나고 있는 비주얼도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연화정 감독의 머릿속에서 벌써부터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저 남자를 카메라에 담았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을 그릴 수 있을지 말이다.

연화정 감독은 이미 한참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무조건 합격입니다. 부디 제 영화에 나와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남자만이 그녀가 바라는 영화를 만들어줄 수 있다.

그녀가 쓴 각본은 이 남자를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주인공이 정해져 있었던 거였어. 처음에 느꼈던 직감을 계속 밀고 갔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했었을까?’

자신이 멍청했다.

완벽한 주인공을 섭외했었는데, 고작 한 번 거절 당했다고 순순히 포기했다니.

만약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진해솔이 아이돌이라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토록 완벽한 주인공이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진해솔에게 처음 캐스팅 제안을 했을 때, 그가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액션에 능할 거라 생각해 섭외했지만 거절당해도 아쉬워하지 않고 포기를 했었다.

그리고 아쉽지 않았던 이유도 그가 아이돌이기 때문이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줄 알았는데.’

구관이 명관일 줄 누가 알았으랴.

솔직히 지금 그를 다시 캐스팅 하려 했던 것도 엄청 심사숙고를 했었다.

만약 우연히 보게 된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 완벽한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한 채 말이다!

‘이제라도 찾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각본도 수정해야겠어. 저 남자라면 수정 전의 대본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다. 저 친구 스케줄 때문에 일정을 늦추는 게 더 다행일 정도야.’

일이 딱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감독님께서 이렇게 좋아해주시는 걸 보니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요.”

“오늘 같이 촬영에 임해준다면 바랄게 없을 것 같습니다. 괜히 자신감을 보였던 게 아니었어요. 액션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아 보였습니다. 평소에도 운동에 관심이 많았나요?”

“운동에 취미를 두고 있다기보단 예전부터 신체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났어요.”

“체육계가 해솔씨를 놓친 걸 크게 아쉬워할 겁니다. 해솔씨 운동 능력은 선수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홍사범이 옆에서 열심히 진해솔을 띄웠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저런 칭찬을 쏟아낼 리 없었다.

애초에 홍사범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홍사범의 말은 연화정 감독에게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액션을 금방 배워서 곧잘 해낼 겁니다. 감독님이 액션성 짙은 영화를 찍는다는 말에 걱정이 많았는데, 진해솔씨가 주인공이라면 정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난이도 높은 액션을 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럼 홍사범 아니, 홍감독님도 찬성하시는 겁니까?”

이번 영화의 액션 감독을 맡게 될 사람이 바로 홍주은 사범이었다.

그녀가 짜는 액션이 연화정 감독의 영화를 화려하게 꾸며줄 것이다.

“물론이죠. 아마 조금만 더 연습한다면 상상 이상의 액션도 가능할 겁니다. 벌써부터 어떤 액션을 짤지 기대가 되네요.”

“상상 이상의 액션이라…. 설레는 말이네요. 해솔씨, 제가 스케줄이든 뭐든 다 편의를 맞춰드리겠습니다. 대신 꼭 우리 영화 찍으셔야 합니다. 이런 걸 봤으니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 영화 주인공은 진해솔씨밖에 없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감독님께서 제 스케줄을 배려해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저도 꼭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약속을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영화를 찍기 시작하면 촬영에 완전히 집중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연화정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진해솔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기로 했기에 그의 스케줄로 일정이 많이 밀린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영화를 찍는데 3년 이상 걸렸을 때도 그녀는 인내하고 또 인내했었다.

고작 몇 개월을 못 참아서 이런 주인공을 날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만 그렇게 인내하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야 했다.

아이돌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해도 엄청나게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연화정 감독은 진해솔이 자신의 영화에 진심으로 노력해줄 것을 약속 받아야만 했다.

“연기를, 액션을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내 영화에 출연하면서 진심을 다 하지 않는 건 못 봅니다.”

“물론이죠. 감독님께서 절 기다려주신 걸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결심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진해솔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화정 감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잘 해봅시다.”

연화정 감독이 진해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것을 보고 있는 홍사범 또한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지금 이 순간, 연화정 감독의 영화는 한층 진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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