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35화 (535/849)

연화정 감독님에게 연기에 대한 욕심을 고백하고 난 이후.

감독님은 나에게 말을 놓으셨다.

앞으로 감독님에게 연기 지도를 받아야 하니 편하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그것이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것에 대한 호감으로 생긴 덕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연기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감독님이 나에게 말을 놓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을 것이다.

‘아닌가? 액션 한 번 보여주면 뿅 가셨으려나?’

연화정 감독님이 나를 예뻐해서 만약 그녀의 사단에 들인다면 나는 배우로서 앞날이 창창한 거나 다름없어진다.

시작부터 감독님에게 점수를 많이 따고 시작했으니 상황은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 네 회사 대표님이랑 대화를 나누면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한 개 있어.”

“아이디어요?”

“여자가 많다면서.”

“…네.”

“내가 보기에 너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살고 있는 것 같아.”

“제가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인지라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연화정 감독님의 말이니 들어나 보자 싶었다.

“이건 듣기에 따라서 네가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야. 그래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거든. 근데 오늘 네가 하는 말을 듣고 말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렇게 진심으로 노력을 해주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고 피할 순 없지 않겠어?”

“말씀해주세요. 조언을 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하고 새겨 듣겠습니다.”

“내가 왜 너를 캐스팅하려고 했는지 알아? 아, 물론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전에 캐스팅 제안을 했던 걸 말하는 거야.”

내가 아이돌이라 액션을 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캐스팅을 하려고 했던 걸로 알았던 나에게 감독님의 말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저는 액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자네 얼굴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긴 해. 무대를 보니까 제법 날래게 움직여서 인 것도 사실이고. 근데 말이야. 너 같은 아이돌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 물론 다들 네 하위호완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난 너를 콕 짚어서 캐스팅하고 싶었어.”

“어째서요?”

“대표한테 사정을 들어서 나도 확신한 거지만, 너한테는 색기가 있거든.”

“…색기요?”

섹시 뭐 그런 이미지를 말하는 건가?

“그래! 너한테는 사람들을 홀리는 분위기가 있어. 내가 그걸 깨워주고 싶었지. 여자들이 많다고? 이미지를 잡는데 도움이 될 테니 오히려 좋아! 여자를 홀리는 남자의 유혹. 여자라면 누가 감히 유혹을 거부하겠어.”

“…….”

내가 섹스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생각해보면 감독님이 나를 보며 느낀 게 영 말도 안 되는 소린 아니었다.

그리고 왜 이 말을 안 하려고 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남자에게 ‘너 색기 있어 보여.’ 라고 여자가 말한다?

바로 성희롱으로 신고 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여자들은 과거의 남성들을 그리워하고 있어. 요즘같이 나약하고 징징대기만 하는 스타일은 재미도, 흥미도 없는 거지. 더군다나 섹시함이 사라졌다고! 섹시함이!”

연화정 감독이 바라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확 이해가 됐다.

‘하긴, 액션 영화를 봤을 때 남자 배우 형님들이 섹시하긴 했으니까.’

연화정 감독님은 흥분을 했는지 연설을 하듯이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의 남성상을 줄줄줄 털어놓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로 찌를 것 같은, 그런데도 자꾸만 쳐다보고 싶고 얽히고 싶은 남자!”

“감독님이 바라시는 주인공이네요.”

“…아니라곤 못 하겠네. 나는 자네가 그 이미지에 딱 맞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캐스팅하려고 했던 거야! 물론 지금 캐스팅 한 건 액션이 이유가 크지만 말이야.”

어깨를 축 늘어트린 감독님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불쌍한 척 하는 눈빛)로 나를 바라봤다.

본인이 말한 주인공이 되어 줄 수 있는지, 묻고 있는 시선이었다.

이미지를 아예 바꿔보라니….

“작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원하시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떤 모습인지 확실하게 이미지가 잡혔다.

과거에 봐왔던 수많은 액션 스타들이 존재하는 이상 이미지를 못 잡고 허탕을 치는 일은 없었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까 우리 제대로 해보자고. 남자 액션이 무리수라고 구는 녀석들 코를 싹 다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연화정 감독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쉽다며 입을 쩝쩝 다셨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각본을 보기 위해서였으므로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제가 다음에 술집에서 모시겠습니다. 감독님께서 제 연기를 봐주시기로 했는데 대접은 해드려야죠.”

“하하하! 이 친구가 역시 도리를 안다니까. 마음에 쏙 들어! 하하하!!”

연화정 감독님은 그렇게 나에게 홀딱 넘어왔다.

액션도 잘 하고, 연기도 열심히 노력해서 배우겠다니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 분위기대로 촬영을 잘 끝내고 영화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말로만 들었던 연화정 감독님 사단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연화정 감독의 사단.

이름만 들어도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영화배우들과 감독들의 소모임이다.

소모임이긴 한데 구성 되어 있는 인물들이 워낙 화려한 대스타들인지라 그 사단에 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거기에 들어가면 작품에 못 들어갈 일은 없다고 했지.’

기왕 연화정 감독과 연이 닿았다면,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얻어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앞으로 있을 논란도 연화정 감독의 끈이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연화정 감독의 사단에 들 필요가 있었다.

♧ ♧ ♧

연화정 감독님은 내게 예고했던 대로 연기 지도를 굉장히 세심하게 해주셨다.

감독님이 가르쳐주는 연기 지도는 현직 배우이신 분에게 수업을 받던 것과 달랐다.

‘이런 수업도 색다르고 좋은데?’

감독의 시선에서 보는 연기.

배우의 시선에서 보는 연기.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그래서 연화정 감독님의 가르침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모든 게 다 좋았지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게 쌓여 있는 스케줄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진짜 바쁘구나.’

24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7일간 정신없이 작곡에 빠져서 만든 곡은 회사에 넘겨졌고,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아니, 솔직히 굉장히 좋은 반응이 아니라 그 이상의 반응이었다.

‘이걸 네가 썼다고? 이 곡을? 이걸?! 미쳤다. 너 진짜….’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한 사람한테 재능을 몇 개를 몰아준 거야?’

직원들 반응이 꽤나 수선스러웠는데, 그날 이후 회사에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진해솔이 미친 띵곡을 써왔다고.

그리고 예정에도 없던 컴백 준비가 빠르게 진행 됐다.

이런 곡은 오래 묵혀둘수록 손해라면서 말이다.

더불어 우리들의 재계약에 관련 된 일도 빠르게 진행 됐는데, 이젠 싸인만 남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회사에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을 수용해줬고, 우리도 어느 부분에서는 양보를 하는 등 서로 좋게 계약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과는 회사에서 나와 작곡에 관련 된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내가 곡을 좀 잘 쓰긴 했어.’

회사에서는 작곡을 할 수 있는 나와 제키의 곡을 선점 기회를 갖길 바랐다.

회사 아티스트가 쓰지 않는 곡은 다른 쪽과 연결까지 해준다고 하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쓴 곡이 10개가 넘는데, 그걸 일일이 곡 넘기고 계약을 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하려면 얼마나 귀찮겠는가?

그렇다고 내 곡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번에 작곡가로 계약을 한 김에 선심 쓰듯 이번에 작곡한 10개가 넘는 곡을 회사에 넘겨주었다.

‘멤버들이 이미 곡 하나씩은 가져갔고, 회사에서 제 살 깎아 먹게 계약을 할 리도 없으니까.’

우리가 곡을 낼 때 내 곡이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회사가 그런 기본적인 처리도 못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 재능이 모두 자리를 잡은 이후, 킵해뒀던 곡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남겨진 곡들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멤버들이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개인 스타일에 맞지 않은 곡이기 때문이지, 곡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애들은 잘 하고 있나보네.”

바쁜 와중에도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있는 법.

나는 오랜만에 잠깐 짬이 나서 리멤버 애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인터넷을 통해 확인했다.

애들을 찍은 사진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것만으로도 활동을 잘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잘 나가지. 잠깐이지만 1위도 찍었대.”

“1위를? 오~ 축하 인사를 못했네.”

“내가 대표로 했으니까 걱정하지마.”

“역시~ 리더!”

“예능도 곧잘 하는 것 같더라.”

“경력직 매니저를 두는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나보네.”

가장 고무적인 일은 리멤버 애들이 예능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들이 성격도 야무지고 밝아서 예능이 참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긴장이 좀 풀리고 현장에 적응하기 시작하니 본래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회사에서 케어해주는 것이 달라진 것도 아이들을 변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의 권유로 이쪽에서 경력이 많은 매니저를 애들에게 붙였고, 그 처방이 정확했는지 애들이 훨씬 편하게 촬영에 임하게 된 것이다.

‘낯가림도 결국 아직 어린 애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오게 돼서 생긴 부작용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관리를 잘 받았으면 괜히 트라우마가 생길 일도 없었을 텐데.’

지금은 사라진 트롤러가 회사에 남긴 상처가 여전히 알게 모르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극복했다.

“걔들 예능에서 나오는 거 보면 진짜 잘 하던데. 우리보다 잘하는 듯.”

“이제 진짜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

남자 아이돌은 데뷔만 하면 거의 중박은 치는 세상이기에 리멤버 애들의 실패는 더 안쓰러웠다.

그래도 지금은 잘 되고 있으니, 리멤버 애들도 나중이 되면 힘들었던 데뷔의 경험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근데 형, 그렇게 계속 바빠도 괜찮은 거야? 정신없어 보이던데.”

멤버들은 컴백 준비 때문에 개인 활동을 끝내고 회사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스케줄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나가고 있었는데 멤버들 눈에는 엄청 바빠 보였나보다.

실제로 내가 바쁜 게 맞았기에 애들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 엄청 바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 근데 내가 하겠다고 한 일이라서 누구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어.”

“엄청 바빠도 형이 부럽긴 해.”

연화정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게 된 걸 알게 된 이후로 준이는 나를 부쩍 부러워했다.

감독님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꽤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았기에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준이는 이런 걸 부러워해도 추잡한 질투를 하진 않는다.

“너도 꾸준히 작품 하고 있잖아.”

“스크린 데뷔는 진짜 특별한 거야. 드라마랑 영화는 많이 달라.”

준이는 영화에서 단역으로 조금씩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중이었다.

드라마보다는 영화 쪽으로 나가고 싶다는 게 준이가 바라는 배우로서의 야망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아….”

준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 온 연락이었다.

“사생?”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설마 또 청탁 뭐 그런 거야?”

“어쩌면?”

“연화정 감독님이 진짜 대단하긴 하구나. 누구누구한테 연락 왔어?”

“배우 쪽으로 아는 사람은 전부 축하한다거나 청탁을 했고, 이젠 모르는 사람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 내가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걸로 작품에 뭐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줄 아나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사생이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 어리둥절할 수 있는데, 지금 내 사정이 의심해볼 만했다.

‘내가 너무 뜬금없이 연화정 감독 영화에 캐스팅 돼서 대단한 스폰서라도 갖고 있는 줄 아는 거지.’

처음에 모르는 전화번호로 연락이 왔을 때, 사생인가 싶어 받지 말까 하다가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화를 건 쪽은 내가 이름과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선배 배우였다.

문제는 내가 그 선배 배우와 안면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내 번호를 아는 동료 배우에게 번호를 받아서 걸었다며 뻔뻔하게 말을 하더니 연화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데 줄을 대줄 수 있냐는 황당한 요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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