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칼부림이라니! 그런 건 말도 하지마. 그러다가 말이 씨가 되면 어쩌려고?”
“앗! 미안. 내가 실수했어. 입조심 할게!”
어떻게 차라리 칼부림이 낫다는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말은 함부로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도 불길해서 싫었다.
내가 정색을 하며 하지 말라고 하니, 민영 누나가 실수했다며 귀엽게 눈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화가 다 풀리진 않았지만...
내 이상형 그 자체의 얼굴로 애교를 부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앞으로 조심해줘. 이건 우리 가족들 안전 문제니까.”
“응응.”
“그나저나 회사에서는 뭐라고 해? 이번 일로 그쪽 회사에서 누나들한테 불이익을 줄까봐 엄청 걱정 중이야.”
“놀랍게도 회사에서는 딱히 아무런 반응이 없어. 평소랑 다르지 않아. 전화가 엄청 오기는 하는데, 개인 사정이라 답변해줄 수 없다는 식으로 넘기고 있나봐.”
민영 누나는 회사에서 너무 반응이 없어서 얼떨떨할 지경이라고 했다.
회사가 민영 누나를 너무 신경 안 써주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런 무던한 반응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뜬금없이 날 섭외하려는 곳이 늘었대.”
“여자는 대단한 남자를 만날수록 능력을 인정받는 거니 그럴 수밖에 없지.”
“저번에 말했던 대로 되고 있는 거네. 그럼 주아 누나는 어때? 회사에서 뭐라고 안 했어?”
“우리 회사는 좀 호들갑이 심해. 저쪽 회사랑 우리 회사랑 반반 섞으면 딱 좋을 텐데.”
“호들갑이 심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 거야? 그렇게 말을 들으니까 감이 안 오는데.”
“회사에 애 아빠가 누구인지 왜 말을 안 해줬냐고 뭐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이번에 내 아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부각 된 게 마음에 안 드나 봐.”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태양이를 인정한 거 아니었어?”
누나가 회사에 계약을 할 때 태양이의 존재를 밝히는 것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었다.
회사는 태양이의 존재를 밝히는데 동의를 했고, 때문에 누나가 지금처럼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약서에 싸인할 때는 그랬지. 근데 싸인하고 내가 점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니까 태도가 바뀌더라.”
그동안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쌓인 게 많다며 누나가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가 있다는 걸 알리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서 말하는 건 싫어했어. 쉬쉬한 거지.”
“아~ 그건 나도 알고 있기는 했어.”
누나가 짜증을 냈던 적이 있다.
인터뷰 질문을 철저하게 거르고, 아이에 관련 된 내용은 무응답으로 일관하게 시키는 회사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말이다.
“그거 말고도 은근히 남자 배우 붙여서 스캔들 내려고 했던 것도 있어.”
“그런 일이 있었어?!”
여배우는 급이 높은 남자와 일부러 스캔들을 내서 인지도를 올리는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여배우에게 그런 짓을 시키다니.
이걸 내가 진작 알았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왜 그걸 지금 말해?”
“네가 화낼 게 뻔하니까. 내가 알아서 잘 해결했어. 너도 알잖아. 나 스캔들 난 적 없는 거. 너랑 빼면.”
그건 또 맞는 말이기에 화가 울컥 치솟았다가 화르르 풀어졌다.
“누나가 똑순이긴 하지.”
“그러엄~ 태양이 엄마고, 무려 진해솔의 여자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무튼 회사가 너랑 연인인 건 괜찮은데 태양이 존재가 확실하게 알려진 건 마음에 안 들어 해. 역할 들어오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말이야.”
“실제로 문제가 생겨?”
“아니? 전혀! 오히려 네 기자회견 이후에 팜므파탈 역할로 섭외가 많이 들어왔어. 엄청 매력적인 여자라서 남자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은 역할로.”
“민영 누나는?”
“나는 겉으로는 청순하고 순진한데, 속은 앙큼한 여우인 역할로 섭외가 들어왔어.”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 배우 생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팬들이 보내오는 택배 문제가 심각해서 마냥 좋다고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택배는 내가 어떻게 해볼게.”
“어쩌려고?”
“보내지 말아달라고 해야지.”
“얘가 미쳤나봐. 네 팬들 눈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은 거야?”
“절대 안 돼! 그냥 내버려둬. 우리는 피해 없으니까.”
“택배가 계속 오는데 계속 당해주겠다는 거야?”
“이 문제에 관련해서 너는 절대 나서면 안 돼. 그게 우리를 위한 일이니까 약속해줘.”
“…정말 이대로 계속 당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질투심 때문에 눈이 뒤집혀서 이러는 거니까.”
민영 누나와 주아 누나가 너무 단호하게 약속을 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네 여자로 우리 두 사람만 얼굴이 알려지고 밝혀진 거잖아. 그래서 잠깐 집중적으로 당하는 거야.”
“우리는 이해해. 너를 차지했는데 이 정도는 당해줘야지.”
피해자인 누나들이 팬들의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한다고 하니 내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대신 택배에서 정말 문제 되는 게 나오면 나설 거야.”
“알았어. 그땐 우리도 참으라고 안 할 게.”
누나들의 동의를 받아내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너는 좀 어때? 여전히 네 얘기로 기사가 도배 되어 있던데. 상황 괜찮은 거 맞아?”
“오늘 컴백 기사 낸다며. 이런 분위기에 내도 되는 거야?”
“아아~ 충분히 예상한대로야. 내가 제일 걱정한 게 팬 반응이었는데, 누나들한테 자꾸 택배 보내는 것 빼고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아니, 솔직히 좀 감동 받은 상태야.”
이번 사건으로 팬들이 많이 떨어져나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멤버들도 그 정도 손해는 충분히 이해해주겠다고 했다.
여전히 많은 팬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거고, 그 팬들을 위해 노력한다면 다시 돌아오거나 새로운 팬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랬는데 정작 일이 닥치고 나니, 팬들 반응이 의외였다.
이번 일로 팬 생활을 접겠다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꽤 많은 팬들이 팬카페에 나를 응원하는 글을 올려주고 있었다.
“응원의 글이 계속 올라오더라고. 용기 있는 고백을 해줘서 고맙다는 팬도 있고….”
“그걸 읽어봤어? 좋은 글만 올라오진 않을 텐데….”
“연주 누님이 당분간 팬카페에 접속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에게 건너서 듣는 건 싫었다.
내 멘탈을 걱정해서 좋은 말만 전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확실하게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접속한 팬카페에는 나를 욕하는 글보다 응원하는 글이 몇 배 이상으로 많았다.
“여러 나라 말로 응원글이 올라왔더라고.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솔직히 감동 받았어.”
“그래서 울었어?”
“…울기는. 내가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확실히 울진 않았나보네. 이번에는 진짜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안 울었다고 해서 감동이 적었던 건 아니야. 팬들한테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후회도 했어.”
악성팬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우리를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걱정해주는 팬들에게 소홀해진 것 같다.
레이블 독립에 대한 생각을 했을 때, 우리는 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 독립을 생각 했지 팬들을 위해 뭔가를 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이제 허니 엔터에서 우리를 관리해주지 않으니 우리가 스스로 팬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했다.
“맞아, 팬이 있으니까 이 생활도 계속 할 수 있는 거지.”
나를 위해주는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한없이 주기만 하는 사람들인지라 내가 뭘 주려고 해도 합당한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 사람들이 너한테 원하는 건 결국 하나이지 않아?”
팬들에게 열심히 활동하는 걸 보여주는 것.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해 할 것이다.
“열심히 활동하는 거?”
“응.”
“그런 점에서 컴백한다는 걸 알게 되면 기뻐할 거야.”
“응원해주고 있는 팬들한테 그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지.”
“맞아맞아. 컴백 소식은 내일 올라가는 거지?”
“응.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아서 예정대로 가면 될 것 같아.”
기자 회견을 하고 이틀이 지난 상황에서 여전히 화력이 죽지 않은 상태다.
이 화력을 컴백 이슈로 바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 될 것이다.
“컴백 기사 내기 전에 팬카페에 글을 올릴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일단 써오면 내가 괜찮은지 확인은 해줄 수 있어.”
“오케이. 바로 쓴다.”
누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지지를 가져와서 팬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터넷에다가 타자로 쳐서 글을 올리기보단, 직접 자필 편지를 써서 올리는 게 팬들에게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글씨 예쁘게 잘 쓰네.”
“이 부분은 문법에 안 맞는 것 같아. 다시 고쳐봐.”
“할 말이 많은 건 아는데, 좀 줄여야겠어. 핵심만 적자.”
하나하나 지적을 받아들여서 고심 끝에 완성한 편지.
누나들의 검증을 받았기에 마음 편하게 팬카페에 편지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 편지를 확인한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며 이번 기자 회견을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며 다시 한 번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멤버들과 회사에 모였다.
미리 계획한 바대로, 오늘 사람들에게 컴백 기사를 알리게 될 것이다.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과 직원들은 나에게 큰일을 잘 치렀다며 어깨를 두들겼다.
“기자들이 좀 심하더라.”
“근데 그 덕분에 네가 먹었을 욕을 기자들이 대신 받는 것 같더라.”
“어떻게 보면 기자들 멘탈이 진짜 대단한 것 같아. 사람들한테 욕을 먹어도 꿋꿋하게 기사를 쓰더라.”
“어떤 기자는 기사들의 도 넘은 무례한 질문에 대해 꼬집는 기사를 썼더라.”
기자들 사이에서도 이번 기자회견장에서의 태도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었던 모양이다.
무례한 질문을 하는 건 기자들이 심심치 않게 해오던 일이니 별스러운 일은 아니나, 그 정도가 도를 넘어섰다는 게 문제였다.
더욱이 그 광경이 생방송으로 나오고 있지 않았던가?
에어플레인의 국내 팬 뿐만 아니라 해외 팬들까지 전부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나라 망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
덕분에 기자들도 여론이 자신들에게 너무 불리하다 싶었는지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다고 기사를 안 쓰는 건 아니지만.’
그들에게 반성이란 논조의 태도를 바꿔서 내 편을 드는 기사를 쓰는 일이었다.
“그래도 기자들이 좀 조심하는 것 같더라. 어째 네가 기자회견에서 고백한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나도 갑자기 우리 팬들이 기자들이랑 싸울 줄은 몰랐어.”
“기자들 덕 보는 날도 있고, 참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동안 당한 게 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당분간은 더 덕을 봐야 하지 않을까?”
멤버들은 걱정하던 기자회견이 끝나고 팬들이 나를 욕하기보단 응원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크게 감동 받은 상태였다.
당연하지만 그 얘기도 모이자마자 빠지지 않고 나왔다.
“나 이번에 정말 감동 받았어. 눈물이 다 나더라니까?”
“그동안 우리가 팬분들한테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이 되더라.”
“뭔가 엄청난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뭐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여?!”
멤버들 모두 팬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비로소 본 모습이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가 마냥 좋을 때 좋아해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확 와 닿는 뭔가가 없을 수밖에 없다.
물론 콘서트를 할 때는 또 팬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게 되지만, 그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 상황이 왔음에도 대다수의 팬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을 보니 그들의 사랑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나도 이 부분은 상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예전에 허니 엔터에 있을 때는 알아서 잘 해주셨지만, 이제 레이블로 독립을 했으니까 우리가 직접 팬분들한테 뭘 해줄지 결정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