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47화 (547/849)

“요즘 너무 바쁘게 일하는 것 같던데 체력은 괜찮은 거야?”

오랜만에 만난 연화정 감독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부터 하셨다.

“감독님, 찔리시나보네요.”

“크흠.”

내 스케줄도 스케줄이지만, 감독님이 요즘 내주는 숙제의 양이 장난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법 잘 따라오다 보니 흥이 나신 모양이다.

이제는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에 한계를 두지 않고 진지하게 영화에 대한 공부 쪽으로 숙제의 종류가 넓어졌다.

처음 감독님께 가르침을 받는 취지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감독님이 나를 정말 예쁘게 봐주셨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관심 없는 사람한테 시간을 따로 내서 가르침을 주겠는가.

더불어 오늘 이 자리도 감독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힘들다고 해서 투정 부릴 정도로 철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쩔 때는 저한테 너무 잘 해주셔서 이게 꿈이 아닌가 생각도 들거든요.”

“꿈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꿈같은 일은 맞죠. 감독님한테 가르침을 받는 것도 엄청 특별한 일인데, 오늘은 친한 배우 선배님들을 소개시켜주겠다면서 자리까지 만들어주셨잖아요.”

여전히 아이돌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감독님 입장에서는 서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혼자서 주책 부리는 건데, 네가 늙은이 장단을 맞춰주는 거다. 이번에 네가 만든 곡 들어봤다.”

“어떠셨어요?”

“대단했다. 음악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감독으로 일하다보니 음악과 영 떨어져서 지낼 순 없어 적당히 듣는 귀가 좀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내 귀에도 그렇게 듣기가 좋았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 네가 잘해서 그런 건데 뭐. 그리고 그래서 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아. 네가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도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야.”

감독님의 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얼떨결에 아이돌이 되면서 이 직업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던 것처럼 배우도 나에겐 마찬가지였다.

초반에는 굳이 연기를 해야 할까 싶었던 내가 어느새 연화정 감독님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연화정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게 되면서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다는 거다.

더불어 감독님이 정말 영화를 사랑하고 있으시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사람이 한 가지에 관심이 있다 못해 집착을 하게 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저렇게까지 만드는 게 영화라면 영화는 대단한 게 맞았다.

“자꾸 칭찬만 하시니까 제가 버릇 나빠질까봐 걱정 되네요.”

“너는 좀 거만해도 돼. 그 재능에 외모에 재력까지. 부족한 게 뭐가 있냐고. 오히려 나는 네가 너무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싶거든.”

“제가 사람들 눈치를요?”

“그렇지 않고서야 너같이 잘난 애가 자기 잘난 걸 티를 안 낼 이유가 있냐고. 혹시 유년시절에 사람들한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했어.”

“아~ 그래서 저번에 그걸 물어보신 거군요.”

뜬금없이 어릴 적을 집요하게 물어보시더라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구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알기 때문이다.

진짜 나이가 20대인 것도 아니고.

살아 온 세월만 해도 벌써 40을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어른이라고 사리분별 할 줄 아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저도 실수하는 사람인 걸요. 주변 사람들한테 괜히 대신 짜증내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걸 스스로 느끼고 반성한다는 게 대단한 거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게 정말 쉽지 않아. 주변에서 항상 우리를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띄워주거든. 그럴 때 중심 잡는 게 정말 힘들어.”

“감독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에서 유명 상을 받아서 더 그러셨겠네요.”

“그렇지. 정말 힘들었어. 내가 세상에서 영화를 제일 잘 만드는 사람인 것 같고 그랬거든. 영화 하나 제대로 말아먹지 않았으면 아직도 정신 못 차렸을 거야.”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감독님 영화도 망한 게 있어요?”

“당연히 있지! 나라고 성공만 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만든 영화는 역대급으로 망작이었지. 아무도 내 영화에 공감하지 못했거든. 그때 영화를 함께 찍은 배우한테 못 할 짓도 많이 했어.”

제대로 연기를 하라면서.

본인이 뭐가 그렇게 잘 났다고.

“나는 영화 찍는 사람이지, 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거든. 근데 그땐 그게 맞는 건 줄 알았어. 하, 이건 내 흑역사라서 아무한테나 말 안 하는 내용인데 너니까 특별히 해주는 거다.”

“아…!”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쪽팔린 게 배우를 죽어라 살어라 하면서 찍은 영화가 편집에 들어가서 마음에 안 든 거야. 당연하지. 애초에 시놉부터 망한 거였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 근데 여기서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게 그걸 본인의 실력 탓이 아니라 배우 탓을 한 거지야. 그때를 생각하면 뭐가 씌인 것 같아.”

“어떻게 깨달으시게 된 거에요? 본인의 실수였다는 걸요.”

“영화가 다 망하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영화에서 남은 건 배우 연기밖에 없다고. 그때 누가 내 뒤통수를 돌로 내려찍는 것 같더라.”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걸 남탓하다가 그게 본인의 탓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제야 내 주제를 깨닫게 된 거지.”

“그럼 그 배우분께서는…?”

“내가 그 치한테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사과했어. 크크, 아마 오늘 만날 수 있을 거야. 걔도 참 호구지. 그렇게 못살 게 굴었던 나를 아직도 만나고 다닌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감독님에게서 진한 신뢰가 느껴졌다.

더욱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온다는 건 내가 알만큼 유명한 배우라는 뜻이 된다.

그렇게 독하게 연기를 한 분이니 연기력은 어디에서 뒤지지 않을 터.

오늘 만남이 새삼 기대가 됐다.

“근데 좀 궁금한 게 있어요. 전 감독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내용들로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아마 그 배우분도 본인의 연기 실력에 도움이 됐다는 걸 알아서 감독님의 사과를 받아준 게 아닐까 싶다.

“전혀 아니야. 그건 순전히 걔 능력이었어. 내 개똥같은 참견을 본인이 찰떡처럼 알아들은 거지. 지금 내가 널 가르칠 수 있는 건 그때 그 일로 너무 창피해서 공부했기 때문이야. 창피해서 감독을 그만둬버릴까 생각하다가 그건 또 못 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연기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 거지.”

감독님이 날 가르치는 실력에 그런 비하인드가 있을 줄은 말이다.

“대단하시네요.”

“대단은 무슨. 그냥 영화에 미련을 못 버린 노괴물이지. 아무튼 다시 얘기하던 걸로 돌아와서 너한테 애들 소개시켜준다는 건 내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야. 네가 이쪽에서 계속 일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만든 거고. 아무래도 일이라는 게 인맥으로 돌아가는 판이다 보니 아는 사람을 만들어두면 좋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잖냐.”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주세요.”

“아니지. 네가 감독 마음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너 같은 재능 있는 배우를 내가 생각한 캐릭터로 만들어서 카메라에 담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모를 거야.”

감독 입장에서 배우로 성공하는 사람과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영감을 줄 수 있는 배우인지 아닌지에 갈린다고 한다.

“네가 그런 배우야.”

아직 촬영도 제대로 못해 본 상황인데 감독님이 나를 너무 예뻐하시니, 그녀가 만족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확신하시는 거에요?”

“네가 보내준 영상들을 봤잖아. 그걸 봤는데 모르면 감독하면 안 되지.”

숙제를 했다는 걸 확인 받기 위해 연기하는 걸 영상으로 찍어서 감독님에게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영상을 통해 감독님은 내 재능을 확신하시는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해요?”

그때였다.

“어~ 왔냐?”

훤칠한 미남이 룸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님이 어서 오라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오늘 누가 오는지 참석자의 정체를 전혀 알려주지 않아 과연 감독님의 소모임 참석자 중 누가 올지 궁금했는데, 첫 타자부터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깍듯하게 우지용 선배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지용 선배님. 처음 뵙겠습니다. 진해솔입니다.”

“어어~ 안녕. 어우~ 얘는 진짜 얼굴이 장난 아니네.”

“그치? 내가 실물보고 경악했잖아. 이쪽으로 앉아.”

우지용 배우.

올해 43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30대로 봐도 좋을 정도로 동안인 대세 배우다.

드라마보다는 스크린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역시나 연화정 감독님의 영화에 단골로 캐스팅 되는 배우였다.

170 중반의 키와 적당히 균형 있게 잡힌 몸매.

짙은 눈썹에 새하얀 피부와 굵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흥행 배우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나한테는 까마득한 선배님이며,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애들은 왜 아직 안 와?”

“이원이는 팬들한테 걸려서 싸인 중이고, 박씨는 오늘 꽃단장하고 올 거라고 좀 늦을 거라네요.”

“꽃단장? 걔가 꽃단장을 왜 하는데?”

“자기가 우리 모임 비주얼 담당인데, 얘한테 안 밀리려면 꾸미고 와야 된다던데요?”

“어이구, 그 푼수. 또 푼수짓 하는구만.”

박씨?

‘그나저나 주이원 선배님도 오시는구나.’

박씨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박소원 선배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박소원 배우.

우지용 선배님과 동갑인 43세 남자 배우로, 명품 조연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계신 분이시다.

“응. 박소원이 너한테 시비 걸어도 그러려니 하고 속에 담아두지 마. 대답만 깍듯하게 하다보면 걔 혼자서 마음 풀고 잘 해줄 거다. 걔가 생긴 것처럼 성격이 참 비좁고 질투심이 많거든. 근데 이게 또 질투심을 받는 게 나쁜 것도 아니야. 걔가 질투한 배우들은 전부 잘 됐으니까. 아참! 나 말 편하게 해도 괜찮지? 감독님한테 하도 네 얘기를 듣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친근감이 생겨서 말이야.”

“물론이죠. 편하게 말씀해주셔야 제가 더 편합니다.”

“그래그래. 내가 후배 배우들 여럿 봤는데, 이렇게 잘 생기니까 확 눈에 들어오긴 한다. 나도 이 얼굴로 살 때 여러모로 불편했는데 너는 더 심했겠어.”

선배님은 자기 얼굴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는지 나와 본인의 얼굴을 비교하는 것에 서슴이 없었다.

오히려 저런 모습이 더 자신감 있고, 호탕하게 보이는 걸 본인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선배님 쪽에서 나를 편하게 대해주시니, 나도 덩달아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오늘 참석하는 분이 세 분이 전부인가요?”

“아마 그럴 걸?”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우지용 선배님에 비해 나는 궁금했던 퀴즈의 정답을 맞춘 사람처럼 속이 시원했다.

우지용 선배님이 감독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이 분은 그때 그 배우가 아니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속이 좁다는 박소원 선배님도 아닐 테니 남은 사람은 주이원 선배님밖에 없었다.

‘나중에 돌아가서 그 영화 찾아봐야겠다.’

과연 최악의 환경에서 어떻게 연기를 했을지.

더불어 그가 어떤 사람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