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49화 (549/849)

“과거 그 일 얘기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주이원 선배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혼자서 술을 자작하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어 버리니까 내 입장에서도 딱히 할 말이 없어져서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너희들 뭐하고 있는 거냐? 재미없게.”

뒤늦게 우리 둘이 어색하게 앉아 있는 걸 본 감독님과 선배님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주었다.

“이원 선배님이랑 얘기 나눠보고 싶어서 제가 이쪽으로 왔습니다.”

“어…걔랑? 친해지기 힘들 텐데.”

“의외로 둘 성격이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근데 친해지기가 쉽지 않지. 이원이가 낯을 많이 가리잖아. 둘이 아직도 선배님 해솔씨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몰라?”

우지용 선배님과 박소원 선배님이 말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까 얼굴 합이 굉장히 좋네.”

감독님은 어느새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서 이원 선배님과 나의 투샷을 잡았다.

그리곤 즉흥적으로 주이원 선배님에게 물었다.

“이원아. 이번 영화에 카메오 같은 걸로 잠깐 나올 생각 있냐?”

“감독님이 부르시면 가야죠.”

“허허! 이것 참, 소속사에 물어보지도 않고 괜찮다는 거야? 우리 애들은 너무 예스맨들이라니까. 다른데 가서도 이러는 거 아니지?”

“감독님한테만 그러는 겁니다. 감독님이 아무나는 아니니까요.”

“그래그래. 고맙다. 아무리 카메오라도 아무 역할이나 너한테 줄 순 없지. 네가 만족할 만한 캐릭터로 출연시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이원 선배님은 뭐든 상관없었는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액션 시켜주셔도 됩니다.”

“에헤이, 그건 안 된다니까.”

“예전에는 해본 적이 없어서 못했던 거에요. 지금 연습하고 있어요.”

“너 액션 영화 하려고?!”

박소원 선배님이 주이원 선배님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연습해서 할 줄 알게 되면 피할 이유는 없죠.”

“정말하려고?? 그러다가 크게 다쳐. 인마. 너는 로맨스로 쭉 가도 돼. 부르는 곳 많잖아.”

“감독님이 액션 영화를 찍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못해서 주연을 못했잖아요. 다신 그럴 일 없게 할 거에요. 다음은 양보 안 합니다.”

이번에 작품 주연이 되지 못한 것이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 영화에 모든 주연을 너로 쓸 수는 없어.”

“저는 감독님이 어떤 영화를 하든 섭외 1순위가 될 정도로 준비 된 배우가 되는 게 목표에요. 제가 액션을 미리 준비해뒀으면 감독님이 굳이 진해솔씨 연기를 가르칠 일도 없었겠죠. 감독님은 절 섭외하면 됐을 테니까요.”

“…….”

멀쩡하게 주연으로 캐스팅 돼서 준비 잘 하고 있는 나를 경계하는 시선을 보내온다.

나는 그제야 주이원 선배가 낯을 가려서 거리감을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건 나에게 경쟁심을 보이고 질투를 하는 눈빛이었다.

그동안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던 거였다.

“한 가지 정정하자면, 해솔이는 액션 연기가 굉장히 훌륭해. 만약 네가 액션을 할 줄 알았다고 해도 해솔이 대신 널 선택했을 것 같지가 않다.”

“!!”

“내가 해솔이한테 바라는 건 액션이었어. 뭘 가르치고 말고 할 게 없었지. 그런데 얘가 의외로 욕심을 부리더라고. 연기 쪽은 왜 기대를 안 하냐면서 말이야. 연기도 액션도 모두 다 잡겠다고 하지 뭐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고 있던 우지용 선배님과 박소원 선배님이 슬그머니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배우라면 그 정도 욕심은 부릴 줄 알아야지! 잘 생각했네.”

“기특하지. 바라지 않는 부분까지도 욕심내서 해보겠다고 했으니까. 말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어. 활동으로 바쁜데도 내가 내준 숙제들을 빠짐없이 해내거든. 내가 얘를 좋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거지.”

“감독님이 왜 이렇게 얘를 예뻐하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만. 나는 또 사제지간 정인 줄 알았지. 이원이도 엄청 예뻐하시잖아.”

“크흠! 그건 뭐 예쁜 짓을 하니까 그런 거라니까? 아무튼 이원아, 내가 해솔이를 가르친다고 해서 얘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야. 부족했으면 아예 캐스팅 할 생각도 안 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나는 괜찮지만, 해솔이는 자존심이 좀 상했을 거다. 앞으로 자주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무리 하고 싶었어도 결론이 난 일인데 뒤끝 보이면 안 돼. 그걸 마음에 담아두면 너 본인한테도 안 좋은 일이야.”

“…네.”

감독님이 조곤조곤 주이원 선배님의 잘못을 지적하니 주이원 선배님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선배님. 열심히 촬영하라는 의미로 받겠습니다.”

그 자리를 꼭 갖고 싶어 하는 사람 대신 차지하게 된 자리이니 열심히 촬영해서 멋진 영화를 만들어보겠다.

내 말을 들은 이원 선배님이 소주병을 들어올렸다.

“사과의 의미로 한 잔 따를게요.”

“영광입니다, 선배님. 저도 따라드리겠습니다.”

술 한 잔으로 푸는 거야 말로 남자의 멋 아니겠나?

더욱이 그에게 불편한 마음은 정말 영화를 멋지게 찍어서 성공하는 것으로 멋들어지게 복수할 수 있는 거였다.

영화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그 자리를 놓친 주이원 선배님의 속이 쓰릴 테니 말이다.

“이러다가 둘이 단짝 되는 거 아녀?”

박소원 선배님이 술 잔을 나누는 우리를 보며 낄낄 웃었다.

감독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것인지, 아니면 술 한 잔씩 서로 나누고 나니 응어리진 마음이 풀렸는지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이원 선배님은 까칠한 모습이나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술자리는 문제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 됐다.

“근데 얘가 액션을 그렇게 잘해요?”

술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 익었을까?

박소원 선배님이 돌연 나에 대해 감독님에게 물었다.

“잘하지.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죽여줘.”

“이야~ 죽여주게 잘한다라…. 기대 되네. 한 번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아쉽습니다.”

“나중에 영화 나오면 영화로 보면 되지!”

“촬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느 세월에 봐요.”

“근데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맨액션? 그거 진짜 가능한 겁니까?”

“원래 남자들이 여자보다 신체능력이 더 뛰어나. 못할 게 뭐가 있어?”

“남자 배우들 몸 사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감독님 영화니까 그나마 하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있었던 거지, 다른 감독 영화였으면 얼씬도 안 했을 걸요.”

“그래서 이번이 중요한 거다. 내가 아예 영화판을 뒤집어 버릴 거야! 얘가 내 옆에 있는데 뭔들 못하겠냐고. 으하하!”

감독님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죽여준다는 액션에 대한 의문이 담긴 시선이 나를 향한다.

1명도 아니고 2명도 아니고 무려 3명의 시선인지라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영화로 보여드릴게요.”

“이거 참, 궁금해서 못 참을 것 같은데. 혹시 이원이 말고 카메오 더 필요 없어요, 감독님?”

“지용이 너도 카메오로 나오겠다고?!”

“옙. 돈도 필요 없어요. 대신 얘 시원하게 액션씬 찍을 때 불러줘요. 구경 좀 하게.”

“이러면 나도 가만히 못 있지. 나도 합시다!”

박소원 선배님까지 카메오로 합류를 하겠다고 해오자 이원 선배님의 입술이 또 삐죽 나왔다.

“감독님이 나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카메오는 무슨 카메오야.”

“그래서 싫으세요, 감독님?”

“아니! 싫을 리가. 출연해준다는데 내가 그걸 왜 거부하겠어. 다 나와. 대신 너희들은 좀 웃기는 캐릭터로 출연시켜도 되겠냐?”

“개그 캐릭터도 매력 있게 만드는 건 제 전문이죠.”

우지용 선배님이 쿨하게 감독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내 액션을 보겠다고 카메오를 하겠다는 거였으니 어떤 캐릭이든 상관이 없나보다.

“아~ 나는 개그 캐릭터 별로 안 어울리는데.”

박소원 선배님은 살짝 빼는 듯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째 오늘 모임에 나만 두둑하게 주머니를 챙겨가는 것 같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앉은 자리에서 카메오 세 명을 얻은 거잖아요. 아무래도 오늘 자리는 감독님이 쏘셔야겠어요.”

“그럼!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감독님은 기분 좋게 계산서를 자신 쪽으로 챙겨왔다.

이름값 높은 선배님들이 카메오로 출연해주는 것으로 우리 영화가 한층 더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건 나였다.

나중에 감독님에게 선배님들을 소개시켜준 걸로 감사 인사를 따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술자리에서 해주는 다양한 경험담과 현장 이야기들이 앞으로 이쪽 일을 하게 됐을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감독님이 나를 직접 데리고 와서 선배님들과 소개시켰다는 게 소문이 퍼진다면 내가 아이돌이라는 점을 두고 수근거릴 사람들이 반 이상 입을 꾹 다물어버릴 것이다.

그만큼 이쪽에서 인맥이 차지하는 영향은 컸다.

♧ ♧ ♧

연화정 감독의 차기작이 맨액션이라는 것은 업계에 소문이 쫙 났다.

주인공을 캐스팅 하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 했으니 소문이 안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연화정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말에 묻지도 않고 고!를 외쳤던 투자자들한테는 썩 좋지 못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래놓고 캐스팅한 게 쟤라는 거지….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냐? 지금이라도 뺄까?”

“아휴,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진해솔이잖아요. 진해솔이면 티켓 파워가 엄청날 겁니다. 팬 숫자가 어마어마하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아이돌이라니! 연화정 감독이 슬슬 감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아니면 늙어서 힘이 딸리던지. 성공할 자신이 없으니까 저런 애를 캐스팅해서 영화 만들겠다고 한 거 아니겠어?”

“그렇다고 투자를 안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무려 연화정 감독인데.”

감 떨어진 것 같다고 해서 투자를 안 할 수는 없는 이유.

그건 연화정 감독의 영화에 투자를 했다는 것자체가 이 바닥에서 꽤 먹어주는 명함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지. 에휴~ 이번 영화 이거 될 것 같긴 하냐?”

“진해솔 티켓 파워를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적어도 본전은 건질 겁니다.”

“대박은 몰라도 본전치기는 가능하다…. 쟤가 그렇게 대단해? 잘 생긴 건 인정한다만 이 바닥에 얼굴 좋은 놈이 어디 한 둘 이냐고.”

“진해솔은 급이 다릅니다. 배우도 감히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에요. 거기다가 아이돌로 가진 팬들도 장난이 아닙니다. 진해솔 팬들이 한 번씩 보고나면 손익분기점 넘을 거고, 여기에 추가로 해외 팬들도 한 번씩 보는 겁니다. 그럼 영화가 산으로 가도 저희가 손해 볼 일은 없는 거죠.”

부하직원의 설명을 들은 김대표는 담배를 입에 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이 바닥 돌아가는 거에 적응하는 거 너무 어렵다. 나 같은 늙은이는 트렌드라는 걸 이해 못하겠어. 난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답이 안 나오는 짓 같았거든.”

“그래서 제가 대표님 옆에 월급 받으면서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짜식이 겸손을 모른다니까. 아무튼 손해 볼 일 없다 이거지?”

“옙.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연화정 감독 다음 작품도 투자를 하실 건지는 나중에 결과를 보고 결정하셔야 할 것 같네요.”

“망하면 손 떼야지. 감 떨어졌다는 건데.”

“그래도 연화정 감독이잖아요.”

“이 바닥에 영원한 건 없다. 그게 내가 믿는 진리야.”

연화정 감독이 연출하게 될 영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영화의 결과를 팔짱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맨액션이라는 낯선 장르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연화정 감독의 명성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아직 촬영이 시작 되지도 않았지만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연화정 감독이 정말 대단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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